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자신과 다른 방식으로 느끼며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자신과 닮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는 대립하여 살고 있는 사람에게 기쁨의 다리를 건네는 것이 사랑이다. 차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차이를 사랑하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입니다. 이 문장은 끝내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도 지속되는 사랑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질문을 가장 집요하게 보여주는 인물이 있습니다. 니콜 크라우스의 소설, <위대한 집>의 두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주인공의 아내는 주인공을 만나기 전, 사귄 남자와 사이에서 아이를 낳습니다. 그녀는 아이를 입양 보냅니다. 그 아이는 훗날 스물세 살에 죽었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죽음 이후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녀는 지금의 남편을 만나 별다른 어려움 없이 살다가 나중에는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과거의 기억을 상실한 채 죽습니다.
물론 내면에 갈등과 고민, 고통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소설의 포인트는 그 부분이 아닙니다.
작가는 아내를 지켜보는 남편의 시선을 따라갑니다. 남편은 아내가 죽자, 아내의 흔적을 찾아 나섭니다. 그녀에게 자기 외에 다른 남자가 있었다는 것, 그 남자와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는 어디론가 입양되었다는 것을 알고 그 흔적을 찾았던 것입니다. 죽음 이후에도 그는 아내를 잊지 못했습니다.
그는 아내를 사랑했습니다. 때로 아내가 다른 남자와 이야기만 나누어도 질투를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아내는 깊은 상처가 있었는지 그에게 좀처럼 마음의 문을 열지 않습니다. 같이 살지만 함께 생을 나누지는 못했던 셈입니다. 그런 순간이 있지 않나요? 몸은 한 공간에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을 바라보며 다른 생각을 하며 살 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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