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보, 샹뱌오. 2026.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고, 세계를 대상으로 삼다
— 디지털 시대의 지식 생산과 현장 관찰
류보(刘博) · 샹뱌오(项飙)
오늘날 세계는 격렬한 변동 속에 놓여 있다. 전 지구적으로 문화가 질서를 잃고, 상식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며, 질서가 통제되지 않는 상황에서 생명력 있는 개인들은 불안정하고 미지의 세계로 휩쓸려 들어간다. 이에 개인이 세계와 더불어 살아갈 새로운 방법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현재 진행 중인 다중적인 변화는 다음과 같은 양상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코로나19 팬데믹의 전 세계적인 영향은 개인과 세계를 긴밀히 연결했다. 세계경제 전반의 하강은 개인이 미래 세계를 상상할 때 느끼는 불확실성과 서로 얽혀 있다. AI로 대표되는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간과 세계의 상호작용에 더 높은 요구를 제기하고 있다. 이러한 변동 속에서 우리는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품는 핵심적인 관심사에 초점을 맞추고, 일상적인 사유에 활용할 수 있는 이론과 개념을 발전시켜야 한다. 곧, 개인과 세계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슬롯적 심성의 변화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변동하는 세계에서 개인은 어떤 행동을 취할 수 있는가?
이를 위해 본지는 푸단대학교 신문학원과 독일 막스플랑크 슬롯인류학연구소의 공동 양성 박사과정생 류보에게, 독일 막스플랑크 슬롯인류학연구소 소장이자 유럽인문자연과학아카데미 회원인 샹뱌오 교수와의 특별 인터뷰를 의뢰했다. 이 글은 샹뱌오 교수의 핵심적인 생각인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를 다시 살펴보고, 이어서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자기 자신이 방법이 될 수 있는가',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는 일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디지털 시대에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와 지식 생산' 등의 문제를 중심으로 일련의 논의를 전개한다. 이 글은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의 전제가 '세계를 대상으로 삼기'라는 점을 강조하며, 지식의 공공화와 연구의 유기화를 주장한다. 이를 통해 자아와 타인, 세계를 다시 연결하는 지식 실천으로 나아가고, 나아가 공동의 관심을 만들어내고자 한다.
— 편집자 서문
류보: 2020년 선생님께서 우치 선생님과 함께 출간하신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는 중국 안팎에서 뜨거운 논의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바카라의 내용을 보면 선생님 개인의 학문적 성장 과정을 정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세계를 관찰하고 지식을 구성하는 새로운 경로와 방식도 제시하고 있습니다. 베이징대학교의 왕밍밍 교수는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의 가장 성공적인 지점이 '나'가 없는 수많은 '객관적 서술'을 하나하나 모두 '나와 관련된 것'으로 바꾸었다는 데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아직 명확히 드러내야 할 '방법의 차원'을 함축적인 방식으로 건드렸다고 보았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라는 제안이 이처럼 많은 관심을 받은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샹뱌오: 왕 선생님의 격려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가 어느 정도 관심을 끈 데에는 아마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첫째, 비교적 실행하기 쉬우면서도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경험의 내적 구조 속으로 거듭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뿐입니다. 반면 다른 사람 경험의 내적 구조는 개인이 방관자의 입장에서 관찰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설령 가족이라고 하더라도, 그 순간 그 사람의 행동과 감정, 추론, 기억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경험에 대해서는, 그 안쪽에서 이해하고 성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자신입니다. 이러한 성찰은 흔히 독특하고 대체 불가능한 통찰을 가져다줍니다.
둘째, 개인과 슬롯 사이에 실제적이고 강렬한 단절감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젊은 연구자로서 우리는 학술적인 글을 쓸 때 '개인과 집단', '개인과 슬롯'가 변증법적으로 통일되어 있고 서로 중첩되어 있다고 능숙하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이론을 인용하고 많은 사례를 열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단 생활로 돌아오면, 가령 시험을 준비하거나 논문을 쓰거나 가족관계를 다룰 때면, 이러한 통일감은 흔히 대립 관계로 바뀝니다. 자신과 세계가 서로 다른 두 극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됩니다. 주변 환경을 바꾸고 싶지만, 흔히 '벽에 부딪히는' 좌절감을 느끼게 되지요. 동시에 자신이 사실 슬롯와 진정으로 화해하기는 어렵다는 점도 깨닫습니다. 한편으로는 스스로에게 '일단은 이렇게 지내자'고 타이르지만, 다음 날 눈을 뜨면 다시 '이대로는 만족할 수 없다'고 느낍니다. 이러한 반복이 바로 개인으로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실제로 경험하는 긴장입니다.
바로 이러한 긴장이 '자기 대상화'의 충동을 불러일으켜, 비로소 자신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사실 이것 역시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의 일부입니다. 하지만 제가 더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과 세계가 서로 양극단으로 벌어지고 나면 흔히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하나는 영웅주의적으로 분투하는 반응으로, 심지어 외곬으로 '모든 것을 바꾸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움츠러들고 무력감을 느끼면서 '나는 그저 시대의 먼지 한 알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시대에 어찌 먼지 한 알만 있겠습니까? 시대는 온통 먼지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무력감을 느끼는 것은 먼지를 너무 많이 보아서가 아니라, 너무 적게 보기 때문입니다! 이 먼지들이 서로 어떻게 작용하여 스모그가 되는지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삶이 어렵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려움'을 명료하고 정확하게 볼 수 있느냐는 데 있습니다. 제대로 보지 못하면 두 극단에 빠지기 쉽습니다. 극단적으로 분투하거나, 완전히 움츠러들거나 하는 것이지요.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는 바로 그 중간 상태의 가능성을 제공하려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삶을 감지하는 데서 나오는 판단력, 일상적인 지각의 차원에서 갖추는 균형감각을 말합니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야 우리는 인간과 세계 사이의 관계를 다시 연결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는 무엇보다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셋째,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는 세계를 인식하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우리가 이 세계와 어떻게 더불어 살아갈 것인가에 답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방법은 인식론적 방법이 아니라 생활의 방법입니다. 주된 목적은 구조화된 지식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태도와 관점을 형성하는 데 있습니다. 먼저 삶의 태도가 있고, 그런 다음 그것을 학술연구에 활용하는 것, 이것이 중요합니다.
