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숙소야, 미술관이야?-네덜란드, 뷔심

by지노아


네덜란드 여행을 앞두고 나는 반 고흐를 제법 오래 들여다봤다. 세계사 영상을 찾아보고 그의 일대기를 다룬 바카라도 몇 권 읽었다. 아이들에게는 그중 흥미로워할 만한 이야기를 골라 들려줬다. 반 고흐에게는 테오라는 동생이 있었다는 것, 두 사람이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것,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의 그림이 거의 팔리지 않았다는 이야기 같은 것들이었다.


네덜란드까지 가는 길에 아이들이 심심해하지 않도록 반 고흐 미술관 홈페이지에서 해바라기 컬러링도 출력해 챙겼다. 여행을 떠나기도 전에 우리 집에는 해바라기 몇 송이가 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암스테르담 도심의 숙소는 값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차로 20분 남짓이면 닿는 외곽까지 범위를 넓혔고, 그렇게 고른 곳이 뷔심(Bussum)의 한 가정집이었다. 여행을 일주일 앞두고 숙소를 예약하는 일은 이제 제법 익숙해졌다. 다만 괜찮은 숙소를 만날 확률은 여전히 복불복이었다. 게다가 이 집은 후기가 없었다.


예약을 요청하고 하루 뒤, 호스트에게서 답장이 왔다. 자신들도 여행을 떠나니 집을 편하게 쓰라는 내용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들이 비워둔 집이 곧 우리가 머물 집이 된다는 말이 어떤 뜻인지를.


다섯 시간 넘게 달려 동네에 도착했다. 골목으로 들어서자 독일 번호판을 단 낯선 차가 신기했는지, 앞마당에서 티타임을 즐기던 사람들의 시선이 유독 오래 우리 차를 따라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더는 차를 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신이 나 있었다.


키박스에서 열쇠를 꺼내 현관문을 열자 아이들이 "엄마! 집이 너무 예뻐!" 하고 외치며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남편도 "생각보다 너무 좋은데?" 하며 얼굴 가득 웃었다. 예쁜 것을 보면 일단 사진부터 찍고 보는 나는 조용히 셔터를 누르느라 바빴다.


현관을 지나 다이닝룸에 들어서니 넓은 식탁 위에 웰컴드링크와 편지가 놓여 있었다. 호스트 남편이 다니는 음료 회사 제품이라고 했다. 바닥에 남은 하얀 얼룩은 예술가인 호스트가 작업하다 생긴 페인트 자국이었다. 2층의 방 두 개는 아이들 방이니 안의 물건을 조심히 다뤄달라는 당부까지 읽고 나서야 나는 이 집이 어떤 곳인지 제대로 알아차렸다.


호스트 가족이 실제로 살고 있는 공간이었다.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우리가 그 자리에 들어와 며칠을 살아보게 된 것이다.

다이닝룸 천장에는 유리 풍선들이 묶여 있는 듯한 조명이 매달려 있었다. 햇빛이 닿을 때마다 조명은 빛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주방 선반에는 이 가족이 즐겨 먹는 향신료와 소스가 가득했다. 마트에서 살까 말까 망설이다 내려놓았던 것들을 이 집에서는 조심스레 시도해 볼 수 있었다.


냉장고를 열자 시원해 보이는 하이네켄 맥주가 보였다. 이것 역시 웰컴드링크였다. 아이들이 어려서 하이네켄 공장 투어를 일찌감치 제외했던 터라, 호스트의 작은 선물이 유독 반가웠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에 발을 올리자 삐그덕하고 소리가 났다. 이 소리는 다음 날 안네의 집 계단에서 다시 들을 수 있었다. 좁은 폭까지 닮은 두 계단을 오르며, 여행지의 네덜란드 집들이 이 평범한 가정집 안에도 이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단 옆 창가에도 미술 장식품들이 놓여 있었다. 나도 이런 감각을 닮고 싶다고 생각하며 2층에 올라서니 호스트 부부의 방과 아이들 방이 나란히 나왔다. 분명 다른 사람의 집인데, 오늘 밤 우리가 저 침대에서 자야 한다고 생각하니 호텔방 침대보다 훨씬 낯설었다.


