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에는 더 좋은 데 -유진의 이야기
이번 화는 잠시 유진의 이야기입니다.
3년 전, 유진과 민재가 소개팅한 날로 돌아갑니다.
민재와 은서의 이야기는 13화부터 멤버십으로 이어집니다.
유진은 메뉴판을 덮었다가 다시 펼쳤다.
파스타 하나가 삼만 원을 넘었다. 아래쪽에는 이름만으로는 무슨 음식인지 알기 어려운 메뉴들이 있었다.
소개해준 선배에게는 편하게 밥 먹을 사람이면 된다고 했다. 선배는 그 사람도 편한 사람이라고 했다.
식당은 별로 편하지 않았다.
유진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약속 시간까지는 십 분쯤 남아 있었다.
— 저 먼저 와 있어요.
메시지를 보내자 곧 답이 왔다.
— 벌써 오셨어요? 저도 거의 다 왔습니다.
유진은 유리창에 비친 머리를 손으로 눌렀다. 집에서는 괜찮았는데 밖에 나오니 한쪽 끝이 자꾸 뻗쳤다.
선배와 나눈 대화가 위에 남아 있었다.
— 회사 어디라고 했지?
자기가 보낸 말이었다.
유진은 대화창을 닫았다.
잠시 뒤 입구에서 남자가 두리번거렸다. 사진보다 인상이 부드러웠다.
유진이 손을 조금 들자 남자가 다가왔다.
“유진 씨?”
“네. 민재 씨죠?”
“제가 늦었네요.”
“아니에요. 제가 일찍 왔어요.”
민재는 앉기 전에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약속 시간 전이었다.
“그래도 먼저 오셨으니까.”
유진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민재도 재킷을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었다.
처음 몇 분은 선배 이야기를 했다. 어떻게 알게 됐는지, 요즘도 자주 만나는지. 둘 다 선배가 약속 시간에 늦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저한테는 항상 다 왔다고 해요.”
유진이 말하자 민재가 고개를 들었다.
“형한테 다 왔다는 건 출발했다는 뜻인데.”
“저도 두 번쯤 보고 알았어요.”
그때부터 조금 편해졌다.
메뉴 고를 때 민재는 못 먹는 음식이 있는지 물었다. 유진이 해산물을 좋아한다고 하자 메뉴판을 같이 봤다.
음식 두 개를 주문하고 나니 더 할 일이 없었다.
유진은 물잔을 만졌다.
민재가 먼저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꺼냈다. 회의 중에 화면을 공유했는데 동료가 보낸 메시지가 그대로 떴다고 했다.
“뭐라고 왔는데요?”
“언제 끝나냐고.”
“누가 보냈는지도 나왔어요?”
“네. 근데 걔가 회의 진행하고 있었거든요.”
유진은 마시려던 물을 내려놓았다.
“자기가 끝내면 되잖아요.”
“그러니까요.”
음식이 나오고 나서는 유진이 자기 팀 이야기를 했다. 업무를 설명하다가 너무 길어진 것 같아 말을 줄였는데, 민재가 그럼 그 일은 결국 누가 맡았느냐고 물었다.
유진은 젓가락을 다시 내려놓고 뒷이야기를 했다.
첫 접시가 비었을 때는 더 이상 시간을 확인하지 않았다.
민재는 생각보다 잘 웃었다. 웃을 때 한쪽 눈이 조금 더 가늘어졌다. 유진이 농담을 하면 잠깐 진지하게 듣다가 뒤늦게 웃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회사 분위기는 괜찮으신 것 같아요.”
유진이 말했다.
“그냥 그렇죠. 사람은 괜찮고. 대우도 동종 업계에서는 괜찮은 편이고요.”
“그러면 오래 다니실 생각이에요?”
“일단은요. 유진 씨는요?”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다만 가끔 민재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말을 덧붙였다.
주말에 운동한다는 이야기 뒤에는 헬스장이 회사 지원이라 거의 돈이 들지 않는다는 설명이 붙었다. 휴가 때 가까운 곳에 다녀왔다는 말 뒤에는 올해는 일이 많아서 멀리 못 갔다는 말이 따라왔다.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자기도 아까 회사 이름을 말하고는 본사가 어디에 있는지까지 설명했다. 민재가 묻지도 않았는데.
소개팅은 원래 그런 자리인 것 같았다.
접시를 치우러 온 직원에게 유진이 음식이 맛있었다고 말했다.
