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집 임장하러 가는 길에 전 소개팅녀를 봤다
민재는 8억 2천이라는 숫자를 세 번째 보고 있었다.
부동산 유리창에는 비슷한 종이들이 빼곡하게 붙어 있었다.
84㎡. 남서향. 중층. 시스템에어컨 4대. 올수리. 8억 2천.
그 옆에는 같은 평형 저층이 7억 8천, 탑층이 8억 5천이었다.
민재는 팔짱을 낀 채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나는 8억 넘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은서가 휴대전화 계산기에서 눈을 들었다.
“우리가 잡아놓은 상한이 8억 3천이잖아.”
“상한은 상한이지. 꼭 거기까지 쓰자는 건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은서는 다시 화면을 내려다봤다.
“근데 여기보다 싼 데로 가면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돼. 연식이나 출퇴근.”
민재도 알고 있었다. 지난 두 달 동안 본 아파트만 열한 군데였다.
새 아파트는 멀었고, 가까운 아파트는 낡았다.
둘의 온라인 게임 중간쯤에 있으면서 연식이 짧고 생활권까지 괜찮은 곳은 비쌌다.
은서는 그중 이 단지를 가장 마음에 들어 했다.
역까지 걸어서 십 분 남짓.
대형마트는 차로 오 분.
초등학교를 끼고 있었고 단지 안은 평지였다.
은서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가 학교에 혼자 걸어갈 때 횡단보도를 몇 번 건너야 하는지까지 세어봤다.
민재가 보기에도 합리적이었다.
다만 8억이라는 숫자가 싫었다.
“7억대랑 8억대는 느낌이 다르잖아.”
은서가 웃었다.
“집을 느낌으로 사?”
“그런 뜻이 아니라.”
“알아.”
은서는 민재의 팔을 잡아끌었다.
“일단 단지나 한 바퀴 돌자. 본다고 돈 드는 것도 아니고.”
둘은 중개사에게 연락처를 남기고 밖으로 나왔다.
토요일 오후였다.
단지 정문 앞으로 난 왕복 육차선 도로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
유모차를 미는 부부, 장바구니를 든 노부부, 태권도복을 입은 아이들이 한데 섞여 있었다.
민재는 맞은편 아파트를 올려다봤다.
동과 동 사이가 생각보다 넓었다.
외벽도 사진으로 봤을 때보다 깨끗했다.
“저기 로열동이래.”
은서가 오른쪽을 가리켰다.
“학교 안고 있고 남향이라 저쪽이 제일 비싸대.”
“그런 것도 알아봤어?”
“당연하지.”
“무섭다, 진짜.”
“너는 집 사러 와서 뭘 알아본 건데?”
민재가 대답하려는 순간 보행자 신호가 켜졌다.
맞은편에서 사람들이 건너오기 시작했다.
민재는 처음에는 여자를 보지 못했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남자였다.
키가 컸다.
회색 반팔 티셔츠에 검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한 손에는 흰색 종량제 봉투가 들려 있었다.
민재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남자의 손목으로 내려갔다.
시계는 없었다.
검은 스마트워치 하나.
그다음 옆에 있는 여자를 봤다.
걸음이 아주 조금 느려졌다.
유진이었다.
민재는 거의 동시에 확신했다.
머리가 짧아졌다.
3년 전에는 어깨 아래까지 내려왔는데 지금은 턱선 언저리에서 끝났다.
화장도 거의 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왼손에는 장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대파가 비닐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민재는 아는 체를 할지 잠깐 고민했다.
안녕하세요도 이상했고, 오랜만이네도 이상했다.
소개팅으로 두 번 만난 사이였다.
누구에게 먼저 소개해야 하는지도 애매했다.
이쪽은 결혼할 여자와 집을 보러 가는 중이고, 저쪽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있었다.
남편일까.
남자친구일까.
그 생각을 하는 사이 거리가 너무 가까워졌다.
민재는 시선을 살짝 옆으로 돌렸다.
그냥 지나쳤다.
유진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민재는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맞은편 인도에 도착한 뒤 휴대전화 화면이 꺼져 있는 것을 확인하는 척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유리로 된 버스정류장 벽을 봤다.
희미하게 뒤쪽이 비쳤다.
유진과 남자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남자가 유진의 손에서 장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유진은 빈손이 되자 자연스럽게 남자의 손을 잡았다.
민재는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남편인 것 같았다.
“뭐 봐?”
은서가 물었다.
“아니.”
민재는 단지 정문 쪽으로 걸었다.
조금 전 두 사람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떠올렸다.
정문 쪽은 아니었다.
