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 보고 있으면 솔직하게 말할 수 없어

사잔 올 스타즈(2000), <TSUNAMI>

by배대웅

사람은 자기가 잃어버린 것을 그리워한다. 얼마 전 나는 가져본 적도 없는 것을 그리워하게 됐다. 바로 첫사랑이다.


정확히 말하면 첫사랑은 있었다. 나도 사람인데 그 정도는 있었다. 다만 남들이 첫사랑이라고 부르는 시절의 장면들이 하나도 없었을 뿐이다. 그 사실을 남의 첫사랑 이야기를 읽다가 깨달았다.


계기는 내가 구독하는 연두 작가님의 <고백 그 후>라는 글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한 남학생과 주고받은 편지에 관한 이야기였다. 두 사람은 서로 좋아했다. 그런데 사귀지는 않았다. 일주일에도 몇 통씩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학교에서는 제대로 말도 못 했다. 편지에는 하루 동안 있었던 일과 좋아하는 음악과 진로에 대한 고민까지 썼다. 그런데 막상 복도에서 얼굴을 마주하면 대화는 “어디 가?”, “운동장”이 전부였다. 편지지 몇 장을 채우던 사람들이 정작 마주치면 두 단어씩만 말했다.


대신 무성한 플라타너스 잎 사이로 햇살이 들어오는 운동장 구석에서 오전 내내 주머니 속에 넣어둔 편지를 꺼내 읽었다. 수학여행지에서 받은 은목걸이는 선생님에게 들킬까 봐 교복 블라우스 안에 숨겼다. 고3의 어느 날에는 야자를 앞두고 아무도 없는 교실에 둘만 남았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밖은 캄캄해졌다. 교실에는 불도 켜지지 않았다.


사실 이런 류의 에세이를 즐겨 읽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대문자 T'라는 말을 듣는 나도 이 글을 읽으며 제법 촉촉해졌다. 플라타너스와 편지와 은목걸이와 불 꺼진 교실이라니. 내가 경험해본 적도 없는 장면들인데 하나같이 그림처럼 그려졌다.


다 읽고 나니 살짝 현타도 밀려왔다. 남의 첫사랑은 알겠는데 내 10대는 뭐였나 싶어서. 나의 10대에는 플라타너스 아래에서 읽은 편지도, 교복 안의 목걸이도, 불 꺼진 교실에서 단둘이 나눈 대화도 없다. 대체로 학교에 갔고, 공부를 했고, 야간자율학습을 했고, 집에 왔다. 다음 날에는 놀랍게도 똑같은 일을 반복했다. 인류가 디스토피아 SF 영화를 만들 때 참고해도 좋을 법한 완벽한 루프물이었다.


나는 남고를 다녔다. 꽤 엄한 학교였다. 이성교제는 대학 입시를 방해하는 불순한 행위로 취급되었다. 사실 남고였으므로 교내에 이성 자체가 없었다. 그런데 하지 말란다고 안 한다면 인류 역사에 종교도, 과학도, 철학도, 야동도 없지 않았겠는가. 그 엄혹하던 분위기에도 어딘가에서 연애하는 놈들은 꼭 있었다. 이를테면 교회랄지, 학원이랄지. 물론 발각되면 쳐맞을 각오를 해야 했다.


다행히 나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여자와 만날 일이 없었으니까.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여자와 단둘이 대화를 나눠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연애를 못 했다는 뜻이 아니다. 연애를 못 했다고 하려면 적어도 여자를 만나기는 했어야 한다.




문제는 대학에 가니까 갑자기 세상의 절반이 여자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강의실에도, 과방에도, 밥을 먹으러 가도 있었다. 심지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영어라고는 이제 “How are you?”, “I’m fine, thank you.” 정도를 익힌 초등학생을 갑자기 맨해튼 한복판에 풀어놓은 꼴이었다. 세상은 준비되지 않은 인간에게 너무 많은 자유를 한꺼번에 주면 안 된다.


