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25미터와 한 문장

헤엄칠 때마다 떠오른 것들

by맛있는 하루

물에 들어가기 전, 늘 같은 순서를 밟는다. 탈의실에서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샤워하고, 수경을 고쳐 쓰고, 레인 앞에 선다. 특별할 것 없는 아침이다. 오늘도 어제처럼 25미터가 기다리고 있다.


퇴행성 변형 허리디스크. 디스크가 아예 없다. 평영과 접영은 시작조차 못했고, 발목 인대 부상이 재발되면서 배영도 내려놓았다. 남은 건 자유형뿐이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조금 지루해지고 있었다.


ChatGPT Image 2026년 6월 23일 오후 06_56_50.pngAI 생성 이미지 활용


어느 날, 옆 레인에서 H언니를 봤다.


어릴 적 독일에서 자란 언니에게 수영은 기록이 아니다. 뺑뺑이도 아니다. 언니는 물속으로 들어가 바닥을 손으로 짚고 올라왔다. 다시 잠수하고 올라오고를 반복했다. 인어 같았다. 나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닥을 찍고 올라오는 거면 운동이 될까? 어렵지 않아 보이는데?'


물속으로 들어갔다. 케케켁. 물을 잔뜩 들이켰다. 다시 시도했다. 커커컥. 코에 물이 들어갔다.


허리디스크 생각에 겁이났다. 평영도 접영도 배우지 않은 몸으로 레인 바닥을 찍는 요령 같은 건 없었다. 괜히 도전했다가 허리만 삐긋할 것 같았다. 두려움에 바닥찍기를 포기했다.


그런데 왜 자꾸 생각이 날까.


유튜브에서 검색을 했다. '수영장 바닥 찍기', '잠영'으로 검색하니 쇼츠가 쏟아졌다. 머리와 가슴으로 물을 눌러 가라앉는다고? 여러 번 돌려봤다. 잠들기 전에도 몸은 여전히 수영장을 헤매고 있었다.


수영장 물로 수분을 보충한 지 보름이 지났다.




오늘 물맛은 어떨른지. 코만 맵지 않으면 좋겠다 싶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바닥을 향해 점프했다.


어라? 바닥에 손이 닿았다. 심지어 수영장 바닥에 양반다리로 앉는 것까지 됐다.


어제와 똑같은 수영장인데, 세계가 달라 보였다. 어디선가 환한 빛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자유형만 가능하다, 가 아니었다. 물과 즐겁게 놀 수 있는 거리가 또 하나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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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을 짚고 물 위로 올라오는 순간, 바카라 속 문장이 떠올랐다.


"인간이라면 언젠가 몇 번은 치게 마련인 인생의 바닥. 그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과정의 아름다움을 알려주기 때문이라고."
_ p.26, 전수진, 『발끝으로 인생의 중심을 잡는 법』


원문은 발레에 관한 문장이다. 물속에서 발레 대신 수영을 넣어봤다. 그대로 내 문장이 됐다.


"수영이 왜 좋아?"


바카라 속 문장을 빌려 답하고 싶다.


"인간이라면 언젠가 치게 마련인 인생의 바닥, 그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과정의 아름다움을 알려주기 때문이라고. 수영장 바닥이든, 인생의 바닥이든."


수영하다 바카라 속 문장이 자꾸만 떠오르고, 바카라을 읽다 수영 생각이 난다.


어떤 날은 레인을 오가는 내내 어제 읽던 문장이 머릿속을 맴돌고, 어떤 날은 사물함 키를 반납하며 가방에서 바카라을 꺼낸다. 수영에서 확인하고 싶은 것을 바카라에서 찾고, 바카라에서 읽은 것을 수영하며 되새긴다.


수영은 몸으로 하는 독서인지도 모른다. 독서는 앉아서 하는 수영이고.


거창한 이야기는 아니다. 25미터를 오가며 떠오른 것들, 물속에서 건진 문장들, 그 여운을 여기에 기록한다. 조용히 헤엄치듯, 천천히 읽어주시길.


수영은 몸으로 하는 독서이고, 독서는 가만히 앉아서 하는 수영인지도 모른다.



[수영 잡학 한 스푼]

잠영(潛泳)은 수면 아래를 헤엄치는 것을 말한다. 별도의 영법이 아니라 어떤 영법으로든 수면 아래를 이동하면 잠영이다. 표면 저항이 적어 추진력의 효율이 크지만, 종목에 따라 잠영 거리가 제한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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