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퇴사 후 산티아고로 떠난 숨고르기 청년의 순례길 프롤로그
꿈에 그리던 대기업에 입사한 후 기업문화라는 이름으로 몇 달간 시달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앞서가는 기업이고, 매일 보람찬 일로 가득 찰 것 같은 곳이었지만 정작 그 안은 그렇지 않았다. 기업을 홍보하면서 자랑스럽게 강조하던 그곳의 수평적 문화는 무례한 언행을 정당화하는 방패였다. 거기다 그렇게 솔직하게 쏟아내는 인격모독이 그곳에서는 훈장이 되기도 했다.
아직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던 나는 늘 당하는 쪽이었다. 수면제를 먹지 않고는 잠에 들지 못하는 며칠 밤을 보내고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퇴사를 결정했다. 아니, 통보했다.
퇴사를 통보하기로 마음먹은 날 나는 사무실에 출근해 한참을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는 100m 달리기라도 한 듯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가라앉힐 수 없는 마음에 괜히 휴게실에도 가봤다가 자리로 돌아오며 앉았다 일어났다 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것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어쩌면 관심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미련이 남지 않았다.
그 몇 달간 나는 스키 한두 번 밖에 타보지 않고는 고급 슬로프에 내던져진 초급자 같았다. 누군가 도와주기라도 했으면 좋았으련만 도와주기는커녕 옆에서 더 속도를 올려야 한다고, 소리 지르는 사람만 있었다. 그래도 잘해보겠다고 소리 지르는 사람들 말을 하나씩 들어주다 보니 그때는 이미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속도까지 이르렀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이 고급 슬로프 위에 있는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한 가지뿐이라는 것을.
나는 더 큰 사고가 나기 전에 그대로 몸을 옆으로 뉘었다. 어깨도 부딪히고 스키도 벗겨지고, 무릎도 까지겠지만 차라리 지금 멍드는 것이 온몸이 부서지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렇게 몸을 뉘이고 나니 그제야 소리를 지르던 몇 명이 고함을 멈추었다. 보스는 너무 어려운 과제들을 겪어내느라 고생했다며 다른 슬로프를 경험할 수 있게 해 주겠다며 다시 생각해 보라고 달콤한 제안들을 했지만, 이미 온몸이 멍든 상태에서는 어떤 일도 또 다른 악수를 두는 일 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걸 나는 알았다. 보스가 어떤 말을 하든지 이미 내 마음은 닫혀있었다.
완고하게 결심이 선 나를 알아챈 시점에서 보스는 더 이상 퇴사를 만류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보스가 새로운 제안을 했다.
"순례길 한번 안 가볼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