물론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지라 곧 여자들과 평범하게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대화를 하는 것과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감정은 저절로 생기지만 관계는 저절로 진전되지 않는다.


좋아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이제 무엇을 해야 하지? 연락을 자주 해야 하나? 얼마나 자주 해야 하나? 둘이 밥을 먹자고 하면 데이트인가? 상대가 먼저 연락하면 호감인가? 내가 보낸 문자에 바로 칼답을 하면 좋은 신호인가?


이런 문제에는 참고서도 없고 모범답안도 없었다. 상대가 달라지면 답도 달라졌다. 어제까지 맞았던 공식이 오늘은 틀렸다. 나는 대학에 들어와서야 남들이 중고등학교 6년에 걸쳐 익힌 과정을 속성으로 배워야 했다. 6년 과정을 벼락치기로 배웠으니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도 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지 몰랐다. 너무 빨리 다가갔다가 부담을 주기도 했고, 너무 오래 머뭇거리다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도 했다. 상대가 보내는 신호를 혼자 확대해석한 적도 있었고, 반대로 분명한 신호를 받고도 나중에야 알아차린 적도 있었다. 나는 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뒤에야 감독의 의도를 파악하는 관객이었다.


모든 상황이 끝난 뒤 누군가 말했다.

“걔가 너 좋아했던 거잖아.”

“뭐?”

“그걸 몰랐어?”

몰랐다. 놀라울 정도로 아무것도 몰랐다.


30대 초반에는 독서모임에서 친하게 지내던 여자 후배가 있었다. 그 후배는 어느 순간부터 나를 위해 ‘여자말 번역기’ 역할을 해줬다. 내가 어떤 여자의 말과 행동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옆에서 오역을 바로잡아주었다.

“오빠, 그 말은 그런 뜻이 아니야.”

“그럼 무슨 뜻인데?”

“싫다는 뜻이야.”

“싫으면 싫다고 하면 되잖아.”

“그러니까 오빠가 여자를 모르는 거야.”

대화는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나는 국어를 잘한다고 생각했다. 바카라도 많이 읽었고 글도 썼다. 그런데 세상에는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언어도 있었다. 특히 호감, 거절, 예의, 망설임, 가능성, 귀찮음, 민망함 같은 것들은 사전에 실린 뜻만으로는 해석되지 않았다.


그 후배는 가끔 반대의 경우도 알려주었다.

“그건 관심이 있다는 뜻이야.”

“그냥 친절한 거 아니야?”

“아니야.”

“왜?”

“여자는 관심 없는 남자한테 그렇게까지 안 해.”

“근거는?”

“오빠는 그래서 안 돼.”


나는 서른이 넘어서야 원어민 과외를 받은 셈이다.




연두 작가님의 글을 읽으며 떠오른 노래가 있다. 일본 록밴드 사잔 올 스타즈의 <TSUNAMI>다. 2000년에 발표된 이 곡은 일본에서 거의 국민가요로 통한다. 한국에서도 V.One이 <그런가봐요>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했다. 멜로디도 아름답지만 내가 이 노래를 좋아하는 진짜 이유는 가사다.


세상에 사랑 노래는 넘쳐난다. 하지만 <TSUNAMI>에는 좀처럼 흉내 내기 어려운 문장들이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


“마주 보고 있으면 솔직하게 말할 수 없어.”


연두 작가님의 글에 이 가사가 BGM처럼 흐르는 것 같다. 편지지 몇 장을 채우던 두 사람이 막상 얼굴을 마주하면 “어디 가?”, “운동장”밖에 말하지 못했으니까.


이 문장에는 사랑한다는 말도, 보고 싶다는 말도 없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정확히 쓴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 말이나 잘한다. 정작 중요한 사람 앞에서는 말이 줄어든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말하지 못한다. 마음은 넘치는데 입은 닫힌다.


