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종로

by배대웅

* 2024년 1월에 발행한 <종로의 추억>을 다시 고쳐 썼습니다.


대학에 입학한 1999년, 서울은 별천지였다. 적어도 막 자취를 시작한 지방 출신 대학생에게는 그랬다. 아마 서울에서 평생 산 사람은 이런 감각을 잘 모를 것이다. 지하철 몇 정거장만 가면 또 다른 번화가가 나왔다. 지방 도시에서는 시내가 하나면 충분했는데, 서울은 가는 곳마다 시내였다. 지방러인 내게는 그것부터 신기했다. 나는 주중에는 학교생활(이라 쓰고 술자리라 읽는다)에 충실하고, 주말에는 목적도 없이 거리로 나갔다. 인사동, 대학로, 경복궁, 남산, 한강, 신촌… 수중에 돈은 없었지만 볼 것은 많았다.


그중 가장 자주 간 곳은 종로였다. 혼자서도 자주 갔지만, 여자친구와 데이트하거나 친구들과 만날 때도 약속 장소는 늘 종로였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자취방에서 가까운 번화가였고, 무엇보다 한강을 건너지 않아도 됐다. 한강 이남은 같은 서울이면서도 왠지 다른 권역처럼 느껴졌다. 코엑스나 잠실까지 가려면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종로는 달랐다. 대학로에서 걸어 내려갈 수도 있었고, 조금 더 걸으면 광화문과 명동이었다.

그 시절 영화는 대개 종로에서 보았다. 가장 자주 간 곳은 종로 3가의 서울극장이었다. 지금 젊은 사람에게 종로에 영화 보러 갔다고 하면 “선생님, 그때도 영화가 컬러였나요?”라는 반응이 돌아올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석규와 심은하가 시대의 아이콘이던 시절, 둘이 나오는 영화는 거의 서울극장에서 보았다.


당시만 해도 영화관은 특별한 곳이었다. 영화를 본다는 행위에 약간의 의식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인터넷 예매가 일상이 되기 전에는 매표소 앞에서 꽤 오래 줄을 서야 했다. 약속한 사람이 늦으면 연락할 방법도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그렇게 기다리는 시간까지도 모두 영화 관람의 일부였다.


서울극장에서 본 마지막 영화는 2003년 11월 개봉한 <올드보이>였다. 이듬해 <태극기 휘날리며>부터는 강변 CGV에서 보았다. 그 무렵 한국영화는 전혀 다른 시대로 넘어가고 있었다. 박찬욱이 <올드보이>를, 봉준호가 <살인의 추억>을 내놓았고, 조금 뒤에는 최동훈이 <범죄의 재구성>으로 등장했다. 한국영화의 뉴웨이브라 불러도 좋을 시기였다.


영화가 달라지는 동안 영화관도 달라졌다. 오래된 극장들은 하나둘 사라졌고, 그 자리를 멀티플렉스가 차지했다. 스크린 안에서는 새로운 감독들이 한국영화를 바꾸고 있었고, 스크린 밖에서는 영화를 보는 방식 자체가 바뀌고 있었다.


나는 그 두 가지 변화를 아무 생각 없이 함께 통과했다. 새로 생긴 더 좋은 영화관에 갔고, 새로 나온 더 재미있는 영화를 보았을 뿐이다. 서울극장을 마지막으로 나올 때도 어떤 시대와 작별한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런 것은 언제나 나중에 알게 된다.


종로에는 타워레코드도 있었다. 가난한 대학생 시절, 생활비를 아껴서 열심히 샀던 유일한 물건이 CD였다. 타워레코드는 건물 하나를 통째로 차지할 만큼 컸다. 층마다 장르가 나뉘어 있었고, 곳곳에 미리 듣기용 플레이어가 놓여 있었다. 그때는 CD 한 장이 쉽게 살 수 있는 가격이 아니었다. 들어보고, 다시 들어보고, 다른 음반과 비교한 뒤에도 한참을 망설였다. 지금은 버튼 한 번 누르면 수만 곡이 나오지만, 그때는 열두 곡을 사는 데도 결심이 필요했다.


