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경상남도 밀양
내 이름은 깜불이였다. 아버지는 화가 나면 늘 외치시곤 했다.
"불아, 깜불아!"
그 소리가 동네를 울릴 때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오늘도 집안의 모든 운명을 내가 맡았구나. 전생에 내가 나라를 팔아먹었나.
아버지는 동네에서 가장 큰 어른, 말 그대로 법과 같은 존재였다. 마을의 문제는 늘 우리 집 사랑방에서 해결됐고, 사람들은 아버지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나 역시 조용히 그 옆에서 고개를 숙였다.
반면 어머니는 한글조차 잘 읽지 못했지만, 남을 돕는 재능만큼은 천부적이었다. 거지든 손님이든, 집에는 항상 줄이 길게 서 있었고, 어머니는 누구에게나 아낌없이 베풀었다. 그때는 그 사실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문을 열어두는 사람이 이미 내 곁에 있었다는 것을, 훗날에야 알게 되었다.
그런 어머니가 딸을 여섯이나 줄줄이 낳았다. 우리 집 출산 소식은 동네 공개 행사나 다름없었다. 사방이 낮은 흙담으로만 나뉜 그 동네에서, 사람들은 담장 너머로 고개를 길게 빼고 "이번에도 아(아이)가 나올까?" 하며 다음 출산을 기다렸다.
더 기가 막힌 건 옆집이었다. 거긴 아들만 계속 낳는 집이었다. 우리는 딸딸딸… 꼭지, 깜불이, 상필이. "이쯤에서 딸은 그만"이라는 뜻이 다 담긴 이름들이었고, 옆집은 아들아들아들… 이식이, 삼술이, 말술이, 끝술이. "아들 좀 그만 낳아라"는 소원이 이름이 된 집이었다. 세상 참, 이렇게 불공평할 수가 있나 싶었다. 동네 전체가 은근한 출산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서 나는 네 번째로 태어난 딸, 깜불이였다.
“이번엔 니가 까만 불알 달린 동생 하나 델꼬 와야 한데이.”
다음엔 꼭 아들을 낳게 해달라는 아버지의 간절한 소원이, 그대로 내 이름이 되어 내려앉았다.
남장을 하고, 머리를 바짝 하이카라로 깎고, 남자처럼 행동해야 했던 어린 시절. 겉모습만 보면 누가 봐도 아들이었다. 적어도 동네에서는 헤어스타일이 성별보다 더 확실한 증거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길거리에 앉아서 오줌을 누는 모습을 보시고 아버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셨다.
"자는 와, 사내가 앉아서 오줌을 싸노…"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아, 아버지가 이제야 눈으로 확인하셨구나. 내가 아들이 아니라는 걸.
그 과정에서 쌓인 실망과 원망, 아들 없는 살림의 한숨과 체념은 고스란히 나에게 돌아왔다. 일찍 저세상으로 떠난 동생 몫의 원망까지 내 차지가 되었다.
미움을 받을수록 나는 더 빗나갔고, 어린 시절 내내 집안의 미움받는 자리를 도맡아 살았다.
이름 '깜불이'는 결과적으로 완전한 실패작이었다. 그 이름 덕분에 아들 대신 딸이 둘이나 내 밑으로 더 태어났으니까. 그렇게 기다리던 아들은 쌍둥이 딸들 다음에야, 늦둥이로 연달아 둘이 왔다.
나는 칭찬보다 눈치를 먼저 배웠다. 사랑받는 법보다 버림받지 않는 법을 먼저 배웠다. 누군가의 품에 안겨본 기억도 없었다.
하지만 그때는 다들 그렇게 크는 줄 알았다. 열 살까지 남장을 하고 자란 나에게 선택권이 있었을까. 내 밑에 난 딸 쌍둥이 한 명은 일찌감치 세상을 떠났지만, 우리 집 막내딸 상필이는 아직 살아서 가족 대소사를 똑 부러지게 챙기고 있다.
그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고향에 가면 사람들은 내 본명 대신 여전히 나를 깜불이라고 부른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깜불이는 이름이 아니라 내가 버텨온 자리였다. 웃기지만, 웃지 않으면 안 됐던 자리. 다행히도, 깜불이는 아직 잘 살아 있다. 이름값을 치르기까지 꽤 오래 걸렸을 뿐이다.
그 후로 나는 밀양을 떠나 서울로, 중동으로, 다시 런던으로 건너갔다. 아이 셋을 키우며 대학을 마쳤고, 런던 금융가에서 십 년 가까이 일했다. 남에게 곁을 잘 내주지 않는 사람으로 자랐다는 것을, 그때는 스스로도 몰랐다. 문 밖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던 아이가, 자라서도 여전히 문 안쪽에 누구를 들일지 망설이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는 것을.
그 문이 정반대로 열리기까지, 앞으로 몇 개의 상실이 더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