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덮개기억

by홍종민


15장.


덮개기억


— 내담자가 가져오는 것의 뒤를 보라 —


내담자가 기억하는 것이 이상했다. 너무 선명했다. 디테일이 너무 많았다. 몇 살 때 어느 방에서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는지까지. 그런데 그 장면 바로 앞과 뒤가 깜깜했다. 그 장면은 살아 있는데, 그 장면을 둘러싼 시간은 없었다.


처음에는 그냥 기억력의 차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것은 선명하게 기억되고 어떤 것은 흐릿하게 기억되는 것이라고. 그런데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선명하게 기억하는 장면이 있는 사람들은, 그 장면 주변이 항상 깜깜했다. 그리고 그 깜깜한 부분에 말하기 싫어하는 것이 있었다.


선명한 기억이 다른 기억을 덮고 있었다. 그런데 그 현상에 이름을 붙여줄


언어가 없었다. 임진수의 『환상의 정신분석』을 읽고 나서야 그 이름을 알게 됐다.


'덮개-기억'은 '어떤 다른 기억을 덮고 있는 기억'이다. 정신분석은 그 뒤에 숨어 있는 다른 기억을 분석을 통해 찾아야 한다(임진수, 2005: 60). 덮개-기억(Deckerinnerung). 독어로 Decke는 덮개이고 Erinnerung은 기억이다. 덮개 구실을 하는 기억. 그 뒤에 다른 기억이 숨어 있다는 것을 이름 자체가 말하고 있다. 상담실에서 반복해서 목격했던 것이 이 이름 안에 정확하게 들어 있었다.


— 선명한 기억을 의심해야 한다 —


역설이다. 선명한 기억일수록 의심해야 한다.


흐릿하게 기억하는 것은 아직 충분히 억압되지 않은 것이다. 억압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흐릿하지만 남아 있다. 그런데 너무 선명하게, 너무 구체적으로 기억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것을 가리기 위해 작동하고 있을 수 있다.


어린 시절과 관계된 기억으로 특히 선명하고 사소한 내용을 그 특징으로 하는 기억이면 대개 덮개-기억이다(임진수, 2005: 60). 선명하고 사소한. 이 두 특징이 같이 온다. 사소한 것이 왜 그렇게 선명하게 기억되는가. 그 사소함 자체가 이상하다. 중요한 것은 잊힌다. 사소한 것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면, 그 사소함이 다른 것을 가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30대 후반 여성이 왔다. 부모님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초등학교 2학년 때 교실 창문 너머로 보이던 나무를 이야기했다. 그 나무의 색깔, 창문 틀의 색깔, 교실에서 나던 냄새까지. 아주 선명하게.


나는 그 선명함이 이상했다. 왜 그 장면이 그렇게 선명한가. 그 장면 전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물었다. 그 나무를 보고 있던 그 시절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잠깐 멈췄다. 그러더니 그 시절에 부모님이 이혼했다고 했다. 학교에 가 있는 동안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다고. 학교 창문 너머 나무만 바라보고 있었다고.


나무가 덮개기억이었다. 그 나무 뒤에 이혼이 있었다. 나무가 선명하게 기억되는 이유는 그것이 그 시절 견딜 수 있는 유일한 초점이었기 때문이다. 진짜 기억은 너무 아파서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나무를 봤다.


— 기억은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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