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적 초라함과 삶의 부조리에 대하여
잠들지 못하던 새벽들을 기억한다. 아무리 시를 읽고 써도 공허했다. 아침은 견뎌내야 할 시간이었다. 매일 밤 하나의 질문이 목을 졸랐다. 어차피 죽을 텐데, 도대체 왜 살아야 하는가.
물론 답은 없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 세탁소를 운영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만났다.〈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단순한 멀티버스 오락 영화가 아니다. 실존주의 철학의 계보를 스크린 위에 새겨내며, 그 계보의 끝에서 조용히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전위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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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세청 직원이 영수증 위에 원을 그린다. 그 원은 단순한 회계 표시가 아니다. 세탁소 운영과 무관한 지출에 대한 부정 처리. 노래방 기기가 상징하는, 에블린의 행복이 틀렸다고 선언하는 원. 세 가족이 함께 웃던 기억. 딸이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던 순간. 에블린이 장난스럽게 그 마이크를 빼앗던 순간. 그 기억은 비용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선택 없이 세계 안으로 던져진 존재'로 정의했다. 피투성(Geworfenheit). 나는 이 시대에, 이 나라에, 이 가족에 태어나기를 선택하지 않았다. 어느 날 눈을 떴더니 — 이미 시작되었기에, 그냥 여기 있을 뿐이다.
에블린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이민자의 딸로 태어나 아버지의 실망을 등에 지고 산다. 처음부터 세탁소 주인으로 태어나지 않았다. 꿈을 포기한 적이 없지만 꿈은 이미 지나갔다.
그러나 피투성보다 더 무서운 것은 세인(das Man)이다. 익명의 타자, 무작위 사람들, 누가 정했는지 모르지만 — 그냥 다들 그러니까 따르는 것. 좋은 딸, 좋은 엄마, 좋은 사람. 그 모든 슬롯적 당위가 에블린의 삶을 구성했다. 비본래적 실존, 자기 자신이 아닌 존재로 사는 것.
사르트르는 그 비본래적 실존을 유지하는 방식을 자기기만(mauvaise foi)이라고 불렀다. 자신이 선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모른 척하는 것. 에블린은 생각한다. 어쩔 수 없었어. 아버지 때문에, 남편이 무능해서, 딸이 말을 안 들어서. 모든 실패의 원인을 바깥에서 찾는 태도. 에블린은 스스로 선택한 이 삶을 후회한다.
그러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태어나기 전에 정해진 본질 따위는 없으므로, 모든 것이 선택이다.
심지어 선택하지 않는 선택조차도.
영화는 같은 장면 — 에블린이 영수증을 테이블에 늘어놓고 정리하는 장면 — 을 세 번 반복한다. 같은 자리에 반복적으로 던져지는 탈출할 수 없는 조건은 피투성의 시각적 번역이다.
그리고 다시 국세청 직원이 그린 원.
그것이 이 영화의 첫 번째 베이글이다.
인스타그램을 열면 오늘도 누군가는 반드시 나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 더 좋은 곳에 살고, 더 아름다운 몸을 가졌고,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행복한 삶을 산다. 그 화면을 닫으면 내가 충분하지 않다는 느낌만 남는다.
낭만(浪漫)이라는 말의 낭(浪)은 물결처럼 흘러간다는 뜻이다. 그리고 낭비(浪費)의 낭과 같은 글자다. 목적 없이 떠도는 것. 현대 슬롯는 이것을 낭비라고 부른다. 돈이 되지 않으면, 성과가 없으면, 최적화되지 않으면 — 그것은 낭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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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질병이 있다. 과거 규율슬롯의 질병은 복종이었다. '~해서는 안 된다'는 부정성이 지배했던 시대. 그 금지 앞에서 인간은 복종하거나 저항했고, 광인과 범죄자가 그 시대의 병리였다. 그리고 21세기 성과슬롯의 질병은 '~해야 한다'는 긍정성이 지배한다. 성과슬롯라는 시대적 병리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한병철은 진단한다.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슬롯에서만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이 가능하다."
허무주의는 결핍의 산물이 아니다. 과잉의 산물이다. impossible is nothing, you can do anything 이라는 선언이 만들어낸 역설적 지옥. 성과슬롯에서 개인은 자유롭다고 느낀다. 억압하는 타자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신도, 왕도, 이념도 없다. 오직 나만이 있다.
그러나 억압의 주체는 바깥에서 내부로 이동했다. 이제 나 자신이 나 자신의 교도관이자 경영주가 된다. 스스로가 스스로의 착취자이며 피착취자. 자유로운 자기착취, 이동하는 판옵티콘. 그것이 현대 피로슬롯의 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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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기착취의 끝에서 한병철은 더 깊은 상실을 발견했다. 현대인은 타자를 잃어버렸다. 나르시시즘이 지배하는 슬롯에서 주체는 자기 자신의 메아리만을 듣는다. 남는 것은 자기 자신을 향한 끝없는 자기최적화뿐이다.
기술 또한 일조한다. 알고리즘은 뇌를 편향되게 만든다. 알고리즘에는 정보의 무작위성이 없다. 내가 자주 보는 것만 추천한다. 편향은 점점 강해지고, 타협점을 찾는 힘은 점점 떨어진다. 연못에 비친 자기 모습만 바라보는 나르키소스처럼 — 내 머릿속으로 만든 세상을 편향되게 보정해나가며 필터 감옥에 갇힌다.
나르키소스는 그 감옥에서 빠져 죽었다. 현대인은 그 감옥 안에서 살아간다. 타자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내 의견과 다른 사람은 싸워야 할 괴물로 인식된다. 에로스가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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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브룩스는 이 시대를 빅미(Big Me) 세대라고 부른다. 자아 비대의 시대. 자의식 과잉의 시대. 모두가 특별하다고 배운 세대. 그러나 특별함의 인플레이션 속에서 아무도 특별하지 않은 세대.
그 결과가 수치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에서 우울증으로 병원을 찾은 환자는 2022년 처음으로 100만 명을 돌파했다. 2014년 58만 명이었던 우울증 진료 인원이 104만 명으로 10년 사이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통계에 따르면 전체 우울증 환자 중 2030대가 차지하는 비율은 2018년 26%에서 2022년 36%로 증가했다. 20대 우울증 환자 수는 2017년 7만 6천 명에서 2021년 17만 3천 명으로, 4년 사이 45.7% 급증했다. 국립정신건강센터의 조사에서 20대 응답자의 76.6%가 정신건강 문제를 경험했다고 답했다. 열 명 중 여덟 명이다.
그 끝에 자살이 있다. 통계청의 2023년 사망원인 통계에 따르면 자살은 15세에서 34세 청년의 사망 원인 1위다. 2023년 기준 20대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22.4명, 30대는 25.1명이다. 한국의 자살률은 OECD 평균의 두 배를 넘는다. 2003년 이후 20년째 OECD 자살률 1위라는 기록을 유지하고 있다. 하루 평균 40명. 36분마다 한 명씩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소셜미디어는 긍정성 과잉의 가장 완성된 형태다. 플랫폼 전체가 자기최적화의 무한경쟁장이다. 규율슬롯는 외부의 적이 있었기에 맞서 싸울 수라도 있었다. 반면 성과슬롯에는 외부의 적이 없다. 오직 내가 충분하지 않을 뿐이다. 저항할 수 없는 폭력. 방향이 없는 분노. 그것이 소진으로, 우울로, 그리고 결국 허무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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