어린 시절의 사랑은 더욱 그렇다. 감정은 처음 겪을 만큼 큰데 그것을 다룰 말은 아직 부족하다. 왜 자꾸 그 사람이 생각나는지, 왜 편지 한 통을 오전 내내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지, 왜 별것 아닌 목걸이에 가슴이 쿵쾅거리는지, 자신도 잘 모른다. 좋아하는 마음은 생겼으나 그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모른다. 그래서 편지지 몇 장을 채우고도 얼굴을 마주하면 두 단어밖에 말하지 못한다.


작가에게 사랑은 최악의 레드오션 주제다. 쓰고 싶은 사람은 끝없이 들어오는데 이미 안 쓰인 말이 없다. 사랑한다. 보고 싶다. 잊지 못한다. 그립다. 다 맞는 말이다. 문제는 수천 년 동안 수십억 명이 똑같은 말을 해왔다는 것이다.


사랑을 써서 실패하기는 쉽지 않다. 독자가 알아서 자기 경험을 보태주니까. 그러나 사랑을 새롭게 쓰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작가는 남들이 수십억 번 지나간 자리에서 아직 발자국이 없는 곳을 찾아야 한다.


<TSUNAMI>는 그런 곳을 절묘하게 찾아낸다. “마주 보고 있으면 솔직하게 말할 수 없어.” 사랑이라는 단어는 없는데 누구나 사랑인 줄 안다. 설명하지 않았는데 장면이 생긴다. 그 장면에 각자의 기억이 들어간다. 누군가는 처음 손을 잡았던 사람을 떠올릴 것이고, 누군가는 끝내 고백하지 못한 사람을 떠올릴 것이다. 편지를 주고받고도 사귀지 못한 사람도 있을 테고, 다 끝난 뒤에야 상대도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내 경우에는 집어넣을 기억이 없다. 하지만 그런 나도 있지도 않은 옛사랑을 떠올렸다. 플라타너스 아래에서 편지를 읽어본 적도 없으면서 그 장면을 그리워했고, 좋아하는 사람과 불 꺼진 교실에 남아본 적도 없으면서 그때의 침묵을 알 것 같았다. 좋은 가사는 야자만 하던 인간에게 추억까지 날조해주는 모양이다.


나는 원래 10대에 첫사랑의 장면이 없다는 사실이 아쉽지 않았다. 사람은 처음부터 없던 것을 잘 그리워하지 않는다. 비교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두 작가님의 글을 읽고 나니 내 쪽 풍경이 너무 휑해 보였다. 플라타너스와 편지와 은목걸이와 불 꺼진 교실을 다 보고 나니, 내 10대에는 왜 참고서와 문제집만 풀세트로 갖춰져 있었나 싶다.




실은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내가 작가로서 가장 써보고 싶은 것은 과학 바카라도, 글쓰기 바카라도 아니다. 노래 가사다. 특히 사랑 노래.


아오 ㅅㅂ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짘ㅋㅋㅋ 여기까지 쓰고 보니 민망해서 대기권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다. 남고를 나와 대학에서 여자와 대화하는 법을 배웠고, 서른이 넘어서 여자말 번역기까지 필요했던 인간이 사랑 노래를 쓰고 싶다니. 이력서만 보면 서류심사 광탈 각이다.


그래도 좋은 가사를 만날 때마다 기분이 좀 나빴다. 아이 씨, 이런 걸 먼저 써버렸네. 사랑한다는 말 없이 사랑을 쓰고, 슬프다는 말 없이 슬픔을 알아보게 한다. 수십억 명이 겪고 수천 년 동안 써먹은 감정인데, 읽고 나면 아직 쓸 말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독자로서는 감탄하고 작가로서는 약이 오른다.


세계사를 쓰려면 수백 권의 바카라을 읽어야 한다. 과학을 쓰려면 먼저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슬롯를 쓰려면 현상을 설명할 체계를 세워야 한다. 모두 어렵다. 그래도 공부한 만큼 앞으로 갈 수는 있다.


