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반스앤노블 에코백
서울살이의 시작은 재수생활이었다. 인서울을 목표로 한다면 재수생활부터 인서울을 하는 게 어떻냐는 판단에서였다. 1년 만에 성적이 크게 오르진 않았으나 인서울을 하긴 했으니(무엇보다도 전공과 사랑에 빠졌으니) 절반 이상은 성공한 재수였다. 당시 나는 스스로를 고등학교 4학년이라 부르며 교대역의 한 재수학원으로 통학했다.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인근 대학교의 축제 소리(초청 연예인의 공연 소리)를 들으며 '내년엔 저 소리를 캠퍼스에서 직접 듣겠다'라고 주먹고기를 먹은 적도 있으나, 비슷한 처지의 동갑내기들과 종일 썩 재미있게 지냈다(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게 재미있으면 안 되는 거였는데...).
말이 학원이지 거의 학교였다. 담임 선생님이 있었고, 아침엔 지각자를 단속하는 선생님이 학원 1층을 학주 선생님처럼 지키고 있었다. 신청자에 한해 도시락 급식이 제공되었는데, 점심시간 땐 외출이 금지라 사실상 거의 모든 학생들이 급식을 신청했다. 저녁 급식은 달랐다. 야간자율학습이 말 그대로 '자율'이었기에 저녁을 먹는 학생과 먹지 않는 학생이 있었다. 그 학생들은 또 도시락파, 외식파, 급식파로 나뉘었고. 나는 시간을 아끼자며 저녁에도 급식을 신청했지만 가끔은 서울을, (하다 못해) 학원 주변의 식당가를 탐색하고 싶어 급식을 몇 번 거른 적이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서울 친구들 따라 순댓국과 부대찌개 전문점에 가 보았다(본가에선 자주 먹지 않던 음식들을 먹으니 타향살이가 더욱더 실감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늘 저녁 뭐 먹을까 하는 질문을 친구와 주고받던 중, 한 친구가 솔깃한 제안을 했다. 교대역은 이제 좀 질리니 고속터미널역 푸드코트에 가서 먹고 오는 건 어떠냐는 거였다. 좀 더 본격적인 외출이라니. 공부 빼곤 뭐든 재밌던 재수생(심지어 아홉 시 뉴스까지도 재밌었다)은 친구의 제안을 곧바로 수락했다. 지하철로 한 정거장을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서울살이=재수생활'이라는 공식에 살짝 균열을 낸 기분이었다. 그날 먹은 음식은 철판김치볶음밥. 아는 맛이고 흔한 메뉴였지만 어쩐지 지금도 고속터미널역에 내리면 철판에서 지글지글 익고 있는 밥알이 떠오른다.
에코백 얘기를 하다 말고 웬 재수생활 회고록이냐고? 고속터미널역에 처음 갔던 그날, 나는 입술 가득 번지르르하게 묻은 철판볶음밥의 기름을 냅킨으로 닦아내면서 푸드코트를 나오다가 한 서점을 발견했다. 반디 앤 루니스. 대구엔 없던 서점이었다. 어디서 들어본 듯한 이름인데. 가려운 곳이 제대로 긁히지 않았지만 야자 시작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일단은 교대역으로 복귀하는 데 집중했다. 궁금증을 해결한 건 집으로 가는 셔틀버스 안에서였다. 핸드폰으로 드라마 <꽃보다 남자>를 보려고 이어폰을 챙기는데...
아 맞다, 반스앤노블스(Barnes & Nobles)!
나의 첫 번째 에코백을 만든 미국의 대표 오프라인 서점이었다.
독일로 교환학생을 가기 전까지, 반스앤노블스의 에코백은 내가 가진 유일한 에코백이었다. 엄마의 제자가 미국에서 선물로 보내준 것이었다(함께 여행을 하면서 큰언니처럼 친해진 것도 기뻤는데 선물까지 주다니! 기쁜 마음으로 포장을 뜯었다).
검은색 바탕에 노란색 코튼 캔버스로 꽤 도톰했다(고로 튼튼했다). 안쪽 상단에 미니 포켓과 바닥에 고정판까지 있어 수납력도 좋았다. 앞뒤로 다른 위인의 문구가 영어로 쓰여 있었는데, 그중 한 문구 덕에 미제 느낌이 물씬 났다.
"My best friend is a person who will give me a book I have not read." - Abraham Lincoln
"내가 읽지 않은 바카라을 선물하는 사람이 곧 내 단짝입니다" - 링컨
"When I get a little money I buy books; and if any is left, I buy food and clothes" - Erasmus
"돈이 조금 생기면 바카라부터 삽니다. 그러고도 남으면 음식과 옷을 사지요." - 에라스무스
서점 굿즈 아니랄까 봐, 바카라을 사랑하는 마음이 물씬 느껴지는 말들이 적혀있었다. 레터링이 웬 해리포터의 깃털펜글씨 같기도 해서 무슨 마법 주문서처럼 보이기도 했다(90년생인 나는 <해리포터> 바카라과 영화 모두와 같이 성장한 세대라는 자부심이 크다). 가방에 물건을 넣어 다니면, 그게 바카라이 아니더라도, 왠지 링컨과 에라스무스처럼 똑똑해질 것만 같았다. 순식간에 에코백에 마음을 빼앗겼다.
특히 눈에 들어온 디자인 요소는 링컨이었다. 에라스무스에 관해선 <우신예찬>만 알고 있었지만 링컨은 달랐다. 위인전을 좀처럼 읽지 않던 꼬꼬마 시절의 내가 읽은 몇 안 되는 위인전이 링컨에 관한 것이었고, 엄마와 함께 워싱턴 D.C. 에서 방문했던 메모리얼의 주인도 링컨이었다. 그저 남의 나라 대통령으로 읽기엔 이래저래 연(?)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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