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바와 마이클 잭슨, 그들은 왜 춤을 추는가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by테두리e


<그리스인 조르바> 속 알렉시스 조르바는 춤을 춘다.


세 살배기 아들이 죽었을 때, 고통과 슬픔을 말로 표현할 수 없어 춤을 춘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사람과 말문이 막힐 때마다 벌떡 일어나 춤을 춘다. 하고 싶은 말을 춤으로 표현한다. 입으로 할 수 없는 말을 발로, 손으로, 배때기로, 괴성으로 표현한다.

오랜 시간 공들인 공사가 한순간에 산산조각이 난 순간에도 울지도 따지지도 않고, 해변에서 춤을 춘다.

그의 제이베키코 춤(마케도니아 전사들이 출전하기 전에 추는 춤)을 살펴보면 한 발을 뻗어 땅을 살짝 건드리더니 그다음 발을 뻗어 다음 스텝을 밟다가 육중한 두 발이 모두 공중으로 날개처럼 뛰어오른다.

온몸의 에너지를 집중해서 써야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는 왜 춤을 추었을까?

기쁨이 타오를 때도, 말로 담을 수 없는 슬픔이 닥쳐올 때에도 그는 춤을 추었다.


그들은 몸뚱이를 내다 버린 거요. 그래서 어리벙벙해진 거요. 주둥이로 지껄이는 짓밖에 할 줄 모른다니까. 하지만 정말 하고 싶은 말을 주둥이로 할 수 있습디까? 민음사 p141


춤은 그에게 기교가 아니라 세상과 말하는 방식, 곧 '조르바의 언어'였다. 그는 슬픔을 피하려고 춤을 추지 않았다. 슬픔이 몸을 통과해 지나가도록, 그래서 삶으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 추었다.





사실, 우리에게 춤은 대체로 이렇게 오지 않는다. 나에게 춤이란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부터 왔다. 고등학교 2학년, 나는 텔레비전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화면 속에서 갑자기 선명한 빛이 새어 나오며 나를 감싸는 듯했고 강렬한 바람이 불어와 안방의 커튼을 펄럭거리며 휘감았다.


미국 모타운 TV 방송 콘서트에서 무대 위 한 남자는 엄마의 옷장에서 발견한 '반짝이는 스팽글 재킷'에 검정 페도라, 검정 로퍼 위로 반짝이는 은색 스팽글 양말을 신고 스팽글 장갑을 한쪽만 낀 독특한 분위기로 포즈를 취했다.

그는 발 끝으로 서서 몸을 돌리다가 갑자기 키 높이 마이크에서 조금 떨어지더니, 발은 뒤로 미끄러지는데 몸은 앞으로 걷는 듯한 모습의 발동작을 하는 것이다. 마치 달의 중력으로 달의 표면을 둥둥 떠다니는 우주비행사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달 위를 걷는 듯한 마이클 잭슨의 '문워크'를 본 순간이었다.



관객석을 향해 검은 페도라를 던지는 춤의 마지막 장면까지 완벽했다. 중력을 거스르는 그의 춤은 리듬을 갖고 노는 몸동작과 황홀한 춤선, 천재적인 쇼맨십으로 전 세계 사람들의 숨을 단숨에 멎게 했다. 사실 '문워크'는 이전 다른 댄서들도 추었던 춤이지만, 마이클 잭슨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다듬었고 , 때마침 'MTV'가 전 세계의 시선을 한 곳에 모으던 시대와 맞물렸다. 번역이 필요 없는 몸의 언어였기에 자유자재로 국경을 넘을 수 있었다.


나에게 끌렸던 마잭의 마법은 그뿐이 아니다. 춤뿐만이 아니라 노래도 그의 언어였다. 그의 노래는 자신과 세상을 향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man in the mirror]에서는 세상을 좋게 만들고 싶다면 자신을 돌아보고 변화를 만들어보라고 외치고,

[Billie Jean]에서 거짓이 진실이 되어버릴 수도 있음을 경고하고,

[Heal the world]에서 세상을 치유하고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자고 노래하며,

[Will you be there]의 무대 속 마이클은 음악의 흐름에 몸을 던져 표현하고 , 그 순간만큼은 그의 외로움, 슬픔, 현실의 무게를 지우고 환희를 느끼고, 그래서 오직 춤만이 남았을 때 온전한 자신을 느끼는 것 같은, 나에게 그의 무대는 곧 '신성함'자체였으며,

[You are not alone] 속 열창하는 그는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사랑을 담은 위로를 건넨다.

