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器免成
서른.
누군가는 회사를 세웠고, 누군가는 엑시트를 통해 수백 억을 쥐었다.
천장을 보며 생각한다. 나는 지금껏 뭘 했나.
열등감, 박탈감, 부러움. 셋은 같은 계산에서 나온다. 나의 위치에서 타인의 위치를 빼는 뺄셈.
모든 뺄셈은 두 항이 같은 단위여야 성립한다.
우리는 당연히 같은 단위라고 믿는다.
그러나 정작 그 믿음은 검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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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솝의 우화를 다시 읽는다. 토끼와 거북이. 느려도 꾸준하면 이긴다.
이 교훈은 반쪽짜리다. 진짜 질문은 거북이가 어떻게 이겼는지가 아니라, 애초에 왜 거북이가 그 트랙 위에 서 있었는가다.
토끼가 정한 경기장은 육지였다. 직선 주로, 마른 흙, 다리의 속도가 전부인 지형. 거북이는 그 지형에서 이길 수 없다. 그 지형이 애초에 토끼를 위해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화 속 거북이가 이긴 것은 토끼가 낮잠을 잤기 때문이지, 거북이가 그 지형에 적합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사실 요행의 교훈이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해 보인다. 내게 맞는 지형을 찾으면 된다. 바다가 됐든 사막이 됐든. 경주가 성립하려면 같은 트랙이 전제되어야 한다.
나와 남을 같은 트랙 위에 세우는 순간 이미 지고 시작할 확률이 높다. 세상의 트랙은 대개 내게 맞춰 설계되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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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TI라는 유사과학적 도구가 몇 년째 이 나라를 휩쓸고 있다. 그중 INFP. 인프피, 멸칭 '씹프피'는 "현대 자본주의 슬롯에서 가장 적응하기 힘든 유형"이라고 불린다. 과학적 근거는 빈약하지만 의외로 널리 공감을 받는다. 인프피가 실재하는지는 나중 문제지만, 인프피의 극단인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다.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것은 즉각적 산출, 외향적 자기 증명, 빠른 피드백 루프다. 대부분의 인프피는 이 요구와 맞지 않는다. 느리게 숙성하고, 안으로 침잠하고, 결과보다 의미를 먼저 묻는 방식. 시스템은 이를 부적응 또는 결함이라 부른다. 육지에서 뒤뚱거리는 거북이에게 육지의 언어로 너는 왜 이렇게 느리냐고 묻는다.
우리는 부적응을 개인의 결함으로 내면화한다. 한병철은 규율슬롯가 금지로 작동했다면 성과슬롯는 허용으로 작동한다고 말했다. 외부에 존재하던 채찍을 든 감독관이 자기 내면에 들어선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착취하면서 그것을 자유라고 오독한다. 액정 앞에서 느끼는 열등감은 외부의 평가가 아니라 내 안에 이미 설치된 감독관의 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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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적도에서 시속 1670킬로미터로 자전한다. 여객기보다 빠르다. 공전 속도는 초속 29.8킬로미터, 총알보다 수십 배 빠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는 이 순간에도 나는 비행기보다 빠르고 총알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묘한 위안을 느낀다.
그러나 이 위안은 함정이다. 자전과 공전이 아무리 빨라도 같은 종류의 빠르기다. 킬로미터와 시간으로 잴 수 있는 빠르기. 토끼와 거북이가 여전히 같은 트랙 위에 있는 것처럼, 지구도 여전히 뉴턴의 우주 안에서 움직인다.
반면 우주의 팽창은 다르게 작동한다. 허블 반지름, 약 140억 광년의 거리를 넘어서면 은하의 후퇴 속도는 광속을 넘어선다. 그 너머에서는 광속이라는 잣대 자체가 적용되지 않는다. 물체가 공간을 가로질러 달리는 게 아니라 공간 자체가 팽창한다.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척도의 문제. 더 빠른 것이 아닌 다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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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도덕경 41장에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大器晩成,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1973년 마왕퇴에서 발굴된 백서본에는 이 구절이 다르게 적혀 있다.
大器免成, 큰 그릇은 이루어짐을 면한다.
만성(晩成)은 완성을 향한다.
면성(免成)은 완성이라는 종착점 자체를 거부한다. 큰 그릇(道)은 정해진 꼴을 갖지 않는다.
대기만성이라는 말로 스스로를 위로할 때 우리는 여전히 같은 트랙 위에 서 있다. 남들보다 조금 늦을 뿐 언젠가 결승선을 통과하리라는 믿음.
하지만 늦은 완성이 아니라,
완성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는 전환을 지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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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의 주기매미는 십칠 년을 땅속에서 산다. 유충 상태로 나무뿌리의 수액을 빨아 먹으며 열일곱 번의 겨울을 보내고, 어느 여름 지상으로 올라와 몇 주를 살다 죽는다.
우리가 매미의 존재를 소리로 인지한다. 소리가 나면 있고, 나지 않으면 없다. 십칠 년 동안 매미는 내내 살아 있었지만 인간의 척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십칠 년의 기다림은 지상의 셈법이다. 매미에게 땅속의 십칠 년은 준비 기간이 아니라 생의 대부분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지상의 척도로 잴 수 있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뿐이다. 그 생이 잠깐 척도 안으로 들어왔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것을 매미의 일생이라 부른다. 고작 결말에 불과할 뿐인데.
매미는 땅속에서 놀지 않았다. 열일곱 해 동안 뿌리의 수액을 섭취했다. 땅 위에서 보면 땅 속의 침묵은 전부 똑같이 생겼기 마련이다.
그러니 면성(免成)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허가가 아니다. 완성은 면하되 계속해서 성장해야 한다는 당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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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의 계산으로 돌아간다. 나의 위치에서 타인의 위치를 빼는 뺄셈. 그 식은 틀린 것이 아니라 애초에 성립하지 않는다. 단위가 다른 두 항은 뺄 수 없으므로. 계산할 수 없는 방정식을 굳이 계산했을 때 나오는 값은 열등감뿐이다.
답은 간단해 보인다. 내게 맞는 지형을 찾으면 된다고. 낙타라면 사막으로, 악어라면 늪으로. 그러나 그 답도 결국 도착지를 묻는다. 사막에는 결국 사막의 순위가 있는 법이니까.
천장을 본다.
지금이 열일곱 번의 겨울 중 몇 번째일까 생각하며 눈이 감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