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존재의 본질과 삶의 기본 조건
▪︎가식과 이상화를 넘어선 직시
인류 역사 전체를 관통해 온 수많은 철학, 종교, 그리고 영성적 담론은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숭고한 의미와 초월적 목적을 부여하고자 노력해 왔다. 다른 동물과 다르게 인간은 영혼을 지닌 특별한 존재이자,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신성한 관찰자로 묘사되어 왔다. 그러나 관념적 이상화를 거두어내고 생물학적, 신경과학적, 물리학적 실상을 정직하게 직시할 때, 우리는 인간 존재가 지닌 근본적인 구조적 조건을 인지하게 된다. 인간은 물리적 법칙에 구속되는 생화학적 유기체이자, 생존과 안전을 위해 정밀하게 설계된 인지적 시스템이다. 따라서 관념적 포장을 배제하고, 인간 존재의 본질과 삶의 기본 조건,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의식의 의미를 논리적 타당성 위에서 객관적으로 살펴본다.
▪︎삶의 기본 조건(생물학적 한계와 생존 메커니즘)
인간이라는 존재의 바탕을 이루는 첫 번째 사실은 우리가 탄소(C), 수소(H), 산소(O), 질소(N) 등 기본 원소로 구성된 단백질 기반의 유기체라는 점이다. 이 생물학적 구조는 인간의 인식과 행동 범위를 규정하는 절대적인 조건으로 작용한다. 이 조건에는 에너지 대사와 생존의 우선성이 매우 중요하다. 인간의 뇌와 신경계는 본질적으로 지속적인 평온이나 추상적 진리 탐구를 위해 최적화된 장치가 아니다. 뇌는 유기체의 생존을 도모하고, 외부 위험을 예측하며,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분배하기 위해 작동한다. 과거의 기억을 반추하고 미래의 불안을 상상하는 뇌의 기본 모드 네트워크(DMN) 역시 위험을 회피하기 위한 진화적 호신바카라이다.
슬롯적 역할과 페르소나(Persona)의 필요성도 결국 인간의 생존과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수단이다. 물리적 몸을 유지하고 경제적, 슬롯적 안정을 확보하기 위해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는 행동 양식, 즉 슬롯적 가면(페르소나)를 발달시켜왔다. 온라인 게임, 가정, 집단 속에서 수행하는 여러 역할과 연기는 유기체가 슬롯적 구조 내에서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합리적 대응 기전이다. 따라서 삶의 대부분이 생존과 안전, 슬롯적 역할 수행에 소비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물리적, 생물학적 현상이다.
▪︎의식의 독특함과 찰나의 섬광
유기체로서의 인간이 가진 독특함은 생존을 위해 발달한 대뇌 피질의 높은 복잡성으로 인해 자신을 객관화하여 관조하는 의식적 자각이 출현했다는 점에 있다. 바로 이러한 의식의 발달에서 일상적인 생존 모드와 추상적 자각 사이의 마찰이 생겨난다. 즉 지속 가능한 상태 대 찰나적 사건 사이에서 혼란이 나타났다. 신경 생화학적으로 도파민, 옥시토신, 엔도르핀 등 깊은 만족감이나 연결감을 제공하는 물질들은 물리적으로 오래 유지되지 않고 빠르게 재수용되거나 분해된다. 따라서 영원히 지속되는 감정적 평온은 신경계의 구조상 성립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의식은 간혹 인간 유기체에 어울리지 않는 섬광의 스파크를 일으킨다. 삶에서 간혹 경험하는 깊은 평화나 행복감, 예술적 감동, 조건 없는 사랑, 타인과의 완전한 교감, 혹은 자신을 초월한 듯한 자각은 뇌에 상주하는 상태라기보다는, 일상적인 생존의 흐름 속에서 찰나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섬광(Spark)과 같다. 인간은 평생 동안 이 드물게 찾아오는 찰나의 순간들을 경험하고, 이를 기억에 담아 일상의 생존 과업을 이겨내는 동력으로 삼는다.
▪︎구조적 한계의 수용과 이차적 고통의 완화
역사적으로 인간은 생로병사와 생계의 무거움이라는 일차적 조건인 고해의 바닷속에서 살아왔다. 이러한 삶의 조건 자체를 부정하거나 완벽히 제거하려는 시도는 도리어 현실과 이상 사이의 격차를 넓혀 심리적 피로 현상인 이차적 고통을 가중시키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외부 권위와 이상적 기대에 대한 경계가 필요하다. 어떤 특정 사상이나 훈련 기법이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을 완전히 초월하여 영원히 동요하지 않는 완벽한 평정 상태를 보장할 수 있다는 주장은 생물학적인 한계를 가진 인간 시스템의 기본 설계를 간과한 것일 수 있다. 인간이 때로 피로를 느끼고, 불안해하며, 생존을 위해 타협하는 것은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생화학적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인간은 지속적인 완전함에 도달해야 한다는 관념적 강박을 내려놓을 때, 역설적으로 깊은 내면의 여백이 생겨난다. 나 자신이 제한된 조건 속에서 발버둥 치는 생물학적 유기체임을 인정하는 순간, 타인 역시 동일한 무게를 짊어지고 역할을 수행해 나가는 연약하고 정직한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가장 정직한 삶의 스탠스
인간 존재의 본질은 무한한 행복이나 완성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한된 생물학적 조건 속에서 생존해 나가면서도 찰나의 아름다움과 자각을 품을 줄 아는 역설적 유연함에 있다. 우리는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먹고 사는 문제, 안전의 확보, 슬롯적 역할의 수행이라는 물리적 법칙에 따라 살아간다. 그리고 그 고단한 생존의 톱니바퀴 사이에서 어쩌다 마주치는 찰나의 평온, 진실한 교감, 순수한 자각의 순간들을 소중히 기억한다. 그런 순간들은 문자 그대로 평생 동안 단지 몇 번 경험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한계를 정직하게 직시하고, 생존을 위한 페르소나의 수행을 삶의 정당한 일부로 받아들이며, 찰나적으로 찾아오는 의식의 빛에 감사하는 태도야말로 관념의 환상을 걷어내고 인간이라는 존재를 가장 온전히 존중하는 정직한 삶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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