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고의 소설에서 깨어나기
인류는 오랜 세월 스스로를 아주 특별한 존재라 믿어왔다. 확고한 정체성을 지닌 나라는 주체가 존재하며, 고유한 영혼이 신과 연결되어 있고, 자신이 세상을 이성적으로 지각하고 있다는 믿음은 인간 존재의 가장 든든한 기둥이었다. 오랜 전통은 뇌를 그저 거대한 영적 신호를 받아들이는 안테나 정도로 여겼다. 그러나 21세기 뇌과학과 유전자 연구, 그리고 인공지능의 발전은 이 견고한 신념의 뿌리를 흔들고 있다.
만약 뇌가 단순한 영적 수신기나 안테나에 불과하다면, 물리적 손상이 생겼을 때 신호가 희미해질 수는 있어도 영혼의 성품이나 도덕적 인격 자체가 전혀 다른 사람으로 개조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뇌과학 연구에 따르면, 뇌의 미세한 부위가 손상되거나 신경전달물질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 평생 경건했던 사람이 잔혹해지거나 자아의 특성 자체가 완전히 변해버린다. 수술을 할 때, 전신마취를 통해 신경망의 결합을 잠시 끊어내는 것만으로 의식이 우주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러다가 약효가 떨어지면 돌아오는 현실은 의식이 신비한 영혼의 속성이 아니라 철저히 물리적 하드웨어가 엮어내는 생리적 현상임을 정직하게 증명한다.
이처럼 과학이 밝혀낸 의식의 실체는 아름다운 영혼이 아니라, 물리적 하드웨어가 만들어 낸 정교한 시뮬레이션이자 사후에 그럴듯하게 짜 맞추어진 스토리이다. 뇌과학자 벤저민 리벳의 실험이 보여주듯, 우리가 무언가를 하겠다고 의식적으로 결심하기도 전에 무의식적 뇌 시스템은 이미 움직일 준비를 마친다. 뒤이어 언어를 담당하는 좌뇌의 해석기가 작동하여, 실제 이유도 모른 채 상황에 맞추어 그럴듯한 가짜 이야기를 지어낸다. 그리고 이를 나의 이성적 선택이라 믿어버린다. 우리가 자아라고 부르는 현상은 생존을 위해 뇌가 실시간으로 편집해 낸 내러티브에 불과하다는 것이 현재 과학의 다수설이다.
물론 이것이 종교나 영성이 가진 고유한 가치마저 모두 무너뜨리는 것은 아니다. 신비주의적이고 이원론적 영적 의식에 대한 이해의 근거가 사라지고 있을지언정, 뇌라는 정교한 물질을 통해 사랑과 숭고함이라는 비물질적인 경이로운 현상이 창발적으로 피어난다는 사실 자체가 부인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뇌가 만들어내는 도그마의 소설에서 깨어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해야 할 때이다. 침팬지나 개미에게는 없는 영혼이 같은 유전자를 공유하는 인간에게만 있다는 주장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증가하고 있다.
인식 활동의 증가로 비대해진 대뇌피질과 전두엽의 예측 기능은 인간에게 축복이자 굴레가 되었다. 들판의 개나 길가의 나무, 흘러가는 강물은 어떠한 가상의 시나리오도 쓰지 않고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그들의 자연에 순응하는 존재 방식이야말로 왜곡 없는 우주의 모습이다. 반면 인간은 실체도 없는 자아라는 가상의 가훈을 만들어두고, 이를 지키고 방어하기 위해 타인과 비교하며 열등감과 분노를 생산한다. 이미 지나간 과거를 후회하고 오지 않은 미래를 불안해하며 소설을 쓰는 것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평온이나 행복조차도 결핍을 전제로 한 뇌의 강박일 수 있다. 인생이란 극도로 이기적인 존재가 타인과 자신을 기만하고 멋대로 망각하며, 자신의 파이를 최대한 늘리기 위해 벌이는 게임과 유사하다. 신성의 유희라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의 진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고대 철학자들은 무아(無我)와 공(空), 물아일체라는 깊은 직관의 언어로 이를 표현했다. 현대 과학은 첨단 장비와 데이터로 이를 증명해 내고 있다. 과학적 사실이 누적되고 있음에도 많은 이들은 눈을 감은 채 뇌의 방어기제가 주는 가짜 위안에 현혹되어 살아간다. 자신이 모든 동물과 똑같은 생물학적 시스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서늘한 사실을 외면한다. 그러나 이 거대한 시뮬레이션의 작동 원리를 어렴풋이 깨달은 사람은 다른 삶을 선택한다. 내 에고가 써 내려가는 소설에 더 이상 소중한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 인지적 소박함을 실천하는 것이다. 뇌가 생존을 위해 만들어낸 정교한 가상현실이자, 존재하지도 않는 자아를 진짜라고 믿게 만드는 인간 마음의 환각을 깨달은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지켜내야 할 무거운 자아가 없기에 타인과 다툴 이유가 사라지고, 그저 강물처럼 흘러가는 현실을 묵묵히 바라볼 뿐이다. 뇌의 과열된 오작동을 끄고 자아의 한계를 겸손히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동식물과 함께 자연의 대열에 합류하여 우주의 소박한 관찰자로 살아갈 수 있다. 거대한 환각의 먼지를 털어낸 자리에서 만나는 진짜 평온은 무언가를 쉼 없이 채워 넣는 것이 아니라 비워내는 것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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