아파트 안쪽에서 횡단보도로 걸어 나온 것 같았다.
거주민일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지나가던 사람일 수도 있었다.
민재는 굳이 생각을 이어가지 않았다.
“여기 생각보다 괜찮지 않아?”
은서가 말했다.
“응.”
“사진보다 낫지?”
“그러네.”
단지 안으로 들어가자 어린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다.
중앙광장에는 유모차를 끌고 나온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은서는 조경과 놀이터를 봤고 민재는 동 번호를 봤다.
103동.
105동.
108동.
아까 유진은 어느 쪽에서 나왔을까.
그걸 왜 궁금해하는지 스스로도 잘 몰랐다.
“저기가 학교 붙은 동인가 봐.”
은서가 말했다.
민재가 고개를 들었다.
110동이었다.
“저기가 제일 비싸다며?”
“응. 같은 평형도 몇 천 더 비싸대.”
민재는 110동을 한번 올려다봤다.
고층 베란다에 빨래가 널려 있었다.
아래층에서는 어떤 남자가 창문을 닦고 있었다.
평범한 아파트였다.
유진이 여기 산다는 사실 때문에 특별해질 이유는 없었다.
사실 산다는 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민재는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둘은 단지를 한 바퀴 돌고 다시 중개사무소로 돌아왔다.
중개사는 다른 손님과 통화하고 있었다.
“네. 보증금 삼천에 백구십이요. 그건 집주인분이 더 내리기는 어렵다고 하시네요.”
은서는 소파에 앉자마자 휴대전화를 꺼냈다.
“아까 본 8억 2천짜리 있잖아.”
“응.”
“그게 108동이래.”
“응.”
“학교 쪽은 아니어도 남향이고 중층이면 괜찮은 것 같아.”
민재는 벽에 붙은 단지 배치도를 보고 있었다.
110동이 눈에 들어왔다.
괜히 물었다.
“여기 월세도 많나?”
은서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있겠지.”
“실거주 많은 단지라며.”
“실거주 많다고 세입자가 없겠어?”
그때 중개사가 통화를 끝냈다.
“기다리셨죠?”
은서가 말했다.
“아까 84 타입 한번 보고 싶어서요.”
“8억 2천짜리?”
“네.”
중개사가 열쇠함 앞으로 갔다.
민재가 물었다.
“사장님, 여기 월세도 좀 있어요?”
중개사가 열쇠를 찾으며 대답했다.
“많지는 않아요. 워낙 실거주가 많은 단지라. 전세가 더 많고.”
“84도 있고요?”
“있죠.”
민재는 배치도를 보며 말했다.
“아까 단지에서 아는 사람 비슷한 사람을 봐서.”
은서가 민재를 바라봤다.
“아는 사람?”
“확실한 건 아니고.”
“누군데?”
“예전에 알던 사람.”
은서는 별 관심 없이 다시 휴대전화를 봤다.
민재가 중개사에게 물었다.
“110동도 임대 물건 있어요?”
“110동이요?”
중개사가 열쇠 하나를 꺼냈다.
“있죠. 거기 월세 하나 얼마 전에 계약됐는데.”
민재가 고개를 들었다.
“얼마예요?”
“어느 평형?”
“84요.”
중개사가 잠시 생각했다.
“84면 보증금 5천에 이백 중반쯤 했던 것 같은데.”
민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뿐이었다.
유진이 110동에 사는지도 몰랐다.
84에 사는지도 몰랐다.
자가인지 전세인지 월세인지도 당연히 몰랐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은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 보러 가자.”
민재도 일어났다.
중개사가 문을 열었다.
민재는 나가려다가 유리창에 붙은 매물을 다시 봤다.
8억 2천.
조금 전까지는 굳이 여기까지 돈을 써야 하나 싶었다.
은서가 말했다.
“그래도 8억 넘는 건 부담되면 솔직하게 말해. 오늘 보고 다른 데 더 봐도 돼.”
민재는 잠깐 매물 종이를 바라봤다.
“아냐.”
“괜찮겠어?”
“일단 봐보자.”
밖으로 나가며 민재가 덧붙였다.
“조건 좋으면 8억 초반 정도는 쓸 수 있지.”
은서가 웃었다.
“한 시간 만에 8억대 진입했네.”
“뭘 또 그렇게 말해.”
민재도 웃었다.
자신도 이유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민재는 자기도 왜 이 아파트를 골랐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회사까지 멀지 않았고, 지은 지도 오래되지 않았다.
근처에 학교도 있었다.
무엇보다 은서가 마음에 들어 했다.
가격도 둘이 정해 둔 선을 넘지 않았다.
그 정도면 이유는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