춤을 추다 보면 무언가 신성한 것에 닿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 순간이면 내 영혼이 비상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과 하나가 됨을 느꼈습니다. -마이클 잭슨-


마이클잭슨의 노래에는 사랑과 외로움 같은 개인적 감정뿐만이 아니라 인류애, 환경, 어린이, 평등 등 세상을 향한 메시지가 담겨있다. 그는 천재이자 전설이자 나의 영원한 히어로이다. 특히 법정 논란으로 세간의 이목을 받고 고통스러워하던 시기에도 절대 음악과 춤과 무대를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두려웠을 수도 있었겠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지 않고 끝까지 자신만의 언어로 세상을, 자신을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사생활에서는 자유롭지 못한 그였지만, 무대 위에서 그는 자신만의 언어와 history로 마음껏 자유를 누렸을 것만 같다.





여기서 바카라 속 '화자'를 살펴보자. 그가 가진 언어는 글과 바카라, 곧 먹물의 세계이다. 그는 조르바와 기질적으로 다른 인물이며 조르바의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다.

소설 마지막에 전재산을 쏟아부은 목재 운반 케이블이 산산조각이 나서 사업이 실패한다.


보통이라면 절망할 만한 순간이다.

그런데 조르바는 웃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화자는 마침내 조르바에게 말한다.


“조르바, 내게 춤을 가르쳐주시오!”


이 장면은 『그리스인 조르바』 전체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삶은 계획대로 되지 않으며 열심히 계산하고 준비해도 실패할 수 있다. 우리가 애써 쌓아 올린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


조르바의 대답은 '춤'이다. 화자는 처음으로 삶을 분석하는 대신 몸을 움직이며 조르바와 함께 춤을 춘다.

삶은 실패할 수도 있고 사랑은 상처를 줄 수도 있고 인간은 결국 죽지만 그럼에도 살아간다. 때로는 춤을 춘다.




하지만 조르바가 특별한 이유는 그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 역시 두려워하고, 욕망하고, 실수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때로는 후회한다. 그럼에도 삶에서 도망치지 않는다. 두렵지만 나아가고, 상처를 입지만 다시 사랑을 한다



화자는 반대편에 서 있다. 그는 삶을 이해하고 싶어 한다. 의미를 찾고 싶어 한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분석한다. 그런데 삶은 생각만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화자는 조르바와 헤어져 바카라을 더 읽는 삶을 택한다. 결국 화자는 자신이 제일 잘하는 길을 선택한다.


이 지점에서 [그리스인 조르바]가 말하는 진정한 자유는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하지만 조르바처럼 될 필요가 있을까? 글 속 화자처럼 글과 문장과 글쓰기가 '내가 가장 사랑하고 잘할 수 있는 영역'이라면 그렇게 살아가도 되는 것이 아닐까? 굳이 조르바처럼 살아야 할까?


[그리스인 조르바]는 내게 어려운 바카라이었다. 모두들 조르바의 자유를 이야기하고 '조친자'를 낳았으며, '조르바당'까지 만든다고 하지만 내게 조르바는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오히려 글 속 화자의 붓다에 대한 사유, 조르바를 편견 없이 대하는 태도, 조르바를 통해 변화해 가는 모습에 더 매료되었다. 먹물까지는 아니지만, 조르바처럼 과연 살 수 있을까? 조르바에게서 느껴지는 거부감은 뭘까?

조르바의 자유는 과연 무엇일까?

의문이 생기는 가운데 '화자'처럼 조르바를 살펴보니 '조르바의 자유'가 보였다.

삶의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나아가는 행위,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만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 현재'를 즐기는 몰입, 상실과 슬픔을 겪지만 '춤'이라는 자신만의 언어로 치유하는 삶, 그러한 것들이 알고리즘으로 다시 마주한 마이클 잭슨과 겹쳐져 보였다.


'자유'를 얻는 길, 사실 아직 잘은 모르겠다.

바카라임이 뒤따르는 것이 자유인 것만 같고, 그래서 자유란 건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것이 못된다고 생각했으며 자신을 초월해서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 또한 성인의 경지가 아닌가 생각했었다. 하지만 마이클 잭슨의 여러 무대를 보며 어렴풋이 '자유'의 냄새를 맡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영역,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영역에서 자기 언어를 찾는 것, 그것이 자유로 가는 길이 아닐까. 조르바가 툭 떨어뜨리고 간 '자유'라는 녀석은 도달점이 아니라 자신만의 언어를 계속 가꾸고 사용하며 두려움을 통과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