사랑은 다르다. 레퍼런스는 이미 차고 넘친다. 세상 모든 사람이 한 번쯤 겪었고 한마디씩 할 말도 있다. 아무리 많이 공부해도 새로 알려줄 사실이 별로 없다. 결국 남는 것은 표현이다. 모두가 아는 감정에서 아무도 못 본 문장을 꺼내는 것.


“마주 보고 있으면 솔직하게 말할 수 없어.”


나는 평생 연애에 능숙했던 적이 없지만 이 문장이 얼마나 정확한지는 안다. 내 10대에는 저런 장면이 없었지만 얼마나 아름다운지도 안다. 기억을 불러내는 문장은 많다. 없는 기억까지 건드리는 문장은 드물다.


언젠가 나도 그런 가사를 써보고 싶다. 누군가는 오래전의 한 사람을 떠올리고, 나 같은 사람은 가져본 적도 없는 기억을 그리워하게 되는 가사.


그런 문장 하나를 쓸 수 있다면, 쓰고 싶었던 다른 모든 바카라은 못 써도 좋다.


風に戶惑う 弱氣な僕
바람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나약한 나
通りすがる あの日の幻影
스쳐 지나가는 그날의 환영
ホントウは見た目以上淚もろい過去がある
사실 내게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눈물 많은 과거가 있어

止めど流る 淸か水よ
멈추려 해도 흐르는 맑은 물이여
消せど燃ゆる 魔性の火よ
끄려 해도 타오르는 마성의 불이여
あんなに好きな人に出逢う夏は 二度とない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던 여름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아

人は誰も愛求めて 闇に彷徨う運命
사람은 누구나 사랑을 찾아 어둠 속을 헤매도록 태어난 운명
そして風まかせ Oh my destiny
그리고 바람이 이끄는 대로 Oh my destiny
淚枯れるまで
눈물이 마를 때까지

見つめ合うと 素直におシャベり出來ない
마주 보고 있으면 솔직하게 말할 수 없어
津波のような侘しさに
해일 같은 외로움이 밀려올까
I know… 怯えてる
I know… 두려운 거야

めぐり逢えた瞬間から 魔法が解けない
처음 만난 순간부터 마법이 풀리지 않아
鏡のような夢の中で 思い出はいつの日も 雨
거울 같은 꿈속에서 추억에는 언제나 비가 내려

夢が終わり目醒める時
꿈이 끝나고 눈을 뜰 때
深い闇に 夜明けが來る
깊은 어둠에도 새벽이 찾아와
ホントウは見た目以上打たれ强い僕がいる
사실 내 안에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강한 내가 있어

泣き出しそうな空眺めて 波に漂うカモメ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하늘을 바라보며 파도 위를 떠도는 갈매기
きっと世は情け Oh sweet memory
그래도 세상은 인정으로 사는 것 Oh sweet memory
旅立ちを胸に
떠날 날을 가슴에 품고

人は淚見せずに大人になれない
사람은 눈물을 보이지 않고는 어른이 될 수 없어
ガラスのような戀だとは
유리처럼 깨지기 쉬운 사랑이었다는 걸
I know… 氣付いてる
I know… 알고 있지만

身も心も愛しい 女性しか見えない
몸도 마음도 사랑스러운 그 사람 밖에는 보이지 않아
張り裂けそうな胸の奧で 悲しみに耐えるのは何故
터질 듯한 가슴 깊은 곳에서 슬픔을 참는 건 어째서일까

見つめ合うと 素直におシャベり出來ない
마주 보고 있으면 솔직하게 말할 수 없어
津波のような侘しさに
해일같은 외로움이 밀려올까
I kmow…怯えてる
I know… 두려운 거야

めぐり逢えた瞬間から 死ぬまで好きと言って
처음 만난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사랑한다고 말해줘
鏡のような夢の中で 微笑みをくれたのは 誰
거울 같은 꿈속에서 내게 미소를 지어준 건 누구였을까
好きなのに 泣いたのは 何故
좋아하는데 울었던 건 어째서일까
思い出は いつの日も… 雨
추억에는 언제나 비가 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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