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퇴사 후 산티아고로 떠난 숨고르기 청년의 순례길 #1
"순례길 한번 안 가볼래요?"
보스와 퇴사면담을 하다가 뜬금없이 순례길 이야기가 등장했다.
순례길에 관한 이야기는 종종 들었지만, 한 번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전 세계 여러 나라를 둘러보는 것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한 군데 오래 있기보다는 짧은 시간 내에 최대한 많은 도시와 나라들을 다니는 것을 지향하는 사람이었다. 순례길은 적어도 내 인생의 한 달을 투자해야 하는 여정인데, 한 달이면 남미 한 바퀴를 돌만한 시간이 아닌가.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 제안이 그리 나쁘게 들리지만은 않았다.
혹자는 이런 말을 했더랬다.
순례길은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곳이지만,
순례길이 부른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곳이라고.
그 말처럼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순례길이 나를 찾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퇴사하고 2주일 만에 계획도 없이 파리로 떠났다. 파리는 군대 전역 후 10년 만에 다시 방문하는 것이었다. 10년 간 나에게는 이런저런 일이 많았는데, 10년 전 내가 찾았던 파리의 골목골목은 크게 바뀐 것 없이 그대로인 것처럼 보였다. 그때 파리에서 나는 앞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될지, 내 인생에는 어떤 일이 펼쳐질지 전혀 알 수 없는 설렘과 불안이 가득했었다. 10년이 지나고 나면 뿌연 안개가 조금은 걷히지 않을까 했지만 색이 바랠 뿐 지금도 안개가 걷히진 않았다.
해가 지고 어두운 저녁 순례길 시작 마을로 향하는 야간열차를 타러 오스텔리츠역으로 향했다. 그때보다 달리 성장한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 해가 지고도 밖을 돌아다니는 걸 보면 아주 성장이 멈췄던 것은 아닌 듯했다. 유럽은 위험하니 밤늦게는 돌아다니지 말라고들 하지만, 다 사람 사는 곳 아닌가. 살다 보면 여기 사람들도 밤에 나가야 할 일이 언제든 있을 텐데 하는 생각에 밤늦은 야간열차를 끊었다.
밤늦은 시간에 대합실에 앉아 기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다 보니 이런저런 사람이 보인다. 개중에는 노숙자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10년 전에는 조금이라도 낌새가 보이는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면 앞으로 맨 가방을 움켜쥐고는 했었는데, 이번엔 딱히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곳에서 노숙자를 신경 쓰고 있는 건 나 한 명뿐이기도 했고, 별로 미련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퇴사 이후 가라앉은 기분에 뭔가를 적극적으로 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지 않았다. 그것이 설사 자신을 지키는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다행히 열차가 도착하기까지 한 시간 동안 대합실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각자 시간에 맞춰 열차를 타러 나갈 뿐이었다. 이 늦은 밤 생장으로 떠나는 열차만 있을 줄 알았더니 다들 어디를 그렇게 바쁘게들 떠나는지 하나둘 자리를 비우고 나니 북적북적했던 대합실도 조금은 한산해졌다. 슬슬 내가 열차 시간을 잘못 안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할 때 즈음, 그제야 내 차례가 왔다.
대합실 밖 공사장을 가로질러 나가니 대합실에 들어올 때는 보이지 않았던 승강장이 보였다. 티켓에 적힌 열차 칸을 찾아가니 화장실 바로 옆이었다. 사람들이 자주 지나다니는 곳이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막상 하룻밤을 지내고 보니 기차소리에 별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파리에서 바욘으로 떠나는 야간열차는 순례길의 첫걸음이다. 아니, 나만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스페인 이외 지역에서 까미노('길'을 일컫는 스페인어로 순례자들 사이에서는 순례길 자체를 가리키는 대명사처럼 쓰인다.)를 시작하는 순례객들 가운데 상당수는 생장으로 가기 위해 파리와 바욘을 거쳐 간다. 생장은 파리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밤새 이동해야 할 만큼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워낙 시골에 위치한 탓에 많이들 선택하는 루트다. 그래서 야간열차에는 대부분 순례객이 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건 나의 착각이었다.
기분 좋은 순례길의 시작을 장식해 보기 위해 떨리는 마음으로 침대칸 문을 열었다. 이미 나를 뺀 나머지 침대에는 모두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하이, 하며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내가 용기를 낸 것이 무색하게 아무도 나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 순례객들은 따뜻하게 환대하는 문화가 있다던데 아직 다들 순례길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탓일까, 생각하며 민망한 얼굴을 감추며 조용히 내 자리에 누웠다. 다시 용기를 내어 다들 어떻게 순례길을 오게 되었는지 물어보려다 말았다.
밤이 지나 동이 터오니 바욘에 도착했다. 바욘에서 내리면서 보니 그 칸에서 바욘에서 내린 사람은 나 한 사람뿐이었다. 바욘역 승강장을 둘러보니 나와 같이 내린 사람들도 스무 명이 채 되지 않을 만큼 많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바욘도 꽤나 알려진 곳이라 순례길을 가지 않는 관광객들도 많은 곳이라고 했다. 그러니 사실 그날 바욘에서 내린 사람들 중 생장으로 향한 순례객은 나 혼자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퇴사 후 그동안 잔뜩 움츠렸던 몸이 긴장을 푼 탓인지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감기 기운이 올라왔었다. 그리고 바욘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코가 부어 꽉 막혔다. 감기인지, 비염인지 모를 증상에 이대로는 바로 일정을 시작하기 어려울 것 같아 바욘에서 하루를 묵고 생장으로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생장에서 어떻게 순례길을 떠나는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도 알아보지 않고 무작정 바욘으로 도착한 터라 사전정보를 조금이나마 얻고 가자는 마음도 있었다. 급하게 숙소를 구해 발걸음을 옮겼다.
짐을 풀고 나니 코는 막히긴 했지만 다행히 시내를 돌아다닐 기운은 남아있어 바욘 시내를 주욱 둘러보다가 성당 앞 벤치 앞에 앉았다. 이 길 위에서 내가 얻어야 할 것을 얻고 버려야 할 것을 버릴 수 있도록, 그리고 내가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모두 누릴 수 있기를 위해 앞으로의 순례길의 평안을 빌며 하루 일정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