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미술’ 총정리

by와이아트



미술관을 찾다 보면 유독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들이 있다. 1980년대 한국 현대미술의 중요한 흐름인 ‘민중미술’도 그중 하나다. 그러나 이미지가 지닌 힘이 워낙 강하다 보니, 작품이 등장한 배경이나 작가들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는 차분히 들여다볼 기회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이번 글에서는 민중미술이 어떻게 시작되어 어떤 흐름으로 전개되었는지 살펴보며 한국 현대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읽어보고자 한다.


손장섭 중앙청.jpeg손장섭, <중앙청>, 1984. (출처: 서울시립미술관)




민중미술의 시작


민중을 중심으로 한 문화운동은 본래 문학에서 먼저 시도되었다. 1970년에 발표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같은 작품이 그 예이다. 이 시기에는 노동자를 주제로 하는 작품을 포함해 김지하의 시 「오적」 등이 널리 읽히는 등 고유한 민족문화를 추구하는 움직임이 거세졌고,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이러한 추세가 더욱 강해졌다.


오윤, <도깨비>, 1985. (출처: 가나아트)


미술에서는 1979년 12월에 결성된 ‘현실과 발언’을 민중미술의 시초로 본다. ‘현실과 발언’의 전신은 1969년에 결성된 ‘현실동인’이다. ‘현실동인’은 서울대에 재학 중이던 오윤, 임세택, 오경이 「현실동인 제1선언」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으나, 활동을 지속하지는 못했다.


‘현실과 발언’의 첫 전시는 1980년 10월 문예진흥원 미술회관(현 아르코미술관)에서 개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전시 개막일에 미술회관 측이 시국에 맞지 않는 전시라는 이유로 취소하고 전기를 꺼버리자, 촛불을 켜고 작품을 관람하기도 했다.


‘현실과 발언’ 그룹의 작가들은 1970년대 ‘단색화’가 현실을 도외시하고 삶을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에 위선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산업화와 도시화로 피폐해진 농촌에 주목하고, 급속도로 성장한 한국 슬롯의 이면을 보여주고자 했다.


image.jpg오윤, 〈도깨비〉목판 (출처: 서울시립미술관)


‘현실과 발언’ 작가들은 기존의 유화 외에 포스터, 만화, 사진, 벽화, 판화, 사진 몽타주 등을 활용해 대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들의 작업에서 보이는 투박하고 사실적인 묘사는 단색화에 익숙했던 사람들에게 커다란 반전으로 다가왔다.


“돌아보면 우리의 미술문화는 아직도 순수주의의 이름으로 현실도피적이고 형식유희적인 실험이나 복고적 전통주의에 젖어 있으며, 삶의 진실과 그 역동성을 체계적으로 소외시키는 피폐한 상업주의 내지 고급문화의 틀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외래문화에의 오염과 맹목적 사대주의의 청산도 아직 요원한 채로 있다.”
- ‘현실과 발언’ 동인(1985)


김정헌.jpg김정헌, <풍요한 생활을 창조하는-럭키 모노륨>, 1981. (출처: 서울시립미술관)


김정헌의 위 작품을 보면, 아파트 거실 공간에 전통적인 온돌 장판 대신 당시 새로 나온 럭키(현 LG)의 플라스틱류 모노륨이 깔려 있다. 화면 위쪽에는 중산층을 겨냥한 세련되고 깔끔한 신제품 가구가 보이지만, 화면 아래쪽에는 흑백으로 그린 농민을 대조적으로 배치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도시의 중산층이 누리는 풍요로움을 누리지 못하는 농민들의 현실과 세태를 표현했다.


스크린샷 2025-06-01 오후 3.21.20.png오윤, <마케팅 Ⅰ: 지옥도>, 1980.


자본주의와 소비슬롯에 대한 부정적인 사고는 오윤의 작품에서도 잘 드러난다. 작가는 불화를 참조해 해학과 풍자를 작품에 적극 도입했다. <마케팅 Ⅰ: 지옥도>를 보면 빨강 바탕에 한자로 지옥 이름이 표시되어 있다. 우측 하단에 보이는 ‘화탕(火湯) 지옥’에서는 죄인을 집어넣는 끓는 물 앞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인물들이 형틀에 갇혀 있다. 이들은 ‘현실과 발언’ 회원인 주재환과 손장섭이다. 또한 왼쪽의 ‘석개(石蓋) 지옥’ 위에서 형틀에 죄이고 있는 인물들은 윤범모, 성완경, 원동석, 오윤이다.


화면 오른쪽 위에는 죽은 인간을 지옥에서 구원해주는 지장보살이 손에 도끼를 쥔 채 팔짱을 끼고 있어 이들에게 구원의 희망이 없음을 시사한다. <마케팅>이라는 작품 제목이나 미국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코카콜라, 맥심 같은 광고 글귀는 지옥에서조차 무방비적으로 범람하는 수입 제품들의 광고가 판을 치고 있음을 풍자한다.


오윤-_-마케팅-지옥도-1-캔버스에-혼합재료-162x131cm-1980.jpg오윤, <마케팅 Ⅴ: 지옥도>, 1981.


<마케팅 Ⅴ: 지옥도>의 하단을 보면 형틀에 묶여 움직이지 못하는 인간의 혀를 길게 늘어뜨려 소가 그 위에서 쟁기질을 하게 하는 ‘발설(拔舌) 지옥’의 장면이 보인다. 그리고 화면 중앙에는 맛기차, 바밤바, 코카콜라 등 아이스크림 광고가 있는 ‘한빙(寒氷) 지옥’이 있다. 한빙지옥은 한빙협곡이라 하는 엄청난 크기의 빙하가 있는 지옥으로, 송제대왕의 심판에 통과하지 못한 중생들이 떨어지는 지옥이다. 여기에 ‘먹어라 콘’ 아이스크림 광고를 입힌 모습이다.


또한 오른쪽 상단에는 망자의 죄업을 비추는 거울인 ‘업경대(業鏡臺)’가 있는데, 불길이 차오르는 거울을 자세히 보면 베레모를 쓴 화가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이 나타난다. 그림은 마치 박서보의 ‘묘법’과 같이 몇 개의 획만이 그려져 있는 모습이다. 맨 아래에는 “소비의 창조, 과학인가 예술인가”라는 광고 카피가 쓰여 있다. 민중미술을 대표하는 화가인 오윤은 불화의 지옥도 형식을 빌려 광고 이미지를 덧입힘으로써 자본주의의 무차별적인 광고가 일상에 스며들어 있으며, 이에 무방비로 노출된 현실을 고발했다.


“이 지옥도는 일종의 가상이면서도 결코 가상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만약 그들[자본주의자]이 시공을 넘어 지옥에 갈 수 있다면 곧 연옥의 불길을 대체 에너지로 공급할 것이고, 물론 지옥의 미업무용 토지를 불하하려 할 것이고, 환생보험회사를 만들 것이고, 귀졸들에게 콜라 마크가 달린 제복을 입힐 것이다.”
- 오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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