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결혼하라. 그러면 너는 후회할 것이다.
결혼하지 말라. 그러면 너는 역시 후회할 것이다.
결혼하든 하지 않든, 너는 둘 다 후회할 것이다.
세상의 어리석음을 비웃어라. 그러면 너는 그것을 후회할 것이다.
그것을 비웃지 말라. 그러면 너는 역시 후회할 것이다.
비웃든 비웃지 않든, 너는 둘 다 후회할 것이다.
한 여자를 믿어라. 그러면 너는 후회할 것이다.
믿지 말라. 그러면 너는 역시 후회할 것이다.
믿든 믿지 않든, 너는 둘 다 후회할 것이다.
목을 매어라. 그러면 너는 후회할 것이다.
목을 매지 말라. 그러면 너는 역시 후회할 것이다.
매든 매지 않든, 너는 둘 다 후회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인생의 본질이다.
쇠렌 키르케고르, 이것이냐 저것이냐 (Either/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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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일 선택 앞에서 망설이고, 선택 이후에 후회한다. 만약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만약 그 사람을 붙잡았더라면. 만약 다른 길로 갔더라면. 하지만 가지 않은 길이 더 나았을 거라는 믿음은, 현재를 긍정하지 못하는 사람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장예모의 영화 '인생'에서 푸구이는 국공내전과 문화대혁명이라는 역사의 질곡 속에서 가족을 하나씩 잃어간다. 그가 선택하지 않았다. 그저 휩쓸렸을 뿐이다.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한 것은 그의 선택이었지만, 아들이 과다출혈로 죽고 딸이 출산 중 사망하는 것은 그의 선택이 아니었다. 역사라는 거대한 힘 앞에서, 개인의 선택은 지독히 무력하다.
그럼에도 그는 살아간다. 선택보다 더 큰 무언가가 우리를 굴려가지만, 우리는 여전히 살아야 한다. 새옹지마는 바로 이 진실을 말한다.
1.
새옹지마(塞翁之馬). 변방의 노인과 말 이야기. 우리는 이 고사성어를 대개 이렇게 이해한다.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이 따라온다." 혹은 조금 더 성숙한 버전으로, "나쁜 일도 좋게 받아들이자." 하지만 이것은 오독이다.
새옹지마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의 구분 따위는 애초에 없다는 선언이며, 그 구별 자체의 무의미함을 말하는 태도에 가깝다. 말이 도망쳤다가 명마를 데리고 돌아오고, 아들이 그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고, 전쟁이 나서 다리 부러진 아들만 살아남는 이 이야기의 핵심은, 화와 복이 순환한다는 낙관이 아니라, 화복을 나누는 우리의 시도 자체가 얼마나 허망한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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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비효과'는 바로 이 진실을,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펼쳐 보인다.
'나비 효과'의 주인공 에반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그는 잘못된 선택을 바로잡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반복적으로 과거로 돌아간다. 최선의 선의로, 가장 합리적인 판단으로, 그는 과거를 수정한다. 하지만 매번, 예외 없이, 다른 방식의 재앙이 일어난다. 한 사람을 구하면 다른 사람이 죽고, 한 비극을 막으면 더 큰 비극이 벌어진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오만 가지 갖은 변수가 있고, 언제 어떻게 인생에 영향을 미칠지 눈곱만큼도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만든다는 것은 은유가 아니라 사실이다. 오늘 아침 3분 늦게 일어났다는 사실이, 10년 후 인생을 완전히 바꿀 수 있다. 오늘 하필 그 카페에 들어갔다는 사실도, 언제 어떻게 인생을 갈라놓을지 알 수 없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잘못된 선택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선택 때문에 불행해지도 않고, 어떤 선택 때문에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다. 선택은 바꿀 수 없고, 바꾼다 해도 소용없다. 아무리 최선의 선의로 과거를 수정한다 해도, 결과적으로 상상 초월의 비극을 맞이할 수 있다. 에반이 마지막에 내리는 결론은 이것이다. 개입하지 말 것. 선택하지 말 것.
이것이 새옹지마의 진실이다. 올바른 선택이란 없다. 다만 선택이 있을 뿐이고, 그 선택의 결과는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선택이 아니라, 선택 이후다. 어떤 선택을 했는가가 아니라, 그 선택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내는가.
2.
영화 '시라트' 또한 비슷한 주제를 역설한다.
