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이 한 발짝 앞으로 전진해 내디딜 수 있는 힘은
아마도
내가 겪은 가장 잔혹한 고통을 딛고 일어섰을 때 일 것이다.
아직은 숨 쉴 만하고,
구겨 넣을 마음의 구석이 조금 남아 있고,
오늘은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며
힘들긴 해도 몇 시간 뒤척이다
쪽잠이라도 잠시 잠깐 들 수 있을 때.
그때는 아직 아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 고통의 불길 속으로
계속 매몰되고 침식되어 가면서도
아직은 그 불길이 참을 만한 상태인 것이다.
살이 다 녹고
뼈까지 녹아내릴 것 같고
내 존재 자체가 소멸될 것 같은
극한의 고통이
나를 집어삼키려는 순간이 되어야
비로소 내 눈이 번쩍 떠지고
몸이 꼼지락거리기 시작하더라.
그제야 나는
불길 속에 처박혀 있던 손을
조금씩 끄집어낸다.
물을 찾고,
약을 찾고,
사람을 찾고,
문을 찾는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너무 늦은 시작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때의 나는
살기 위해 처음으로
내 편이 된 것이었다.
그전까지는
아픈 나를 그냥 내버려 두었다.
괜찮다고 했다.
이 정도는 견딜 수 있다고 했다.
다들 그렇게 산다고 했다.
조금만 더 참으면 지나갈 거라고,
조금만 더 버티면 괜찮아질 거라고.
그렇게 나는
내가 아픈 줄 알면서도
나를 계속 그 자리에 두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몸과 마음이 더 이상 협조하지 않는다.
안 된다고 한다.
여기까지라고 한다.
더는 참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내 안에서 들려오는
아주 작고 단호한 목소리를 듣는다.
불허한다.
더 이상
나를 이렇게 두는 것을 불허한다.
더 이상
아픈 것을 괜찮다고 말하는 것을 불허한다.
더 이상
내가 나를 포기하는 것을 불허한다.
그래서 아주 소극적인 행동부터 시작한다.
창문을 열고,
물을 마시고,
약속 하나를 취소하고,
잠을 자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병원에 가고,
한 끼를 챙겨 먹는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그 행동들이
사실은 내가 나를 살려내는
첫 번째 몸짓이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사람은 그렇게
아주 작은 것부터 살아나기 시작한다.
오늘은 조금 덜 아프고,
내일은 조금 더 움직일 수 있고,
어느 날에는
오랜만에 웃음이 나온다.
잊고 있던 것들이 하나씩 돌아온다.
의지가 돌아오고
동기가 돌아오고
사람을 믿는 마음이 돌아오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다시 믿어볼 수 있는 마음이 돌아온다.
치유는 그렇게
거창하게 시작되지 않는다.
대단한 결심도 아니고
갑자기 강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저
오늘의 나를
내일의 나에게 넘겨주는 것.
무너지지 않게
한 번 더 붙잡아 주는 것.
그리고 그렇게 살아낸 날들이 쌓이고 나면
어느 순간 알게 된다.
나는 예전의 나와
조금 달라져 있다는 것을.
고통이 나를 망가뜨리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안에서
내가 얼마나 약한 사람인지 알게 되었고,
동시에
얼마나 오래 견딜 수 있는 사람인지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나를 구해낼 사람을
평생 밖에서만 기다릴 수는 없다는 것을 배웠다.
결국 마지막 순간에
내 손을 잡아 끌어낸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지나온 고통을
쉽게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는다.
고통은 아름답지 않다.
잔인하고,
비열하고,
때로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람을 무너뜨린다.
다만 그 고통을 지나온 뒤에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
내 안에
아직 죽지 않은 것이 있었다는 것.
아무리 짓밟혀도
끝내 꿈틀거리던 작은 생명 하나.
그리고 그것이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는 것.
아마 영혼의 성장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더 단단해지는 것이 아니라
무너져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자기 안의 작은 움직임을
다시 믿는 것.
다시는 그 불길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는 것.
그리고 혹시 또다시
내가 나를 포기하려는 순간이 온다면
이번에는 조금 더 일찍
내 손을 잡아주는 것.
조금 덜 아파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아직 살 만하다고
더 참아야 한다고
나를 그곳에 두지 않는 것.
그러므로 이제는
극한까지 가야만
나를 꺼내오는 일은 하지 않으려 한다.
고통이 나를 집어삼키기 전에
나는 나를 건져 올릴 것이다.
더 이상
내가 나를 버려두는 것을
불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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