2003년의 어느 추운 겨울날, 그곳에서 아바의 앨범을 샀다. 그리고 밤늦은 시간에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버스 안은 어두웠고 창밖의 불빛이 드문드문 일렁였다. 새로 산 CD를 CDP에 넣었다. 이어폰에서 <Thank You for the Music>이 흘러나왔다. 처음 듣는 노래도 아니었는데 왠지 다르게 들렸다. 나는 그 무렵 꽤 힘든 일이 있었던 것 같다.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사람 때문이었을 수도, 학교 때문이었을 수도, 앞날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버스 창밖의 풍경처럼 구체적인 사정은 모두 흘러가버리고, 그때 내가 힘들었다는 어렴풋한 감각만 남았다.


아바는 당연히 내 사정을 몰랐다. 수십 년 전 스웨덴에서 만들어진 노래가 2003년 서울의 어느 대학생을 위로할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그랬다. 나는 버스가 어두운 서울을 지나는 동안 몇 번이고 <Thank You for the Music>을 들었다.


종로에 그런 조용한 장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대학 시절 경험한 집회의 상당수가 종로에서 열렸다. 민중대회, 노동자대회, 농민대회를 비롯해 이제는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온갖 현안 투쟁이 다 거기서 있었다.


보통 대학로에서 결의대회를 한 뒤 종로를 행진해 광화문이나 명동성당 앞에서 정리 집회를 했다. 대부분 평화롭게 진행되었으나 가끔 아닐 때도 있었다. 1999년 여름 종로 4가 사거리에서 전경들에게 처음 두들겨 맞았던 날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눈두덩이에서 피가 철철 흘렀지만, 나는 아픈 것보다도 억울했다. 내가 뭘 잘못했기에 그렇게 맞아야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날 밤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 무렵 나는 많은 것을 믿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결과가 따라와야 한다고 믿었다. 진심을 다하면 그 진심이 세상 어딘가에는 닿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진심인데, 세상이 몰라줄 리 없다.


정치적 이념보다 그 믿음이 먼저였을 것이다. 그때의 나는 마음을 다하면 세상도 그만큼은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랑이든 공부든 정치든 다르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진심인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유독 기억에 남는 두 장면이 있다. 2003년 여름, 나는 광화문우체국 앞에서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는 유인물을 나눠주고 있었다. 햇볕은 뜨거웠고 사람들은 유인물을 받지 않았다. 받더라도 몇 걸음 뒤 쓰레기통에 버리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마음씨 좋아 보이는 중년 여성에게 유인물을 건넸다. 그분은 받지 않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런 일을 하다 보면, 정신 차리고 공부나 하라고 꾸짖는 어른들을 종종 만난다. 나는 그 짧은 침묵의 의미를 눈치채고 곧 시작될 인생 강의를 기다렸다.


그런데 의외의 상황이 벌어졌다. 그분은 어른들이 잘못해서 학생들이 이 고생을 한다며, 미안하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내 손에 5천 원을 쥐여주었다. 시원한 거라도 마시면서 하라고. 나는 당황해서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 했다. 그분은 곧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무엇을 하던 사람이었는지, 왜 그런 말을 했는지도 알 수 없다. 손에 남은 지폐의 감촉만 또렷했다.


같은 해 가을의 기억은 전혀 다르다. 10월답지 않게 쌀쌀했던 어느 날, 종묘공원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대회가 열렸다. 주말마다 반복되는 집회에 질렸던 나는 어서 끝나기만 바라고 있었다. 늘 그렇듯 연설은 길었고 구호는 비슷했다. 행사 순서가 얼마나 남았는지 계속 확인했다.


갑자기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고, 시너 냄새와 탄내가 뒤섞였다. 처음에는 무슨 일인지 몰랐다. 누군가 “분신이다! 안 돼!”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비로소 상황을 파악했다. 집회에 참석한 노동자 한 명이 자기 몸에 불을 붙인 것이었다. 내가 있던 곳에서 몇십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거리였다.


사람들이 우왕좌왕했고 누군가는 계속 소리를 질렀다. 불과 몇 분 전까지 나는 행사 순서가 얼마나 남았는지만 세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시간과 공간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내가 왜 여기에 서 있는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실제로 벌어지는 일인지도 알 수 없었다.


