도구론 - Chapter 6. T - Tuning

조율과 규격화

by천원

토요일 오전, 성준은 며칠 전 배송받은 짙은 회색 인테리어용 시트지 롤을 거실 바닥에 내려놓았다.


자취방 주방의 싱크대 하부장 문짝 표면은 이전 세입자가 험하게 쓴 탓에 군데군데 긁혀 있었고, 손잡이 주변은 지워지지 않는 누런 기름때로 얼룩덜룩했다. 세제를 묻혀 닦아내도 지저분한 흔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낡고 칙칙한 문짝 겉면에 방수 인테리어 시트지를 새로 덧붙여 주방 분위기를 정갈하게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시트지 시공의 기본은 처음부터 완벽한 크기로 재단해서 맞추는 것이 아니었다. 접착면을 붙이다가 1밀리미터라도 비뚤어지면 모서리가 모자라 밑바탕이 흉하게 드러나기 십상이었다. 실제 문짝 치수보다 사방으로 2~3센티미터씩 넉넉하게 여유를 두고 대충 크게 잘라 붙인 뒤, 모서리 틈새를 따라 커터칼을 밀착시켜 여분의 테두리를 깔끔하게 도려내는 것이 정석이었다. 하지만 '대충 크게 자른다'라고 해서 실측 자체가 필요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문짝의 가로세로 치수를 모르면 롤 원단에서 여유분을 포함해 얼마만큼 잘라내야 할지, 원단을 가로로 앉힐지 세로로 앉힐지 잘 계획해야 낭비 없이 알뜰하게 쓸 수 있었다.
성준은 공구 상자에서 손바닥만 한 은빛 줄자(Tape measure)를 꺼냈다. 고무 피복이 둘러싸인 단단한 케이스 상단의 검은색 고정 슬라이더를 엄지로 살짝 밀어 올렸다.


치르러륵.


노란색 에나멜 바탕에 1밀리미터 간격으로 검은 눈금이 촘촘하게 인쇄된 얇은 강철 띠가 곧게 뻗어 나왔다. 중심이 오목하게 휜 아치형 곡면 단면 덕분에 1미터를 넘게 뽑아내도 꺾이지 않고 허공에서 팽팽하게 수평을 유지했다. 성준은 쇠고리를 문짝 오른쪽 모서리에 걸고 하부장 문짝의 가로 폭을 쟀다. 눈금은 정확히 395밀리미터를 가리켰다. 이어 세로 높이를 측정하자 680밀리미터가 나왔다.
눈대중으로 보았을 때는 '대략 40에 70 정도 되겠지' 싶었던 모호한 크기가, 줄자의 눈금 위에서 395 ×680밀리 미터라는 정밀한 수치로 확정되었다. 이 기준이 서자 작업의 윤곽이 단번에 잡혔다. 폭 50센티미터로 감겨 있는 시트지 원단을 그대로 활용하고, 세로 길이는 680밀리미터에 위아래 여유분 50밀리미터를 더해 730밀리미터 지점에서 한 번만 크게 잘라내면 자투리 낭비 없이 문짝 하나를 온전히 덮을 수 있었다.


성준은 바닥에 시트지를 길게 펼쳤다. 줄자를 당겨 730밀리미터 지점에 연필로 가볍게 점을 찍은 뒤, 커터칼로 쓱 그어 큼직한 사각형 한 장을 넉넉하게 분할해 냈다.
문짝 손잡이를 드라이버로 미리 풀어내고, 시트지 뒷면의 이형지를 상단부터 10센티미터쯤 벗겨냈다. 문짝 윗면과 좌우로 시트지가 2~3센티미터씩 고르게 삐져나오도록 자리를 잡고 상단을 손바닥으로 눌러 붙였다. 그다음 안 쓰는 카드에 안경천을 씌워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공기를 밀어내며 이형지를 아래로 천천히 당겨 내렸다. 기포 하나 없이 팽팽하게 펴진 시트지가 문짝 겉면을 단단하게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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