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내가 가져온 모든 것

디킨슨의 시로 읽은 빨강 머리 앤

bywinterfyellb

『시 26 이건 내가 가져온 모든 것』

(It’s all I have to bring today)

이건 내가 가져온 모든 것-

이것과 옆에 있는 내 마음은-

이것과 내 마음과 모든 들판들-

그리고 광대한 목초지들은-

틀림없이 세어야지-내가 조금이라도

빼놓으면 그 합계가 틀릴 테니-

이것과 내 마음과

클로버가 사는 곳에 있는 모든 꿀벌들을


앤이 에이번리 마을로 처음 올 때 그녀의 가방에 들어 있던 ‘모든 것’은 쌀쌀맞고 무관심한 보육원에서의 외로운 유년기였다. 앤은 자연에 대한 사랑과 아름다운 상상력으로 언어의 연금술을 할 수 있던 소녀였다. 낭만과 작은 것에도 기뻐하는 앤이었지만 자기주장이 강하고 수다스럽기도 해서 마릴라에게 혼나기도 하였다. 에이번리의 마을 사람들은 앤의 쾌활함에 매력을 느끼고 어느새 그녀를 응원하게 된다.


매슈 아저씨, 앤을 마을에 처음 데려왔을 때부터 도와주신 분이 돌아가신 이후로 앤은 소녀에서 성숙한 여인이 되었다. 홀로 남게 된 마릴라를 부양하기 위해 교사를 하기 시작한 앤은 마을을 개선하기 위해 ‘개선 클럽’을 운영하기도 한다.


이후 다시 대학에 돌아오게 된 앤은 어릴적부터 경쟁하기도 하고 서로 응원도 했던 길버트와 다시 만나게 된다. 비가 억세게 내리는 밤, 장티푸스로 길버트가 위독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자신이 길버트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감정을 느끼게 된 앤은 다음날 무사히 회복한 길버트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사랑의 왕국은 영원할 것이고…….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처음에는 사내아이가 아니라서 버려질 뻔한 앤이었지만 앤은 자신의 운명을 억지로 바꾸려 하지 않았고 그녀를 악의로 대하거나 그녀에게 편견을 가지는 사람들에게도 솔직하게 대하며 오히려 사람들이 그녀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그런 앤을 생각하다 보면 에밀리 디킨슨의 26번 시가 떠오른다. “이건 내가 가져온 모든 것”이라고 말하는 화자는 곧 자신의 마음을, 들판을, 광대한 목초지를, 클로버가 피는 곳의 꿀벌까지 하나하나 헤아린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시에서 반복되는 ‘이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끝내 분명하게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만 화자가 자신의 곁에 있는 것들을 하나씩 세어갈수록 처음에는 보잘것없어 보였던 ‘모든 것’의 범위는 마음에서 자연으로, 다시 자신을 둘러싼 세계 전체로 넓어진다.


앤 역시 에이번리에 처음 도착했을 때 가진 것이 많은 아이는 아니었다. 작은 가방 안에는 쌀쌀맞고 무관심한 보육원에서 보낸 외로운 유년기의 흔적밖에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앤에게는 자신에게 주어진 세계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 마음이 있었다. 평범한 풍경에도 이름을 붙이고, 일상의 사건을 상상의 언어로 바꾸며, 자신을 받아준 사람들에게 애정을 돌려준다. 앤이 대화 도중 불쑥 꺼내는 ‘희망의 무덤’ 같은 표현이나, 길버트가 회복했다는 소식을 들으며 어둠 뒤에 환한 햇살이 찾아온다고 느끼는 순간도 그런 감각에서 비롯된다. 일상과 자연은 앤에게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비추고 다시 살아가게 하는 세계이다.


물론 디킨슨과 몽고메리는 서로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 글을 썼다. 그럼에도 평범한 자연과 일상에서 자기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을 언어를 통해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감각은 묘하게 겹쳐 보인다. 디킨슨의 화자가 마음과 들판과 꿀벌까지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려 하듯, 앤 역시 자신에게 찾아온 추억과 행운을 한 아름 끌어안으면서 자신을 받아준 에이번리에 대한 감사와 애정을 잊지 않는다.


어쩌면 그래서 ‘이건 내가 가져온 모든 것’이라는 말은 앤에게도 어울리는지 모른다. 에이번리에 처음 도착했을 때 앤이 손에 들고 있던 것은 작은 가방 하나였다. 하지만 그 작은 가방과 함께 가져온 상상력과 마음은 사람들을 만나고, 상실을 견디고, 사랑을 깨달으며 점점 넓어졌다. 처음에는 작은 가방 하나였지만 마지막에는 ‘사랑의 왕국’을 얻었으니, 젊음은 희망을 머금고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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