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소리를 들은 화가, 곽인식

by와이아트



곽인식의 작품을 처음 보면 아주 조용하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깨진 유리, 금속판, 돌, 종이 위의 점들은 마치 오래 침묵해온 사물이 천천히 말을 걸어오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는 무언가를 강하게 표현하려 하기보다 사물이 스스로 드러내는 성질과 반응, 그리고 그 안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변화를 끝까지 바라본 예술가였다.


곽인식은 일본의 모노하와 한국 단색화의 흐름을 이야기할 때 자주 함께 언급되지만, 그의 작업을 단지 어떤 사조의 선구나 영향 관계로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는 유리, 놋쇠, 철판, 돌, 종이 같은 사물과 오랫동안 마주하며, 그것들이 가진 물성과 시간, 균열과 번짐의 언어를 탐구했다. 이번 글에서는 곽인식의 예술세계를 ‘사물을 매개로 한 회화’라는 관점에서 다시 살펴보고자 한다.


Image.JPG곽인식, <87-A1>, 1987. (출처: RM 인스타그램)


방탄소년단 RM이 소장한 것으로도 잘 알려진 <87-A1>은 곽인식 후기 작품에 속하는데. 작가는 작고 전까지 ‘종이’라는 표면 위에 예술세계를 펼쳤다. 사진 상으로는 아주 잘 드러나지 않지만 실제로 보시면 물감이 번지는 모습이 오묘하다.


이 작품을 좀 더 깊이 감상하기 위해서는 제작 과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동양화의 채색 기법 중 하나인 배채법(背彩法)에 대해 먼저 알 필요가 있다.


‘배채법’는 그림의 뒷면에 채색하여 그것이 앞면에 반투명 상태로 비치게 하는 채색 기법을 말한다. ‘양면착색법’으로도 불린다. 배채법을 사용하면 앞면에서 볼 때 음영과 채색이 보강되면서 깊이감과 사실성을 동시에 구현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 고려 불화와 조선시대 초상화에 사용되었는데, 얼굴 피부의 미묘한 색을 내는 데 적합했다. 동양화의 전통에서는 겉으로 드러난 외양만이 아니라 대상의 정신까지 담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배채는 대상의 내면을 중시하는 동양화론과 잘 맞아떨어지는 기법이기도 하다.


곽인식 또한 동양화의 기법 중 하나를 자신의 회화에 적용했는데, 그림의 뒷면에 채색을 해서 앞면에 색이 은은하게 비쳐 나오는 효과를 자아냈다. 동일한 농도의 먹을 머금은 붓을 뒷면에다가 찍음으로써 앞면에 비치는 점의 채도가 미세하게 달라지며 은은한 효과를 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배채법으로 표현한 점들 위에 다시 채색을 한 모습도 보인다.


곽인식, <작품 83-B>, 1983.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물론 배채법은 닥종이 등 동양의 재료를 이용해야 효과를 낼 수 있다. 서양의 종이는 뒤편에 채색을 해도 앞면에 그 빛깔이 올라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동양의 방식을 차용해 색을 표현해낸 것이 인상 깊다.




곽인식(郭仁植, 1919~1988)은 1960년대 후반 일본의 모노하(もの派)와 1970년대 한국의 단색화 운동을 논할 때 함께 언급되는 재일작가이다. 모노하는 ‘모노(もの)’에 대한 탐구를 통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보여주고자 한 일본의 미술 경향이다. 곽인식은 모노하와 단색화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는 작가로 볼 수 있다.


그를 단지 모노하의 선구이거나 단색화에 영향을 준 작가라고 보는 입장도 있지만, 곽인식의 작품은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곽인식은 1930년대부터 1988년 작고 전까지 구상화, 초현실주의 경향, 앵포르멜과 모노크롬 회화, 추상화 등 다양한 장르를 선보였다. 그의 삶과 예술세계에 대해 함께 살펴보자.


곽인식의 삶과 예술세계


곽인식은 1919년 경상북도 달성군 현풍면에서 태어났다. 집안의 가장이었던 조부 곽종래는 대지주이자 지역 슬롯의 큰 어른이었다. 곽종래의 장남이자 곽인식의 큰아버지였던 곽수덕은 현풍고등학교를 설립한 한학자였고, 화가 이쾌대가 그의 외척이었다. 풍족한 선비 집안에서 자란 곽인식은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그리며 자유롭게 성장할 수 있었다.


곽인식은 현풍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을 떠나 종로에 있는 YMCA 부속 청년학관에 들어간다. 이곳은 신식 교육을 받은 조선인과 외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던 교육기관이었는데, 곽인식은 이곳에서 기초 학문과 직업 교육, 어학 교육 등을 받은 뒤 1937년 형 곽원식이 체류하고 있던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유학을 택했던 이유는 와세다대학교 부속 와세다제2고보에서 중등교육을 마치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보통학교 시절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미술학교 예과에 입학했다.


도판 01-side.jpg(좌) 곽인식, <모던걸>, 1940, 캔버스에 유채. (우) 곽인식, <미완성>, 1937, 캔버스에 유채.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곽인식은 1940년 제10회 《독립미술협회전》에 <모던걸>을 출품해 입선하고, 연이어 제11회 《독립미술협회전》에서도 <미완성>으로 상을 받았다. 위의 사진 중 <인물(남)>은 데뷔 전 작품이다. 곽인식의 초기작은 당시 대학 교수들에게 영향을 받아 아카데믹한 화풍이 나타난다.


하지만 곽인식도 전쟁을 피해갈 수 없었다. 형이 정치적 이유로 살해 위협을 받고, 부인은 전쟁통에 사망하고, 가세도 기우는 등 어려운 생활을 이어나가게 된다. 그럼에도 일본 고베시 나가타구에 정착해 고무 구두 수선공 등의 일을 하며 작품 활동을 지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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