직원이 물러나자 민재가 물었다.
“괜찮으셨어요?”
“네. 특히 이거요.”
유진은 소스만 남은 접시를 가리켰다.
“다행이네요. 원래 가려던 곳은 따로 있었는데 예약이 안 돼서.”
“여기도 좋은데요.”
“거기는 좀 더 조용해요.”
“저는 이 정도가 편해요. 너무 조용하면 말하는 거 다 들리잖아요.”
민재가 주위를 한번 보고 웃었다.
“그건 그렇네요.”
식당을 나올 때는 민재가 계산했다.
유진이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자 이미 카드가 직원에게 넘어가 있었다.
“오늘은 제가 살게요.”
“그럼 다음에는 제가 살게요.”
말하고 나서 유진은 지갑을 천천히 넣었다.
민재가 돌아봤다.
“다음에도 만나주시는 거예요?”
유진은 잠깐 민재를 바라봤다.
“네.”
민재는 그제야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두 번째 식당은 유진이 골랐다.
친구와 몇 번 갔던 작은 이탈리안 식당이었다.
테이블이 여섯 개쯤 있었고, 벽 쪽 자리에는 의자 대신 긴 벤치가 놓여 있었다.
음식도 괜찮았지만 오래 앉아 있어도 재촉하지 않는 게 좋았다.
밥을 먹고 나오면 옆 골목으로 걸을 수 있었다.
유진은 식당 위치를 보냈다.
— 이번에는 여기 어때요? 제가 좋아하는 데예요.
민재는 좋다고 했다.
약속은 금요일 저녁으로 잡았다.
당일 오후, 회의를 마치고 나오니 메시지가 와 있었다.
— 거기 예약이 안 되네요.
— 금요일에는 대기 길 수도 있다고 해서 근처 다른 데 예약했어요.
새로 온 링크를 열었다.
테이블마다 하얀 천이 깔린 식당이었다. 창가 자리 사진과 함께 기념일 코스와 예약 안내가 떠 있었다.
유진은 입력창을 눌렀다.
거기 회전 빨라서 괜찮은데.
쓰고 나서 지웠다.
이미 예약했다는 사람에게 굳이 취소하라고 할 일은 아니었다.
— 고마워요. 이따 봬요.
답을 보내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날 민재는 먼저 와 있었다.
유진을 보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많이 막혔죠?”
“버스가 좀 밀렸어요.”
“금요일이라.”
유진이 앉자 민재는 테이블 옆에 세워둔 작은 종이 가방을 건넸다.
“이거.”
안에는 목캔디 두 봉지가 들어 있었다.
유진이 지난번에 회사에서 전화를 많이 받아 목이 아프다고 했었다.
“회사 앞에 팔길래요.”
“이걸 기억했어요?”
“아까도 회의하셨다면서요.”
유진은 가방 안을 다시 봤다.
두 가지 맛이었다.
“제가 무슨 맛 좋아하는지 몰라서요.”
“둘 다 좋아해요.”
이번에는 생각할 필요 없이 나온 대답이었다.
유진은 종이 가방을 자기 가방 옆에 놓았다.
음식을 주문하고 나서는 지난번보다 이야기가 빨리 시작됐다.
민재는 화면을 공유했던 동료의 근황을 알려줬다. 유진은 웃다가 기침을 했고, 민재가 종이 가방을 가리켰다.
“벌써 필요하신데.”
“밥 먹기 전에 먹어도 되나.”
“디저트라고 생각하시죠.”
유진은 웃으며 물을 마셨다.
처음에는 바뀐 식당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조명이 조금 어둡고 직원이 물잔을 자주 채워준다는 것 말고는 특별히 불편할 게 없었다.
음식이 나왔을 때 유진은 자기가 원래 가자고 했던 식당 이야기를 꺼냈다.
“거기는 사장님이 음식을 혼자 하시거든요. 그래서 메뉴마다 나오는 시간이 좀 달라요.”
“오래 걸려요?”
“그 정도는 아닌데, 전에 친구랑 갔다가 밥 다 먹고도 한참 있었어요. 디저트 나올 때까지 시간이 걸려서.”
민재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거기가 더 편하셨을 텐데.”
“네?”
“제가 잡은 데는 좀 불편하세요?”
“아니에요.”
유진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뜻이 아니라, 거기서 친구랑 얘기했던 게 생각나서요.”
“아.”
“여기도 좋아요. 음식도 맛있고.”
