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에밀리 디킨슨의 그림 속에서

bywinterfyellb

내가 빈 화폭이 있었더라면, 눈물을 자아애는 초상화를 그렸을 거야. 그 장면은 고독함이 될 거야. 형태들은- 고독함- 그리고 빛과 그림자들, 각각이 하나의 고독이지. 나는 방 하나를 가득 채울 수도 있어. 너무나도 쓸쓸해서 사람들이 그곳에서 잠시 멈춰 눈물을 흘릴 풍경들로. 그리고 그들은 곁에 남은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서둘러 집으로 감사의 발걸음을 옮기게 되겠지.

<내게 빈 화폭이 있었더라면>

(1854년 11월 27일부터 12월 3일까지)

-에밀리 디킨슨이 수전 길버트에게


공해들, 소음들, 빛들, 언어들, 온갖 종류의 시선들 속에 세상은 흘러가며 하루를 채워간다. 오늘날, 빈 화폭과 같은 진공은 그토록 순수해서 연약한 고독만이 존재하는 그런 차원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만일 삶이라는 이 더럽힌 화폭마저도 빼앗기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비가역적 코마>. 심장의 폐위와 두뇌의 대관식이라는 화려한 용어는 심정지가 아닌 두뇌기능의 정지가 죽음의 입증이라는 용어이다.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마일러스 드 케랑갈)는 이러한 최종선고를 받은 시몬 랭브르의 장기 기증까지의 여정을 시적인 르포처럼 써내려간 소설이다.


제목을 얼핏보면 작품내에 묘사되는 엄숙하고 현학적인 표현들이 예상되지 않는다. 그러나 시몬 랭브르의 부모 숀과 마리안이 자식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마비가 된 것처럼 침묵에 갇혀있는 것만큼 고요하면서도 잔인하다.


여기서 시몬 랭브르의 죽음을 다루는 사람들은 랭브르의 부모뿐만은 아니다. 마리안과 숀에게 처음으로 시몬 랭브르의 죽음을 알리는 레볼, 장기 이식 코디네이터 토마 레미주, 그 밖의 여러 간호사들과 의사와 레지던트들의 레퀴엠이 이어진다.


이 과정들에 대한, 감정에 대한 시적 표현들, 사람들과 장소, 시간에 대한 세밀한 어찌보면 현학적이까지 한 미사여구들을 제외하면 그저 일말의 사망 선고에 지나지 않지만, 그 죽음을 여러 인물들의 각도에서 조명한다는 점에서 그 본질을 질문하고 있다.


일상이, 세상이, 계속 흘러감에도, 시몬 랭브르의 육신은, 심장은, 아직도 뛰고 있고 살아 있다해도 그는 생각할 수 없기에 존재할 수 없다. 시몬 랭브르의 죽음은 에밀리 디킨슨의 초상화에서 그의 부모님이나 지인들의 그림자는 될 수 있을지언정 시몬 랭브르라는 인물의 표상은 숀과 마리안의 고독 속에 감춰질 뿐이다.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인 <비가역적 코마>는 한편으로는 지상에 머무는 랭브르의 심장에 미련을 남기면서도 결국 우리의 현현은 영혼에서 완성된다는 어떤 의미에서의 관념론적인 진실을 마주하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철학적 죽음의 두 가지 예시를 떠올리게 된다. 하나는 고통이라는 개념에 천착했던 시몬 베유의 ‘파토스Pathos’이다. 그녀에게 파토스란 죽음에 이르는 고통과 불멸의 존재로의 변모를 모두 의미한다. 이렇게 보면 시몬 랭브르의 죽음이라는 종착지에 이르는 고통을 같이 걷는 가족들이 그 과정을 통과함으로서 정신적으로 새로이 태어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이라는 개념에서는 인간은 탄생과 죽음이라는 두 침묵 사이에서 살고 있다. 이에 따르면 침묵으로서의 죽음은 덧없는 사라짐을 위한 것이되 수동적이고 기계적인 사망 선고가 아니라고 한다. 이는 시몬 베유처럼 죽음이 기계적인 ‘소음’뿐일 수 없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결국 덧없는 사라짐이라는 무의미의 의미라는 리추얼이지만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부여하는 바에 지나지 않는다.


시몬 랭브르의 몸을 온전히 봉합하고 나면, 이것은 덧없는 사라짐일 뿐일까? 가죽만 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몬 랭브르의 죽음, <비가역적 코마>는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이라기보다는 시몬 베유의 고통이라는 되살아남이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죽음은 그를 애도하는 이들로 하여금 불멸하는 사람이 담긴 관에 수선된 몸을 넣도록 하기 때문이다. 디킨슨이 그린 쓸쓸한 고독함의 무리 중에는 시몬 랭브르의 영혼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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