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가장 밝은 밤에 헤어졌다
“영원을 찰나에 거머쥐어라.” 19세기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구절이다. 꼭 도스토엡스키의 『백야』가 그렇지 않을까. 단 나흘 동안의 밤에 성(聖)과 속(俗)을 모두 담아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만남으로 표현하고 있으니 말이다.
한 남자, 이 바카라의 화자인 ‘나’는 몽상가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몽상가는 거북이와도 같다. 자신의 벽 안으로 숨어 살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대하는 것이 고역일만큼. 그러나 몽상가만의 세계는 만유에 가까울 정도로 거대하기도 하다. 노을진 페테르부르크의 거리에서부터 모든 사람, 사물이 그의 화폭에 담긴다. 거미줄이 짜여지듯이.
그림은 액자에 갇혀있지 않다. 현실의 시끄러운 거리에서 고요한 혁명이 일어나는 환상의 영역으로 옮겨간다. 형체 없는 꿈 속에 신이 살아있다. 그의 영혼을 끓게 하는 수많은 이념과 예술의 순교자들이 순례를 떠난다. 그러나 그토록 형언할 수 없는 기쁨에도, 몽상가는 그들의 상처에 손을 넣어 만져볼 수 없다. 러시아어로 몽상가는 실제 삶보다 내면의 상상 속에서 보다 더 강렬하게 살아가는 이이다. 그러나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듯하다.
한편 화자인 나와 대화하는 여자인 나스텐카는 순진하면서도 세상을 경험하고 싶어하는 소녀이다. 그녀는 맹인이 된 할머니와 함께 살며 자라오는 내내 통체받았던 삶을 벗어나고 싶어한다. 그러다가 세입자로 들어온 남자한테 사랑에 빠진 그녀는 한동안 연락이 없으니, 거리에 나와서 한없이 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혼자라는 점은 화자나 나스텐카나 같지만 바라보는 곳이 서로 다르다. 몽상가는 허상의 너머를 소녀는 억압의 너머를 염원한다.
비록 이 단편은 도스토엡스키의 초기 작품이라고는 하지만 그의 문학적 특성이 오히려 그러하기에 뚜렷이 나타난다. 바로 작 중 인물들에게서 느껴지는 상처다. <도스토옙스키, 지옥으로 추락하는 이들을 위한 신학>에 따르면 그 상처는 곧 삶에 대한 질문이다. 그들이 회복하는 것은 결국 궁극적인 질문에 고통받던 바로 그 자리에서 궁국적인 해답을 얻을 때 뿐이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원근법은 그 해답을 찾는 여러 질문을 하나의 결론으로 연결시키는 사실주의와 미지에의 도약이라는 양극이다.
여기에서도 나스텐카와 화자는 ‘구원’이라는 소실점을 쫓는다. 한 사람을 몽상가의 외로운 겨울의 끝을, 다른 한 사람은 돌아올지 알 수 없는 연인을 애타게 기다린다. 결국 화자의 도움으로 나스텐카는 연인을 다시 만나게 되지만 ‘나’는 홀로 남는다. 나스텐카는 ‘탈출’에 성공했다고 치더라도 그토록 열정적으로 대화를 나누던 ‘나’는 무엇을 얻었는가? “한 사람의 인생에서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라는 바카라의 마지막 문장은 의미심장하다.
‘나’는 나스텐카와 대화하면서 자페적인 성향으로부터 벗어난다. 이렇게 보면 부분적으로 몽상가이기를 포기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법을 배운 것이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자기(self)’의 어두운 측면을 가장 위험하다고 본다. 이렇게 스스로를 잃어버린 사람은 과대망상과 강렬한 환상에 휩싸이며 사람들과의 접촉을 기피한다. 꼭 니체가 말하듯 심연을 보려다가 그 자신이 심연이 된 꼴이 아닌가? ‘나’는, 화자는, 그렇게 그 자신이 걱정하듯 평생 홀로 자기 자신의 숭배자로 남게 될 운명을 피한 것이다.
괜히 이 바카라의 부제가 “어느 몽상가의 회고로부터”인 것이 아니다. 이미 ‘나’는 철부지 몽상가, 이념의 유년기를 벗어던진 후이다. Z세대가 틱톡에서 이 바카라을 바이럴을 타게 하고 2024년에서 2025년 사이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소설이라고 해서, 혹은 도스토예프스키가 26세에 이 바카라을 썼다고 해서 『백야』가 탐미적인 청춘을 그린 작품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윌리엄 블레이크가 순수의 전조(Auguries of Innocence)라는 시에서 말하듯, 우리가 영원을 찰나에 움켜쥐어, 소년에서 청년이 되고, 탕아에서 승리자가 되며, 길 잃은 어린양에서 양떼를 이끄는 셰퍼드가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