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홍종민Sep 26. 2026brunch_membership's
9장.
어떻게 해석하는가
나는 한 번 내담자를 완전히 날려버린 적이 있다.
말 한마디로.
30대 초반 여성이었다. 남자친구와 헤어진 직후였다. 울면서 왔다. 두 번째 만남이었다. 이야기를 한참 들었다. 그리고 내가 말했다.
"헤어짐 뒤에 오는 공허감은 사실 그 남자가 아니라 그 이전 대상관계의 반복이에요."
멈췄다. 표정이 굳었다. 이야기가 끊겼다. 분위기가 얼었다. 그 다음 만남에 오지 않았다.
나는 한참 그 이유를 몰랐다. 내가 한 말이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맞는 말이었는데 왜 오지 않았는가.
나중에 알았다. 맞는 말이었지만 그녀의 말이 아니었다. 들을 수 있는 말
이 아니었다. 있는 곳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래서 닿지 않았다.
해석은 맞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닿아야 한다.
닿으려면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그 어떻게가 이 장의 전부다.
케이스먼트가 관찰한 것이 있다. 분석가의 이론적 선입견이 내담자의 재료를 형성한다(케이스먼트, 2003: 60). 내가 배운 언어로 내담자를 보면, 내담자는 내 언어로 자신을 말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내담자의 말인지 내 언어를 배운 것인지 알기 어려워진다. 그 위험을 오래 모르고 있었다.
내담자의 말로 말하는 것. 내담자가 있는 곳에서 출발하는 것. 감당할 수 있는 속도로 가는 것. 이 모든 것이 어떻게 해석하는가다.
— 행동이 먼저다 —
해석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상담을 시작했을 때 나는 해석이 말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내담자의 패턴을 정확하게 짚어주는 것. 무의식에 있는 것을 의식으로 끌어올려 말해주는 것. 그것이 해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내가 내담자와 어떻게 있는지가 이미 해석이다. 약속 시간을 지키는 것. 매번 같은 자리에서 기다리는 것. 늦어도 화내지 않는 것. 공격적으로 나와도 자리를 지키는 것. 이것들이 말 이전에 이미 하는 해석이다.
적절한 한계를 설정하는 일은 언어적으로는 이해시킬 수 없는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 행동을 통한 해석이다. 샤르프는 이것을 관찰했다(데이비드 샤르프, 2002: 63).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몸으로만 전달된다. 내가 어떻게 있는가가 그것을 전달한다.
실제로 그런 내담자가 있었다.
사십대 초반 여성이었다. 첫 만남부터 많은 것을 요구했다. 회기 시간 외에 전화를 했다. 일주일에 두 번 만나는데도 부족하다고 했다. 처음에 말로 설명하려 했다. 상담의 구조에 대해. 경계의 중요성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계속 전화를 했다.
그래서 말을 멈추고 행동으로만 했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회기 시간에 정확하게 끝냈다. 늘려달라는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화를 냈다.
"선생님은 저한테 관심이 없는 거 아닌가요?"
나는 그 화를 받았다. 그리고 그 화가 무엇인지를 함께 봤다. 그제야 이야기가 시작됐다. 어머니가 자신에게 관심이 없었다는 것. 아무리 달라고 해도 주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늘 더 달라고 했다는 것.
내가 경계를 지킨 것이 그 이야기를 꺼내는 조건이 됐다. 말로 설명해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한계가 오히려 공간을 만든다는 역설이다. 무한정 맞춰주면 분노가 나올 곳이 없다. 경계가 있어야 그 경계에 부딪히면서 감정이 나온다. 경계를 지키는 것은 거부가 아니다.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돌봄이다. 이것을 알기까지 오래 걸렸다. 처음에는 경계를 지키는 것이 냉정한 것 같았다. 내담자가 더 달라고 하는데 주지 않는 것이. 그런데 주면 줄수록 더 달라고 했다. 끝이 없었다. 끝이 없다는 것 자체가 이미 신호였다. 채워지지 않
는 것이 있다는 신호.