바카라장에서 그림바카라 한 권을 꺼내 들었다. 낯선 글자들이 페이지마다 빼곡했다. 손가락으로 짚어봐도 읽히지 않는 문장, 그림만으로 짐작해 보는 이야기.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만이 방 안에 나지막이 울렸다.

호스트의 아이에게 한국어로 짧은 편지를 써주면 어떻겠냐고 큰아이에게 물었다. 하지만 별로 내키지 않아 하는 표정에, 그 마음은 조용히 접었다.


2층 창으로 내려다본 뒷마당들은 집집마다 다른 얼굴이었다. 어떤 집은 마당에 TV를 내놓고 밖에서 방송을 보고 있었고, 어떤 집은 꽃으로 마당을 가득 채웠다. 이 집 마당에는 작은 미끄럼틀과 모래놀이터, 트랜폴린이 있었다. 아이들은 "어릴 때 봤던 그림바카라에 나온 것과 똑같아!"라며 좋아했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가 가장 오래 머문 곳 중 하나는 반 고흐 미술관이었다. 우리는 오디오가이드에 귀를 기울인 채 작품 앞에 오래 서 있었고, 아이들은 손에 든 질문지를 채우느라 바빴다. 작품 앞에 섰다가 질문지를 들여다보고, 다시 그림을 올려다보기를 반복했다. 문제를 다 풀면 반 고흐 작품으로 만든 엽서를 한 장 고를 수 있었는데, 아이들은 그 작은 엽서 하나를 고르는 데도 제법 신중했다. 나 역시 기념품 숍에서 오래 서성인 끝에 꽃피는 아몬드 나무 그림이 프린트된 안경 수건을 하나 샀다. 매일 손에 잡을 수 있고, 가방에 넣어 어디든 데리고 다닐 수 있는 것.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가깝고 손쉬운 방식으로 반 고흐의 그림 하나를 데려온 셈이었다.


그날 저녁 우리는 다시 뷔심의 집으로 돌아왔다.

낯선 이에게 자신이 사는 공간을 통째로 내어준다는 것. 나라면 그럴 수 있었을까? 도난이나 파손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냉장고를 열어두고, 아이들 방을 내어주고, 바카라과 장난감과 색연필까지 그대로 둔 채 여행을 떠날 수 있었을까.


2박 3일 동안 암스테르담을 부지런히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도 결국 이 집에서 편히 쉬었던 덕분이다. 하루 종일 밖에서 걷고 돌아오면 누가 말하지 않아도 각자 익숙한 자리를 찾아갔다. 며칠 전까지 얼굴도 몰랐던 가족의 집에서 이상할 만큼 자연스럽게 하루를 마무리했다.



네덜란드에서의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고 나는 퇴실을 앞두고 마음이 분주해졌다. 퇴실 의식처럼 청소기를 꺼내 이틀 밤 동안 우리가 흘리고 다닌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다녔다. 집을 그냥 떠나기가 아쉬웠는데, 여행 전에 출력해 온 해바라기 컬러링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이곳을 즐기느라 색칠을 할 기회가 없어 아직 텅텅 비어있던 해바라기였다.


아이들은 호스트 아이들의 색연필을 꺼내 해바라기를 노랗게 칠했다. 나는 그 뒷면에 집이 너무 멋졌고, 그래서 더 조심히 지내려 애썼다는 말을 남겼다. 떠나며 방명록은 남겨봤지만 긴 편지글을 남기는 것은 처음이라 더 횡설수설했다.



일주일쯤 지나 우리의 에어비앤비 후기에 호스트의 비공개 메모가 달렸다.


"Thank you for taking good care of our home. We are happy you've enjoyed our house. Thank you for the lovely note and beautiful artwork! It's better than a real Van Gogh! ;) enjoy the rest of Europe!"







이전 12화빠리 지하주차장의 매운맛-프랑스,이브리쉬르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