세 대의 차가 끝없이 사막을 질주한다. 어둠을 뚫고 산을 오르고, 폭우를 맞고, 강을 건너고, 추락하고 낙오하고 연대하며 어딘가를 향한다. 바위에 부딪히면 범퍼를 뜯어내고, 강물에 막히면 다른 차로 끌어내고, 고랑에 빠지면 바퀴를 교체하며 계속해서 나아간다. 문제와 고통은 항상 발생하고, 그에 맞게 주먹구구 해결할 뿐이다. 큰 차도 있고 작은 차도 있다. 각자 태어난 대로, 생겨먹은 대로, 그렇게 적응하며 나아갈 뿐이다.
딸을 찾으려 여행을 떠났다가 새로운 동료들을 만나고, 새로운 동료들을 만나지만 아들을 잃는다. 절망에 빠지지만 또 동료를 잃는다. 더 깊은 절망에 빠지지만 또다시 동료를 잃는다. 성공한 타인과 똑같은 길을 똑같은 방식으로 걷지만 누군가는 또 목숨을 잃는다.
연속으로 불운을 겪었으니 좋은 일이 일어날 차례라는 생각은 전형적인 도박사의 오류다. 주사위는 기억이 없다. 삶이 당신에게만 우호적일 이유는 없다. 삶이라는 지뢰밭에서, 일어날 일은 일어날 뿐이고, 자연(自然)은 원래 무심하게 작동한다. 영화는 전화위복의 문법을 철저히 파괴한다.
이 불가해 앞에서 인물들은 묻는다.
"지금껏 어떻게 멀쩡했지?"
"나도 몰라."
그리고 삶은 묻는다.
"그래서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3.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일희일비하는가? 쇼펜하우어는 간명하게 답한다. "곤궁하거나 권태롭거나."
의지가 끊임없이 의욕하기 때문이다. 배고프면 먹고 싶고, 배부르면 더부룩하다. 외로우면 사랑하고 싶고, 피곤하면 혼자 있고 싶다. 왜 챗바퀴를 반복하는가? 그저 원래 그렇다. 이 의욕이 좌절되면 고통이다.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면 곤궁에 빠진다. 돈이 없으면 괴롭고, 사랑받지 못하면 외롭고, 인정받지 못하면 초라하다.
그러나 의욕이 충족되면 행복은 잠깐이다. 목표가 달성되면 이내 권태가 찾아온다. 부자가 되면 더 큰 부를 원하고, 사랑을 얻으면 지루함을 느끼고, 명예를 얻으면 공허해진다. 삶은 시계추처럼 곤궁과 권태 사이를 왔다 갔다 할 뿐이다.
행복은 지속적인 충족이 아니다. 행복은 고통으로부터의 일시적 구원일 뿐이다. 목이 마를 때 마시는 물이 맛있고, 배고플 때 먹는 음식이 맛있다. 목마르지 않으면 물은 그저 물이고, 배고프지 않으면 음식은 그저 음식이다. 행복이 있으려면 필연코 고통이 먼저 있어야 한다.
큰 걱정에서 벗어나면 작은 걱정이 의식에 들어온다. 암 진단을 받은 사람에게는 암이 문제지만, 건강한 사람에게는 입고 싶은 옷이 세탁소에 있다는 것이 문제다. 고통의 총량은 비어 있지도 가득 채워지지도 않는다. 고통의 형식만 바뀔 뿐,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를 문제 삼는다.
그러니 일희일비한다. 의욕이 충족되면 기뻐하고, 좌절되면 슬퍼한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고, 슬픔은 또 다른 슬픔으로 대체된다. 우리는 의지의 맹목적 움직임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에 매달리고, 그것이 흔들리면 괴로워한다. 말이 돌아온 것을 복이라 여기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잃을까 두려워한다. 아들의 다리가 부러진 것을 화라 여기는 순간, 우리는 고통에 빠진다.
의지는 그저 맹목적으로 작동할 뿐이다. 의지는 우리의 기대를 고려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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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이 문장은 우리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식의 틀을 통해 표상된 것만 본다는 뜻이다. 사과를 볼 때, 우리는 사과의 색을 보는 것이 아니다. 가시광선이 반사된 결과를 볼 뿐이다. 원래의 색은 무엇인가? 우리는 알 수 없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인식의 틀로만 세계를 파악한다.