그녀가 화를 낸 뒤로 이야기가 달라졌다. 어머니 이야기가 나왔다. 어릴 때 엄마가 늘 바빠서 자신을 봐주지 않았다는 것. 할머니 집에 맡겨졌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는 것. 그래서 누군가에게 달라고 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는 것. 달라고 하면 안 주니까. 그래서 더 강하게 달라고 하게 됐다는 것.
상담 틀이 그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내가 말로 한 것이 아니다. 매번 같은 시간, 같은 자리, 같은 방식. 내담자가 이것을 경험하면서 일관성 있고 예측 가능한 대상을 처음으로 경험하는 경우가 있다. 그 경험이 안에서 무언가를 만든다. 말 이전에. 그 기반 위에서 말로 하는 해석이 착지한다.
— 내담자의 말로 말한다 —
나는 오래 내담자들이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내 말이 내담자의 말이 아니었다.
정확한 말이었다. 이론적으로 정교한 말이었다. 그런데 내담자에게서 온 말이 아니었다. 내가 배운 언어로 나온 말이었다. 그 말은 닿지 않는다.
어떤 내담자가 피드백을 줬다.
"선생님 말을 들으면 뭔가 맞는 것 같은데, 제 이야기 같지 않아요."
그 말이 충격이었다. 맞는 말인데 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것. 그것이 방법의 문제였다.
투명해지려면 내담자의 언어를 써야 한다. 내담자가 쓴 단어를 그대로 가져오는 것. 만든 이미지를 그대로 쓰는 것. 거기서 출발해서 새로운 방향으로 여는 것.
이것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방임적인 어머니를 두고 과식증에 시달리는 남성이 어느 날 말했다. 어머니가 해준 음식은 너무 차가웠다고. 뜨거운 것이 좋아서 계속 먹게 된다고. 치료자는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여러 가지 형태로 따뜻함을 찾고 계시네요."
그 해석 이후 과식이 줄었다. 새로운 관계를 시작했다. '따뜻함'이라는 말은 내담자가 먼저 쓴 말이었다. 온도의 따뜻함이 사람의 따뜻함으로 연결되면서 안에서 무언가가 열렸다(아카사카, 2025: 113-114). 내가 만든 말이 아니다. 내담자가 이미 쓴 말. 거기에 새로운 의미의 통로를 여는 것. 그 한 걸음이 해석이다.
나는 이것을 배운 뒤로 내담자가 쓰는 단어를 메모한다. 비유를 쓰면 그 비유를 기억한다. 어떤 내담자는 관계를 '줄다리기'라고 표현했다. 나는 그 뒤로 그 내담자와 이야기할 때 '줄다리기'라는 말을 썼다. 당기고 있는 건지, 놓고 싶은 건지, 상대가 놓을까 봐 무서운 건지. 그 내담자의 언어 안에서 움직이는 것.
다른 내담자는 자신의 상태를 '뚜껑이 닫혀 있다'고 표현했다. 나는 '뚜껑'이라는 말을 계속 썼다. 뚜껑이 지금 닫혀 있는지, 살짝 열려 있는지, 열면 뭐가 나올 것 같은지. 내담자가 만든 이미지 안에서 작업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내담자가 자기 이야기 안에 있다고 느낀다. 낯선 언어가 아니라 자기 언어로 자기를 보는 것이다.
케이스먼트가 실험적 동일시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내담자의 이야기 속으로 직접 들어가 다른 인물의 입장에 서보는 것이다(케이스먼트, 2003: 73). 내담자가 어머니와의 갈등을 말할 때, 내 안에서 어머니의 입장이 되어본다. 그 입장에서 어머니는 무엇을 느꼈을까. 무엇이 두려웠을까. 그것
을 경험하면서 내담자가 어머니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게 된다.
이론으로 분석한 말이 아니라. 내담자의 세계 안에서, 그 언어로, 이미 있는 곳에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간 말. 그것이 내담자의 이야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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