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 겹치면 인연이 된다

대기업 퇴사 후 산티아고로 떠난 숨고르기 청년의 순례길 #2

by설읽은

바욘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어제 시내에서 사놓은 빵을 먹고 바욘역으로 향했다.


여유 있게 나온 탓인지 출발 시간까지는 조금 남았다. 대합실에 앉아 혹시 나와 함께 순례길을 걷게 될 사람들은 없을지 두리번 둘러보았다. 그러다 오빠와 여동생, 그리고 부모까지 4인 가족이 티켓을 구매하는 게 멀리서 보였다. 언뜻 보기에 한국인 같아 보였다. 뭔가 먼 타지에서 같은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반가웠다.


시간이 되어 열차에 올라타니 마침 그 가족은 내 바로 뒤에 자리를 잡았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역시 한국인이 맞았다. 작은 열차 칸 안에 몇 명 있지도 않았고, 더구나 바로 앞자리에 앉았으니 내심 먼저 말을 걸어와주길 바랐다. 아무래도 혼자 가는 사람이 가족에게 말을 거는 것보다는 그 편이 더 쉬울 테니까.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가족은 끝내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어느덧 열차는 빠르게 생장에 도착했다.


순례길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어디로 가야 할지도 잘 몰랐다. 일단 뭔가 사람들이 가는 듯한 방향으로 걸음을 향했다. 구글맵으로 대충 생장을 둘러다 보니 순례자 오피스라는 건물이 보였다.


'여기가 순례자 여권을 받는 바로 거긴가?'


블로그를 대강 훑어보았을 때 순례자 여권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언뜻 보았던 것 같았다. 일단 오피스라고 하니 무언가 순례길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그곳으로 향했다. 순례자 오피스로 향해서 가는데 어느 순간 내 뒤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도 스무 명은 내렸던 것 같은데...'


계속 이 길이 맞는지 의심하다 보니 어느새 순례자 오피스에 도착했다. 마침 오피스는 점심시간이었고, 몇 분 기다리면 열리는 시간이어서 문 앞에 서서 기다렸다. 두시가 되자마자 안에서 문이 열렸다. 백발의 할아버지가 인자한 미소와 함께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나를 반겨주었다.


할아버지는 영어를 잘 구사하시지는 못했지만, 친절하게 순례길에 대해 설명해 주시려고 노력하셨다. 아직 4월이 되지 않아 피레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길로 갈 수 없으니 발카로스로 우회해서 가라는 안내와 함께 지도와 알베르게 정보가 담긴 팸플릿을 건네주셨다. 재미있었던 것은 안내를 마치고 계속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 나면 새로운 안내사항이 떠오르셨는지 다시 앉아보라면서 다른 정보를 늘어놓으셨다. 그런 할아버지의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내가 듣는 이 정보가 맞는지 못 미더운 마음도 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순례자 사무실에서 나를 도와주신 이 할아버지는 짧은 기간 동안 이곳에서 일하시는 자원봉사자였다. 짧은 기간 동안 빠르게 일을 배우고 순례객들을 맞이하다 보니 서툰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후 순례길에서는 종종 이렇게 짧은 기간 동안 순례자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단체로 온 봉사자들도 있었고, 혼자서 도우러 온 봉사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밝은 미소를 건네주었다. 순례길이 아무리 상업화되고 관광지처럼 바뀌어가고 있다지만 그 빛깔만큼은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그 사람들 덕이 아닐까 지금에서야 생각이 든다.


순례자 여권을 받은 뒤 나는 생장에서 대부분의 순례객들이 간다는 55번 알베르게로 들어갔다. 55번 알베르게는 마을에 집이 몰려있는 긴 골목 끝에 위치해 있다. 길이 거의 끝나가는데 혹시 길을 잘못 든 것은 아닐까 걱정이 들 때 알베르게 입구에서 여유를 즐기던 주인아주머니가 여기로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55번 알베르게는 앞으로도 자주 묵게 될 시립 알베르게(영어로는 Municipal Albergue이며, 한국인 사이에서는 공립 알베르게도 더 잘 알려져 있다.)로 그래서인지 이곳의 많은 알베르게 중에서 한국인들이 많이 거쳐가는 곳이다. 체크인 시간이 되기 전 사람들이 길게 숙소 앞에 가방으로 줄을 세운다는 등의 블로그 후기를 많이 보았었는데, 그런 줄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 소문이 무색하게 알베르게 안으로 들어가니 다른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저 안쪽 방에 한 명이 짐을 풀고 있는 게 보였다.


알베르게 주인아주머니는 반갑게 나를 맞이하면서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물어왔다. 한국에서 왔다고 답을 하자 활짝 웃으면서 지금 저 안쪽에 방금 체크인한 순례객도 한국에서 왔다면서 이따가 인사하라고 알려주었다. 다시 방 안을 멀리서 들여다보니 정말 한국사람으로 보이는 여자가 보였다. 그 여자도 주인아주머니의 소리를 들었는지 밖을 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고, 우리는 서로 애매한 인사를 나누었다. 이게 나의 첫 번째 순례길 동행 S와의 첫 만남이었다.


순례길에는 한국인이 엄청 많다던 블로그 후기와는 다르게 그날 55번 알베르게에 묵는 한국인은 나와 S 뿐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는 감기로 하루 일정을 늦추었고, S는 생각보다 컨디션이 좋아 바욘 일정을 취소하고 하루를 앞당겨 도착했다고 했다. 여기에 내일 첫 순례길 위에서 만나게 될 또 다른 한국인 동행 K는 파리에서 수하물을 잃어버려 며칠을 늦추게 되었다고 했었는데 이렇게 세 사람은 각자의 우연으로 같은 날 출발하게 되었고, 나의 첫 번째 동행 그룹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첫날부터 산티아고까지 계속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며 같이 걸었다.



순례길을 걷다 보면 수많은 인연들을 스쳐 지나간다. 구태여 만남을 이어가려 하지 않아도 걸음을 함께 하게 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함께 걸음을 하려고 애를 써도 결국에는 헤어지게 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길의 끝에 서기 전까지는 우리의 인연이 어디까지 닿을지는 알 수가 없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그 시작조차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마치 S와 내가 의도치 않게 그날 그곳에서 마주치게 된 것처럼 말이다. 앞으로 나는 얼마나 더 많은 사람과 우연히 길 위에서 함께 걷게 될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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