그런데 표상 너머에, 세계의 본질이 있다. 쇼펜하우어는 그것을 의지(意志)라고 불렀다. 의지는 맹목적으로 작동한다. 이유도 없고, 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다. 그저 꿈틀거릴 뿐이다. 중력이 물체를 떨어뜨리듯, 의지는 세계를 움직인다. 인간이 배고프면 먹고, 외로우면 사랑하는 것도 의지의 맹목적 표현이다. 왜 배가 고픈가? 왜 외로운가? 알 수 없다. 그저 원래 그런 것이다.
하이데거가 말한 '피투성(被投性)'과 닮아 있다. 우리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세계에 던져진 존재다. 어느 시대에, 어느 나라에, 어떤 가정에 태어날지, 어떤 몸을 갖게 될지, 우리는 선택하지 못했다. 큰 차로 태어났든 작은 차로 태어났든, 우리는 이미 던져진 사막을 질주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의 세계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의지의 세계를 표상으로만 본다. 시간과 공간으로 나눈다. 나와 너를 구별한다. 과거와 미래를 구별한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을 구별한다. 하지만 의지의 세계에는 이런 구별이 없다. 말이 돌아온 것이 복인가 화인가? 의지의 관점에서는 둘 다 아니다. 그저 의지가 맹목적으로 표현되었을 뿐이다. 아들의 다리가 부러진 것이 화인가 복인가? 역시 둘 다 아니다. 그저 일어났을 뿐이다.
즉 화복의 구별은 우리의 표상일 뿐, 의지 자체에는 구별이 없다. 세계는 의지라는 맹목적 힘으로 작동하고, 우리는 그것을 시간과 공간으로 나누어 표상하면서, 화와 복을 구별한다. 하지만 그 구별은 환상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새옹지마를 "나쁜 일 뒤에 좋은 일이 온다"는 낙관으로 오독하는가? 우리는 의지의 맹목성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계가 이유 없이 작동한다는 것을, 삶이 아무 목적 없이 흘러간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싫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패턴을 만들고 의미를 부여한다. "지금은 힘들지만 나중엔 좋아질 거야."
그러나 이것은 위로가 아니라 착각이다.
삶은 내게 빚진 것이 없다.
4.
그렇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반야심경은 이렇게 말한다.
心無罣礙 無罣礙故 無有恐怖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다. 무엇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좋은 일에도, 나쁜 일에도, 의미에도, 무의미에도, 선택에도, 결과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새옹지마가 화복의 구별 불가능성을 말한다면, 심무가애는 그 구별에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얻는 자유를 말한다. 말이 돌아온 것을 복이라 여기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잃을까 두려워한다. 아들의 다리가 부러진 것을 화라 여기는 순간, 우리는 고통에 빠진다. 하지만 애초에 화복이라는 구별 자체가 허상이라면, 올바른 선택이라는 것 자체가 환상이라면, 집착할 대상 자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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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적수천석(滴水穿石).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진 물이 결국 바위에 구멍을 낸다. 이것은 신기한 일이 아니다. 아무리 오래 걸리더라도, 일어날 일은 일어날 뿐이다. 삶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불가해하더라도, 일어날 일은 일어날 뿐이다. 우연을 인과관계로 해석하고 패턴을 발견하려는 시도는 자주 실패한다.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공(空)하기 때문에 자유롭고, 자유롭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다.
이것은 체념이 아니다.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판단을 유보하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 있다. 받아들이기 때문에, 나아갈 수 있다. 집착이 없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다. 심무가애는 삶을 긍정하는 태도다. 좋고 나쁨을 따지지 않고, 일어난 일을 일어난 대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며 살아가는 것.
5.
인류의 삶을 적셔온 영원히 타당한 형식이 있다. "성격이 운명이다."
타고난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숙명론이 아니다. 선택 이후의 행동, 태도, 그 "성격"이 중요하다에 가깝다.
