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홍종민Sep 26. 2026brunch_membership's
12장.
해석은 가설이다
해석을 하고 나서 내담자의 반응을 볼 때마다 긴장한다.
맞았는가. 틀렸는가. 받아들였는가. 그 긴장이 아직도 있다.
그런데 그 긴장과 편안하게 함께 있는 법을 배우고 있다.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하는 것. 모르면서도 함께 보려는 것.
오래 하다 보니 알게 됐다. 해석이 맞고 틀림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해석은 가설이다. 내담자의 내면에 대한 나의 최선의 추측이다. 그 추측이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추측을 함께 들여다보는 것이다. 맞으면 함께 더 들어가고, 틀리면 다시 보는 것이다. 그것이 해석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해석을 확신이 아닌 가설로 들고 있는 것. 그게 이 장의 이야기다.
자신감 있는 해석이 내담자를 닫게 할 수 있다. 겸손한 해석이 내담자를 열 수 있다. 그 역설이 이 일의 핵심 중 하나다.
— 가설로서의 해석 —
나는 상담 초기에 분석을 통해 내담자에 대한 진실을 발견하고 그것을 전달하는 것이 해석이라고 생각했다. 정확한 분석이 정확한 해석을 만든다고.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임상이 먼저 물었고, 렘마가 나중에 답했다. 해석은 하나의 가설이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지식의 안내를 따르는, 특정한 시점의 환자에 대한 우리의 최선의 추측이다(렘마, 2022: 367). 최선의 추측. 내가 내담자를 이해하는 것은 언제나 나를 경유한다. 내 경험, 내 맹점, 내 이론적 틀. 이것들이 내 이해를 형성한다. 그러니 내 해석이 완전히 객관적인 진실일 수 없다.
우리는 환자의 내러티브를 여과해서 듣는다. 우리가 맹목적인 지점들과 접근이 금지된 영역들을 갖고 있는, 우리 자신의 인격을 통해서 지식에 도달한다(렘마, 2022: 367). 나의 인격을 통해 내담자를 듣는다는 것이다. 해석은 주관적인 행위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이것을 알고 나서 달라진 것이 있다. 해석을 할 때 덜 확신에 차게 됐다. 더 잠정적으로 말하게 됐다. 내담자의 반응을 더 열린 자세로 보게 됐다.
틀릴 수 있다는 것이 이 일에서 약점이 아니다. 오히려 내담자와 함께 갈 수 있는 조건이다. 완벽해야 한다면 실망시킬 것이 두렵다. 틀릴 수 있다면 함께 다시 볼 수 있다.
역설적으로 이 태도가 해석을 더 잘 되게 만들었다. 확신으로 말하면 방어한다. 가설로 말하면 함께 들여다볼 수 있다. 그 차이가 크다.
— 가설과 결혼하지 않는 것 —
상담자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다. 해석을 하나 만들면 그것에 집착하게 된다. 내담자를 설명하는 완전한 그림이라고 느끼게 된다. 그 느낌이 내담자를 보는 것을 방해한다.
그 집착이 생기는 이유가 있다. 해석은 불확실성을 줄여주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라는 설명이 있으면 불확실성이 줄어든다. 그 안도감이 해석에 집착하게 만든다.
렘마의 경고가 정확하다. 우리 모두는 환자를 우리가 가진 이상적인 주형에 맞추려고 시도하면서, 가설과 결혼할 수 있다(렘마, 2022: 368). 한 번 해석을 하고 나면 그것이 맞다는 확신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후의 반응들을 그 해석에 맞게 읽기 시작한다. 해석과 다른 것들은 저항이나 방어로 해석하기 시작한다.
나는 이 함정에 빠진 적이 있다.
한 내담자와 오래 상담하면서 핵심이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온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래서 모든 이야기를 어머니와의 관계로 연결하기 시작했다. 온라인 게임 이야기도, 친구 이야기도, 연인 이야기도. 다 거기로 귀결시켰다.
어느 날 그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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