민재는 접시를 한번 보더니 말했다.
“다행이네요. 사진만 보고 골라서.”
유진은 웃고 포크를 들었다.
친구 이야기는 거기서 끝났다.
친구가 그날 무슨 말을 했는지까지 이야기하려던 참이었다. 다시 시작하기에는 조금 늦은 것 같았다.
민재가 주말에 뭘 하느냐고 물었다.
유진은 빨래해야 한다고 답했다.
민재도 밀린 빨래가 있다고 했다.
둘은 잠깐 빨래가 얼마나 밀렸는지 이야기했다.
식사를 마친 뒤 유진은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에 계산했다.
예상한 것보다는 많이 나왔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지난번에는 민재가 더 많이 냈고, 오늘은 자신이 사겠다고 했다.
자리로 돌아오자 민재가 지갑을 꺼냈다.
“계산했어요.”
민재의 손이 멈췄다.
“벌써요?”
“제가 사기로 했잖아요.”
“여기 생각보다 많이 나오는데.”
“저도 밥 살 수 있어요.”
유진이 웃으며 말하자 민재도 웃었다.
“그런 뜻은 아니고요.”
밖으로 나오니 바람이 시원했다.
유진은 식당 앞에서 잠깐 서 있었다. 하루 종일 사무실과 버스와 식당 안에만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골목 끝에 작은 공원이 보였다.
“조금 걸을래요?”
민재는 유진의 구두를 내려다봤다.
“발 안 아프세요?”
“많이 걷지만 않으면 괜찮아요.”
“오늘 일도 늦게 끝나셨는데 피곤하시겠다.”
민재가 큰길 쪽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면 택시 잡기 편할 것 같아요.”
유진은 공원 쪽을 한번 봤다.
“아, 네.”
큰길까지는 오 분도 걸리지 않았다.
횡단보도 앞에서 민재가 택시 앱을 켰다. 유진은 자기가 부르겠다고 했다.
기다리는 동안 민재는 식당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했다. 다음 주에 회사 일이 조금 바빠질 것 같다고 했다.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택시가 도착하자 민재가 번호판을 확인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민재 씨도요.”
차 문을 닫고 나서 유진은 창밖으로 손을 조금 들었다.
민재가 마주 손을 들었다.
택시가 출발했다.
유진은 무릎 위에 가방을 올렸다. 손잡이 사이로 목캔디가 보였다.
한 봉지를 꺼내 포장을 뜯었다.
달고, 조금 시원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 오늘 잘 먹었어요.
— 다음에는 제가 더 좋은 데로 모실게요.
유진은 메시지를 한동안 봤다.
더 좋은 데로 가지 않아도 되는데.
입력창을 누르고 몇 글자를 썼다.
저는 아까 조금 더 걷고 싶었어요.
읽어보니 서운하다는 말처럼 보였다.
유진은 끝에 웃는 표시를 붙였다가 지웠다. 문장도 지웠다.
걸으면서 더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하면 됐다.
아까 큰길로 가기 전에 말할 수도 있었다.
발은 괜찮다고 했지만 걷고 싶다는 말은 다시 하지 않았다. 민재가 피곤하겠다고 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에게는 별문제 없는 저녁이었을 것이다.
유진은 창밖을 봤다.
퇴근할 때보다 차가 많았다.
선배에게 연락이 온 건 일요일이었다.
— 잘 만났냐?
유진은 빨래를 개다가 답했다.
— 응. 잘 먹었어.
— 괜찮지? 걔 착해.
— 응. 좋은 사람 같아.
선배는 그럼 더 만나보라고 했다.
유진은 접다 만 티셔츠를 무릎 위에 놓았다.
싫었던 일부터 생각해보려고 했는데 잘 떠오르지 않았다.
식당을 알아보고 예약했다. 자기가 한 말을 기억했다가 목캔디를 사 왔다. 집에 갈 때는 택시를 기다려줬다.
누군가에게 설명하면 그게 왜 싫으냐는 말을 들을 것 같았다.
싫었던 건 아니었다.
유진은 두 번째로 만났던 저녁을 떠올렸다.
민재는 여러 번 자기를 편하게 해주려고 했다.
그럴 때마다 유진은 괜찮다고 대답했다.
다음에도 그럴 것 같았다.
그때는 그냥 말하면 되지 않을까.
원래 가려던 식당에 가고 싶다고. 택시를 조금 늦게 타고 싶다고.