기준은 하나가 아니며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운 또한 유의미한 변수다. 하지만 어떻게 움직이는지가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 하나의 선택, 단 하나의 선택 이후, 당신이 어떻게 행동하는가.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 그것이 당신의 성격을 만든다. 그리고 성격은 불변한다. 매일매일 꼬박꼬박 밥 먹고 숨 쉬고 잠자는 그 모든 순간들이, 결국 당신의 성격을 만든다.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 것처럼, 하루하루가 쌓여 당신을 만든다. 단 한 방울의 물이 바위를 뚫는 것이 아니다. 수천 수만의 방울이 같은 자리에 떨어진 결과다. 삶도 마찬가지다. 고작 오늘 하루가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그 모든 순간들이 쌓여서, 나라는 사람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성격에 합당한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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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은 현재를 지옥으로 만든다. 내가 만약 그때 그 사람을 만났더라면, 내가 만약 그 길을 갔더라면. 이것은 현재를 부정하는 태도다. 가지 않은 길은 언제나 더 나아 보인다. 하지만 그 길로 갔어도 또 다른 길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피자를 먹을까 치킨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치킨을 선택했다. 최악은 무엇인가? 치킨을 먹으면서 피자를 생각하는 것이다. 치킨을 선택했다면 치킨이 맛있다고 우겨야 한다.
장예모 '인생'의 푸구이는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았다. 역사가 그를 휩쓸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그가 어떻게 살았는가는 여전히 중요하다. 가족을 하나씩 잃어가면서도, 그는 매일 아침 일어나 밥을 먹고 일을 했다. 그는 선택할 수 없는 것 앞에서 무력했지만, 선택할 수 있는 것 안에서는 성실했다. 성격이 운명이라는 말은, 역사 앞에서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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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필귀정(事必歸正). 일은 반드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제 격에 맞는 결말을 맞이한다. 그럴 만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정의가 승리한다는 낙관적 믿음이 아니다. 단단한 진실이다.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그에 합당한 귀결을 맞는다.
선택 자체보다 내가 어떤 사람인가가 더 중요하다. 그리고 내가 어떤 사람인가는, 내가 매일매일 어떻게 움직이는가로 결정된다. 하루하루 진심을 다하는 그 모든 순간들이, 결국 성격을 만든다. 그리고 그 성격에 합당한 삶을 산다.
6.
시라트(Sirat). 천국과 지옥을 잇는 다리.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차가 질주한다. 사막은 끝나지 않고, 시라트는 계속되며, 우리는 여전히 그 위에 있다. 시라트를 건너는 훌륭한 방법은 없다. 다만 건널 뿐이다. 각자, 혼자, 그저. 시라트는 삶의 다른 이름이다.
새옹지마는 낙관도 비관도 아니다. 그것은 판단의 유보이자, 해석의 겸손이며, 동시에 존재의 긍정이다. 말이 돌아온 것이 복인지 화인지 알 수 없고, 아들의 다리가 부러진 것이 화인지 복인지 알 수 없듯,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이 복인지 화인지 알 수 없다. 알 수 없으므로, 판단을 유보한다. 판단을 유보하므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인다. 받아들이므로, 나아간다. 집착이 없으므로, 두려움도 없다.
그저 살아야 하기에 산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다. 변화를 예상할 수 없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것도 예상할 수 없다. 살아갈 뿐이다.
꾸역꾸역 야금야금 차근차근 매일매일. 그냥 산다. 가장 단순한 삶이다. 꼬박꼬박 밥 먹고 숨 쉬고 잠자고 배 채우고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운동하고. 하루하루 고군분투. 되는 대로 사는데 이유 같은 건 없다. 미래에 연연해할 필요도 없다. 그냥 될 때까지 하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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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게 행운인지 불운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운이 좋아서 이렇게 살아왔고 살고 있을 뿐이며, 재수가 없기 때문에 여태껏 살아남았고 살아갈 뿐이다. 생각보다 많은 일들을 겪었지만, 딱히 이렇다 할 중차대한 단 하나의 사건 같은 건 없었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그때그때 맞춰서 살아왔던 것 같다.
하루하루. 그게 전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간다. 왜냐하면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냥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내린 선택을 최선이라고 우기고, 현재에 집중하고, 그렇게 살아내야 한다.
사르트르는 이것을 주체적 삶이라고 불렀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최대한 활용하여 살아가며, 선택에 대해 후회나 변명 없이 온전한 바카라임을 지는 태도. 역사가 우리를 휩쓸고, 의지가 맹목적으로 작동하고, 일어날 일이 일어나더라도, 여전히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 작은 선택들을 온전히 바카라임지고, 후회 없이 살아내는 것.
그것만이, 삶이다.
(전략)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중략)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