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구론 - Chapter 4. F - Fatigue

재질의 마모

by천원

성준이 집 현관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각이었다.

밖에서 늦은 시간까지 이어진 미팅과 긴 이동 탓에 목과 어깨가 뻐근했다. 입고 있던 짙은 감색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걸고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저녁을 김밥 한 줄로 대충 때웠던 터라 속이 헛헛했다. 라면을 끓여 먹기에는 부담스럽고, 따뜻한 계란프라이 두 개를 부쳐 물 한 잔과 함께 먹고 자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성준은 싱크대 수납장 아래쪽 문을 열었다. 손잡이를 잡고 익숙하게 꺼내 든 것은 혼자 살기 시작했을 때 샀던 28센티미터짜리 검은색 프라이팬이었다. 주방 싱크대의 형광등 불빛 아래 내려놓고 팬 안쪽을 보는데 바닥상태가 눈에 밟혔다. 처음 샀을 때는 흠집 하나 없이 까맣고 매끄러웠지만, 지금은 가운데 부분이 군데군데 하얗게 벗겨져 있었다. 젓가락으로 건드리며 생긴 자잘한 흠집과 수세미로 문지르며 생긴 잔흠집들이 바닥 전체에 촘촘하게 퍼져 있었다.


성준은 가스레인지 불을 켜고 팬을 올려놓았다. 파란 불꽃이 바닥을 데우기 시작하자 식용유 병을 기울여 두 방울 떨어뜨렸다. 예전 같으면 기름이 방울 모양으로 동글동글 맺히며 팬을 살짝 기울이기만 해도 스르륵 미끄러져 다녔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기름이 떨어지자마자 동그랗게 뭉치지 못하고 얇고 평평하게 퍼지더니, 코팅이 벗겨진 거친 틈새로 그대로 스며들듯 달라붙었다. 팬 손잡이를 잡고 좌우로 흔들어 보아도 기름은 부드럽게 퍼지지 않고 뻑뻑하게 멈추어 섰다.


성준은 냉장고에서 계란 두 개를 꺼내 모서리에 톡 깨서 넣었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투명한 흰자가 하얗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고소한 기름 냄새가 올라오자 서랍에서 나무 뒤집개를 꺼냈다. 흰자 가장자리가 어느 정도 익은 것을 보고 뒤집개 앞부분을 계란 밑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나 팬 바닥의 가운데 부분이 계란을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성준은 뒤집개를 조금 더 깊숙이 밀어 넣어 살살 떼어내려 했다. 하지만 이미 코팅이 다 벗겨진 바닥은 계란을 단단하게 붙들고 있었다. 힘을 조금 더 주자 퍽 하는 느낌과 함께 노른자가 터져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뒤집개 끝에 걸려 올라온 것은 말끔하게 부쳐진 계란이 아니라, 바닥에 눌어붙어 찢겨 나간 흰자 조각뿐이었다.
성준은 짜증을 내거나 억지로 뒤집개로 바닥을 벅벅 긁어대지 않았다. 가만히 손을 멈추고 조용히 가스 불을 껐다. 불이 꺼지자 지글거리던 소리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이건 불 조절을 잘못했거나 뒤집는 타이밍을 놓쳐서 생긴 일이 아니었다. 매일같이 센 불을 견디고, 기름과 양념을 받아내고, 수세미로 닦여 나가면서 팬의 수명이 다했다는 뜻이었다.


성준은 찢어진 계란을 접시에 덜어낸 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팬을 싱크대로 가져갔다. 수전을 틀어 미지근한 물을 바닥에 자작하게 채워 두었다. 무리해서 긁어내지 않고 물에 불려 부드럽게 헹궈낸 다음 이제는 재활용 수거함으로 보내줄 때가 된 것이었다. 아무리 손에 익고 오래 쓴 물건이라도 제 몫을 다하고 닳아버렸을 때는 억지로 고집부리지 않고 담담하게 새것으로 갈아주는 것, 그것이 일상의 도구를 다루는 가장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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