유진은 티셔츠를 마저 접었다.
말하고 나면 민재가 미안해할 것 같았다. 그러면 자기는 또 미안해할 일은 아니라고, 신경 써준 건 고맙다고 설명할 것 같았다.
두 번 만난 사이였다.
그 설명을 해보고 싶을 만큼 마음이 커지지는 않았다.
며칠 뒤 민재에게 다음 주말에 시간이 되느냐는 연락이 왔다.
유진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한 뒤 식탁에 앉았다. 메시지를 쓰고 고치기를 몇 번 반복했다.
좋은 분이라는 말은 썼다가 지웠다.
만나서 즐거웠지만 더 만나는 건 어려울 것 같다고 보냈다. 늦게 말해서 죄송하다고 덧붙였다.
민재는 한참 뒤에 답했다.
— 알겠습니다. 솔직하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 좋은 분 만나세요.
유진도 짧게 인사했다.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며칠 동안은 목캔디를 꺼낼 때마다 민재가 생각났다.
한 봉지는 회사 서랍에 넣고, 한 봉지는 가방에 두었다.
다 먹고 난 뒤에는 빈 봉지를 버렸다.
삼 년 뒤, 이삿짐이 대충 정리됐을 때는 저녁 여덟 시가 넘어 있었다.
유진은 거실 바닥에 앉아 양말을 벗었다.
뒤꿈치에 종이 가루가 붙어 있었다.
남편은 주방에서 상자 하나를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가위 어디 뒀어?”
“당신 뒷주머니.”
남편이 손을 뒤로 뻗었다.
가위가 나왔다.
유진은 웃을 힘도 별로 없었다.
소파는 제자리에 놓였지만 그 위에 옷과 이불이 쌓여 있었다. 식탁 위에는 전기포트와 세제와 리모컨이 놓여 있었다.
남편이 휴대전화를 들었다.
“중국집 시킬까?”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이 주문 내역을 보며 말했다.
“당신 짜장면이지? 탕수육 작은 거 하고.”
유진은 응, 하려다가 멈췄다.
“나 오늘은 국물 먹고 싶어.”
“짬뽕?”
“매운 거 말고. 우동 있나?”
남편이 화면을 내렸다.
“없네. 짬뽕 덜 맵게 해달라고 할까?”
그 정도로도 괜찮을 것 같았다.
배가 고팠고, 다시 식당을 찾는 것도 귀찮았다. 맵게 오면 물을 마시면 됐다.
유진은 발에 붙은 종이 가루를 떼다가 손을 내밀었다.
“잠깐 줘봐. 내가 찾아볼게.”
남편이 휴대전화를 건넸다.
근처 식당을 몇 군데 넘기자 우동집이 나왔다. 유진이 메뉴를 누르자 남편도 옆으로 와 앉았다.
“여기는 사십 분 걸리네.”
“너 많이 배고파?”
“좀.”
유진이 주방 쪽을 봤다.
“아까 빵 남은 거 있어. 그거 반씩 먹고 기다릴까?”
남편은 화면에서 돈가스를 하나 골랐다.
“소스 따로 달라고 해줘.”
유진은 요청란에 적고 우동을 담았다.
주문을 마친 뒤 휴대전화를 돌려줬다.
빵 봉지를 찾으러 일어나면서 유진이 말했다.
“다음에도 내가 짜장면 먹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
남편이 고개를 들었다.
“지난번에 좋아했잖아.”
“오늘은 우동이 좋아.”
“알았어. 다음에는 물어볼게.”
빵은 전자레인지 위에 있었다.
접시가 어디 있는지 몰라 봉지째 들고 돌아왔다. 남편이 바닥에 놓인 물티슈를 옆으로 밀었다.
유진은 그 자리에 앉았다.
남편이 빵을 반으로 나눴다. 한쪽이 조금 작게 떨어졌다.
작은 쪽이 유진에게 왔다.
유진은 남편 손에 남은 빵을 봤다.
“큰 거 줘.”
“나 배고프다니까.”
유진이 웃으며 손을 거뒀다.
빵을 한 입 베어 물자 휴대전화가 울렸다.
주문이 접수됐다는 알림이었다.
우동이 올 때까지는 38분 남아 있었다.
3년 후에 유진이 월세로 산다는 걸 알고, 민재는 왜 안심했을까요?
그 작은 안도감에서 시작된 비교의 끝이 궁금하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