한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내가 주저앉아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슬퍼서인지, 무서워서인지, 분노해서인지 끝내 알 수 없었다. 감정들은 서로 뒤엉켜 있었고, 그중 어느 하나를 골라 이름 붙일 수도 없었다. 세상이 먹구름으로 뒤덮이는 느낌만 들었다.


모두 같은 해에 종로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여름에는 이름도 모르는 여성이 내 손에 5천 원을 쥐여주었다. 가을에는 이용석이라는 이름의 노동자가 몇십 미터 옆에서 자기 몸에 불을 붙였다. 한 사람의 이름은 끝내 몰랐고,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은 아직도 기억한다.

당시에는 두 사건을 한데 묶어 생각하지 않았다. 하나는 고마운 일이었고, 하나는 끔찍한 일이었다. 그저 몇 달 간격으로 일어났을 뿐이다. 그 시절 삶은 그런 식으로 흘러갔다. 한쪽에서는 노래가 위로했고, 다른 쪽에서는 사람이 불탔다. 영화를 보고 나온 거리에서 구호를 외쳤다. 누군가를 사랑했고, 세상을 바꾸겠다고 생각했고, 다음 날 늦잠을 잤다. 큰일과 하찮은 일이 아무 질서 없이 섞여 있었다.


그때는 이 장면들이 훗날 하나의 시절로 묶일 줄 몰랐다. 서울극장도, 아바의 노래도, 5천 원도, 검은 연기도 서로 아무 관계가 없었다. 나는 그저 하루씩 살았고, 종로를 걸었다.


2003년이 지나고도 한동안 종로에 다녔다. 그러나 20대 후반부터 횟수가 줄었고, 30대에 삶의 기반을 대전으로 옮기면서 갈 이유는 거의 없어졌다. 서울에 가더라도 목적지는 다른 곳이었다. 만나는 사람도 달라졌고, 시간을 쓰는 방식도 달라졌다. 종로는 생활 반경에서 조용히 빠져나갔다.


그 사이 서울극장은 문을 닫았다. 타워레코드는 그보다 먼저 사라졌다. 단성사도 영화관이 아니게 되었다. 젊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홍대와 강남을 지나 성수와 다른 동네로 옮겨갔다.

지금 아주 가끔 종로를 지나면 어디가 어디였는지 헷갈린다. 타워레코드가 정확히 어느 건물에 있었는지 자신이 없고, 자주 갔던 술집 이름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과도 대부분 연락이 끊겼다. 한때는 매일같이 연락하던 사람들인데, 이제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모른다.


그때 믿었던 것들 가운데 지금까지 남은 것은 많지 않다. 세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복잡했고, 사람은 신념만으로 움직이지 않았으며, 진심은 생각만큼 대단한 힘을 갖지 못했다. 이제는 진심을 다하고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어느 날 버스를 타고 종로를 지나는데 이어폰에서 이예준의 <넌 나의 20대였어>가 흘러나왔다. 일부러 찾아 들은 노래는 아니었다. 창밖에는 익숙한 듯 낯선 거리가 지나갔다. 노래는 헤어진 연인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너는 없지만 우린 없지만
내 가슴이 기억하니까
난 변했지만 달라졌지만
넌 아물지 않으니까
사랑만으로 사랑이 되던
그 시절을 돌아보니
너는 나의 20대였어


문득 노래 속의 ‘너’가 누구인지 헷갈렸다. 오래전에 헤어진 사람일 수도 있었고, 연락이 끊긴 친구들일 수도 있었다. 서울극장이나 타워레코드 같은 장소일 수도 있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마음일 수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이 한때 종로에 있었다.


지금은 없다. 나도 변했다. 종로를 지나면서도 굳이 버스에서 내리지 않았다. 내려서 확인한들 찾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을 것 같았다.


노래가 끝날 때까지 창밖을 보았다. 서울극장 간판이 켜져 있었고, 타워레코드에는 아직 CD가 가득했다. 스물몇 살의 나는 그 거리를 바쁘게 걸었다. 자기가 젊다는 것도, 다른 곳으로 갈 시간이 충분했다는 것도 모른 채 그저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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