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에 한 줄이라도 더 긋고 싶다.
박서보는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가이다. 70여 년에 달하는 그의 화업이 곧 한국 현대미술을 설명하는 키워드가 되기 때문이다. 박서보는 1931년에 태어나 홍익대 서양학과를 졸업한 뒤 1950년대 앵포르멜 운동을 이끌었고, 1970년대부터 캔버스에 선을 긋는 ‘묘법(escrite)’ 연작으로 단색화의 대표 화가로 불리며 활동을 지속해왔다.
박서보는 일제강점기인 1931년에 경상북도 예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법률 업무를 담당하던 공무원이었고, 모친은 경북 지역에서 유명한 치료제 상표였던 ‘본포 남-고약’을 개발한 가문의 막내딸이었다. 박서보는 공직자였던 부친과 부유했던 외가의 영향으로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으나, 한국전쟁 시기 부친이 사망한 뒤 가세가 급격하게 기울어 이후로는 자신의 힘으로 삶을 개척해 나가게 된다.
박서보는 경기도 안성에 거주하던 때 동양화가인 김은호를 만나 그의 그림을 모사하며 화가로서의 재능을 발견한다. 미술대학에 입학하고자 했지만 부모님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고, 결국 끈질기게 부모님을 설득한 끝에 결국 1950년 홍익대학교 미술학부에 입학하게 된다. 하지만 입학 석 달 만에 한국전쟁이 발발해 학업을 중단하고 부산으로 피란을 갔고, 이때 홍익대 서양화과 교수로 재직 중이던 김환기를 만난다. 이때 김환기에게 배운 내용들은 훗날 박서보의 작업세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전쟁이 끝난 뒤 부산에서 서울로 돌아간 박서보는 미군 병사의 얼굴을 스케치해 판매하면서 생활을 이어갔다. 1954년 대학 재학 중에 그린 <누드>와 <해바라기>는 김환기에게 호평을 받고 제3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입선을 하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동아일보 지면에 삽화를 그리며 생계를 유지해나갔다. 그는 ‘추상’ 미술의 대가이지만 이때 그린 그림을 보면 ‘구상’ 작가로서의 자질과 경험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박서보는 대학 스승인 이봉상의 권유로 ‘이봉상미술연구소’에 합류한다. 이곳은 박서보의 초기 작품 구축에 많은 영향을 미친 곳이자, 한국 추상미술의 발전에 모태가 된 장소이기도 하다. 그는 이곳에서 서구의 새로운 미술 사조를 접하고, 한국 현대미술의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논의를 이어나간다. 또 연구소 생활 중 학생으로 있었던 윤명숙(1939~)을 만나 결혼하게 된다.
박서보가 이봉상미술연구소를 거쳐 작가로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1957년의 한국은 전쟁으로 인해 참담하고 피폐한 시기였다. 미술계에서는 보수적인 ‘국전’에 반대하는 운동이 일었고, 이러한 분위기와 함께 기존의 미(美)에 대한 가치를 뒤집는 표현들이 등장했다.
앵포르멜(Informel)은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서 등장한 예술이었다. 불어로 ‘비정형’을 뜻하는 앵포르멜은 한 마디로 “정형성을 거부한다”라는 의미로, 제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새로운 회화운동을 뜻한다. 당시 유럽은 전쟁 후 근본적인 허무감과 좌절감이 팽배해 있던 상황이었으며, 미술계에서도 자발성, 형태의 자유로움, 실존적 문제에 대한 고민 등이 나타나면서 예술가의 사고와 감정을 표현하는 앵포르멜 경향이 나타났다.
앵포르멜은 프랑스에서 일어난 운동이지만, 박서보는 이미 한국에서부터 현대미술가협회를 중심으로 하여 한국의 앵포르멜 미술 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다 1961년에 1년 가까이 프랑스에 체류하는 동안 프랑스의 앵포르멜 미술을 좀 더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유네스코 산하의 비영리 기구가 주최한 ‘세계청년미술가회의’ 한국 대표로 선발되어 프랑스를 방문하게 된 것이다.
박서보는 프랑스 앵포르멜을 수용하지 않았다고 인터뷰를 통해 여러 차례 밝혔지만, 그럼에도 이 기간 동안 이브 클랭(Yves Klein) 같은 작가에게는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읽힌다. 클랭은 누보 레알리즘의 창시자로, ‘현실의 직접적인 제시’라는 새롭고 적극적인 방법을 추구했던 미술가이다. 클랭은 사람의 몸을 ‘붓’처럼 이용해 몸을 찍어낸 <인체 측정>과 같은 작품을 선보였다.
* 잠깐! 누보 레알리즘(Nouveau Réalisme)이란?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