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장. 사후작용

by홍종민


16장.


사후작용


— 과거는 현재가 다시 쓴다 —


상담이 끝나고 몇 달 뒤에 그 여성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버지 기억이 달라졌다고 했다. 아버지가 한 일은 그대로인데. 사실은 하나도 안 변했는데. 그런데 그것이 다르게 느껴진다고.


처음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일어난 일은 그대로인데 기억이 달라진다는 것. 사실은 고정되어 있는데 그 사실의 무게가 옮겨간다는 것.


오래 걸려 알았다. 과거가 현재를 만드는 것만이 아니다. 현재가 과거를 다시 쓴다.


기억이 달라졌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좋게 포장한 것이거나. 시간이 지나고 여러 사람에게서 같은 말을 들으면서 알았다. 착각이 아니었다. 과거의 사건은 그대로 있는데, 그 사건이 놓인 자리가 옮겨진 것이다. 같은 돌이 다른 배경 위에 놓이면 다른 색으로 보이듯이.


— 사실은 그대로인데 의미가 변했다 —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한다. 과거의 상처가 현재의 고통을 만든다. 어릴 때 받은 것이 지금을 힘들게 한다. 그러니 과거를 치유해야 한다. 절반은 맞다. 나머지 절반이 빠져 있다.


과거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사후작용(事後作用, Afterwardness)이 그것을 다시 쓴다. 임진수의 『환상의 정신분석』에서 이 개념을 만난다. 나중의 경험이 이전의 기억을 재구성한다는 것. "기억 흔적의 형태로 현재에 제공되는 재료는 가끔 새로운 조건, 즉 현실적인 조건에 따라 재조직되고 재기록된다"(임진수, 2005: 119).


재기록된다. 이 한 단어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 과거는 한 번 기록되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경험이 들어올 때마다 다시 쓰인다. 사후작용의 영향력은 대단해서, 1차 시기의 경험을 수정하기도 하고 때로는 만들어내기도 한다(임진수, 2005: 119).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 대목이 서늘하다. 있었던 일을 고쳐 쓰는 것을 넘어, 없던 과거를 지금이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러니 상담에서 떠오른 과거를 원본이라 믿는 순간, 사실은 지금이 만든 과거를 원인이라 부르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우리가 도착하는 그 과거는 이미 여러 겹의 현재가 덧쓴 판본이다.


아버지가 자신을 한 번도 인정하지 않았다고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그 기억이 아프다. 상담에서 인정받는 경험이 쌓였다. 그 현재의 경험이 과거 기억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가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경험이 새로 생겼기 때문이다.


현재의 경험이 과거를 다시 썼다.


이것을 처음 목격했을 때 나는 믿기 어려웠다. 아버지는 죽었고, 그 시절은 지났고, 사실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 그 사람의 아버지가 달라졌다.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의 자리가 달라졌다. 인정하지 않은 아버지에서, 인정할 줄 몰랐던 아버지로. 사건은 그대로인데 그 사건을 읽는 격자가 바뀐 것이다.


— 두 번째 소리가 첫 번째를 깨운다 —


평소에 괜찮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진다. 특별히 다른 것을 하지 않았는데. 이야기가 갑자기 너무 커지고,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이 터진다.


증상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개 이상의 외상이나 경험이 필요하다. 임진수는 이것을 소리굽쇠의 공명에 비유했다(임진수, 2005: 22). 소리굽쇠의 한쪽 날개가 1차 시기의 외상이고, 다른 쪽 날개가 2차 시기의 경험이다.


하나의 사건만으로는 증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 이 말이 임상을 뒤집는다. 어떤 끔찍한 일을 겪었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상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상처가 되려면 나중에 그것과 공명하는 두 번째 경험이 도착해야 한다. 첫 번째 사건은 그때까지 잠들어 있다. 의미 없이, 이름 없이.


대구 지하철 참사 생존자가 그랬다. 참사 현장에서는 멀쩡하게 빠져나왔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아무 외상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나중에 영화관에서 나오는 순간, 환청이 들리고 숨이 막히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증상이 나타났다(임진수, 2005: 22). 지하철 참사가 첫 번째 날개였고, 영화관의 어떤 자극이 두 번째 날개였다.


소리굽쇠의 한쪽을 치면 다른 쪽에 파동이 전달되어 공명이 일어나듯, 사후의 경험이 그 전에 일어났던 외상을 깨우면서 증상이 나타난다(임진수, 2005: 22). 두 개가 만나야 터진다. 하나만으로는 안 된다.


이 구조가 왜 중요한가. 첫 번째 날개만 보면 원인을 과거에 다 넘긴다. 어릴 때 그 일이 있었으니 지금 이렇다고. 그러면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진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으니까. 그런데 두 번째 날개가 지금 여기에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지금의 경험이 첫 번째 날개를 깨우기도 하고, 반대로 재우기도 한다. 지금이 개입할 자리가 생긴다.


상담실에서도 이 공명이 일어난다. 오래된 것이 잠들어 있다가, 지금 이 방의 어떤 장면과 만나 깨어난다. 내가 한 말, 취한 태도, 잠깐 지나친 반응. 그 지금의 장면이 잠든 과거를 건드린다. 그 순간 갑자기 무너진다.


그래서 반응이 강하고 격렬할수록, 더 오래된 것이 깨어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벌어지는 일의 크기가 이 방의 크기와 맞지 않을 때, 그 초과분이 두 번째 날개다. 지금이 과거를 불러낸 것이다. 오래된 것이 지금과 만날 만큼 이 방이 안전해졌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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