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과 퇴역
독립할 무렵 인터넷 쇼핑몰에서 ‘가성비 스테인리스 냄비’라는 문구를 보고 저렴하게 장만했던 2단 구조의 냄비였다. 얇은 은빛 몸체는 가벼웠고, 상단 찜판에는 증기가 올라오도록 뚫린 구멍들이 촘촘했다. 성준은 이 냄비를 꽤 요긴하게 썼다. 냄비 바닥에 물을 붓고 찜 판 위에 젖은 면포를 깔아놓은 뒤, 냉동실에 얼려두었던 모닝빵을 넣어 데우면 갓 구워낸 것처럼 촉촉하고 쫄깃해졌다. 꽁꽁 얼어붙은 냉동 피자 조각을 얹어 뚜껑을 덮어두면 치즈가 아래로 흘러내리지 않으면서도 도우 바닥까지 부드럽게 익어 전자레인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맛이 좋았다. 성준은 이 넓은 찜솥을 참 좋아했다.
성준은 냄비에 수돗물을 찰랑거리게 채우고 불을 켰다. 그사이 싱크대 찬장에 붙어 있던 병따개 자석 하나가 떨어져 싱크대 상판 위를 굴렀다. 성준은 자석을 집어 들려다 무심코 냄비 옆면에 가져다 대보았다.
착.
경쾌하면서도 묵직한 소리와 함께 자석이 냄비 옆면에 달라붙었다. 살짝 떼어내 보려 했지만 제법 강한 자력으로 착 달라붙어 있었다. 고급 스테인리스 식기라면 자석이 붙지 않거나 아주 미세하게 반응해야 정상이지만, 이 냄비는 마치 일반 철판처럼 자석을 끌어당겼다. '스테인리스'라는 이름만 달았을 뿐, 크롬과 니켈 함량이 턱없이 부족한 저가형 합금, 사실상 녹에 취약한 양철이나 강판에 불과하다는 뜻이었다.
성준은 씁쓸하게 웃으며 지난 가을의 기억을 떠올렸다.
냉동 만두를 얹어두고 거실에서 바카라을 읽다가 물이 다 졸아드는 줄도 몰랐던 날이었다. 주방에서 훅 끼쳐온 매캐한 탄내에 놀라 달려왔을 땐 이미 늦어 있었다. 바닥의 물은 증발해 버렸고, 얇은 쇠 바닥은 시커멓게 타서 흉한 그을음이 번져 있었다.
철수세미로 박박 문질러도 시커먼 탄 자국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토마토케첩의 산성 성분을 바르면 탄 냄비가 닦인다는 글을 보고, 냉장고에서 케첩을 꺼내 바닥 가득 붉게 짜놓고 반나절을 불려두기도 했다. 하지만 케첩을 닦아내고 철수세미로 팔이 저릴 때까지 문질러도 짙은 얼룩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바닥은 원래의 은빛 대신 얼룩덜룩하고 칙칙한 회색빛으로 변해버렸고, 얇아진 바닥 철판은 미세하게 우그러져 가스레인지 삼발이 위에서 조금씩 덜컹거렸다.
물이 끓기 시작하자 뚜껑 틈새로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성준은 만두를 넣기 위해 뚜껑을 열고 상단 찜판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구멍 사이사이에 붉은빛이 돌고 있었다. 김이 서려 맺힌 물방울 아래로 붉고 텁텁한 녹물이 얇게 번져 나와 있었다. 면포가 닿는 모서리 접합부와 증기 구멍 가장자리마다 붉은 녹이 피어 있었고, 냄비 바닥에 고인 끓는 물 역시 투명하지 않고 누런 땟물이 섞인 듯 탁한 빛을 띠었다. 그동안 깨끗이 씻어 말린다고 말렸지만, 탄 자국을 없애겠다고 수세미로 문지르며 표면의 미세한 피막을 모조리 긁어낸 탓에 쇠 본체가 공기와 습기에 그대로 노출되어 곪아 터진 것이었다.
성준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가스 불을 껐다. 파란 불꽃이 사라지자 치솟던 증기도 힘없이 잦아들었다. 손잡이를 잡고 찜판을 들어 올리자 접합부 안쪽에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붉은 녹물 한 방울이 냄비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음식을 조리하는 도구에서 녹물이 나온다는 것은, 도구로서의 쓸모가 끝났음을 알리는 돌이킬 수 없는 신호였다. 케첩을 바르고 수세미로 문지르며 억지로 이어 붙여온 수명이었지만, 한계에 도달한 물성은 더 이상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성준은 물이 식기를 기다렸다가 조심스럽게 싱크대에 물을 비워냈다.
덜그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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