자기 자신을 연구하는 것은 자신을 대상으로 삼는 것이지, 자신을 방법으로 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고향에서 연구하는 것 역시 자신을 방법으로 삼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으면 자신과 전혀 관련 없는 것도 연구할 수 있습니다. 가령 내가 어떤 것을 보았을 때 첫 반응은 무엇인가? 나는 왜 그 반응을 이상하게 여기는가? 자신이 놓인 슬롯적 위치, 자신이 지니고 있는 감정적 전제와 역사적 경험은 함께 어우러져 특정 사물에 대한 판단 방식을 구성합니다.
어떤 현상을 보고 '이상하다'는 느낌이 생긴다면, 그것이 바로 세계를 인식하는 하나의 출발점입니다. 이 출발점에서 더 나아가, 그 '이상한 느낌' 뒤에 자신과 이 세계 사이의 어떤 관계, 자신과 주변 사람들 사이의 어떤 관계가 숨어 있는지 탐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낯선 장례 의례를 보면 불편하거나 심지어 거부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숭고함이나 경외감을 느낄 수도 있지요. 이러한 복잡한 감정의 배후에는 자신과 그 의례 사이의 슬롯적 연관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의례의 역사적·문화적 배경을 이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그것을 어떻게 감지하는지 되돌아볼 때, 이러한 이중의 이해가 슬롯적 지식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구성합니다.
류보: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의 핵심적인 생각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를 통해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샹뱌오: 바카라의 제목은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이지만, 사실 우리가 정말 논의하는 것은 '자아'가 아니라 '방법'입니다. 요리에 빗대어 이 문제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요리할 때는 여러 조리도구가 필요하지만, 핵심은 역시 음식이 맛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조리도구는 수단이지 내용도 아니고 목적도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는 '자기 성찰'을 종착점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자아라는 통로를 빌려 더 큰 슬롯구조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카라에서 다루는 내용은 중국 슬롯와 전 지구적 변화에 대한 저의 몇 가지 관찰입니다. 초점은 개인 생활의 세부사항이 아니라, 어떻게 '현지에 뿌리내린' 관찰 방식을 형성할 것인가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연구는 우리 자신의 생활에서 출발해야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일상적 상식의 시각을 넘어, 뿌리를 내리면서도 거리를 두는 사유의 경로를 세워야 합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라는 표현은 '자기 자신'을 세계를 관찰하는 방법으로 삼는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지, 연구의 주제로 삼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귀착점은 사실 여전히 '세계' 자체이며, 인간과 세계 사이의 연결입니다. 이러한 연결을 강조함으로써 구조적 이해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구조에는 여러 층위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구조는 단일한 차원이 아니라 다면적입니다. 둘째, 이러한 측면들은 서로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습니다. 셋째, 이러한 연결은 일정한 안정성을 지닙니다. 넷째,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이러한 관계의 배후에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조건과 정치경제적 배경이 있습니다.
구조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경험도 '내적 구조'와 '외적 구조'로 나눌 수 있습니다. 내적 구조란 경험의 서로 다른 측면들이 상호 연관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기억과 감정, 특정한 일에 대한 인식은 사실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들이 연결되는 방식이 곧 구조입니다. 외적 구조란 자신의 경험과 다른 사람의 경험 사이에도 연관이 있으며, 자신의 경험이 자신이 놓인 슬롯역사적 배경과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신이 '어떻게 했는지', 혹은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이야기할 때, 표면적으로는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경험을 진정으로 열어젖힐 수 있다면 사실 그 안에 세계가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각과 경험을 빌려 세계의 일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방법'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분명 단순히 이야기를 하거나 경험을 늘어놓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는 우리 자신의 경험을 분석 가능한 자료로 삼을 수 있는지, 그것을 구조적인 것으로 바라볼 수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방법이 도구적인 것이라면 특정 문제에만 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는 것은 구체적인 연구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조작적 기법이 아니라, 불확실한 세계를 마주하는 안정적인 자세와 사고방식입니다. 이는 어떤 문제 앞에서도 자기 자신을 중심에 두고, 안정적인 사고와 행동의 논리를 형성할 수 있음을 뜻합니다.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는 것은 결코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이야기함으로써 인간과 세계 사이의 관계구조를 열어 보이는 것입니다. 분명히 설명해야 하는 것은 개인이 어떤 현상, 어떤 구조와 어떻게 연결을 맺는가입니다. 이 과정이 드러나야만 서술은 사적인 감정 표현이 아니라 분석적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의 요체입니다.
류보: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를 하나의 이론적 틀로 보는 편이십니까, 아니면 열린 의제로 보는 편이십니까?
샹뱌오: 저는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가 본질적으로 표준화된 연구 방법이 아니라 하나의 삶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처음 이 생각을 제기했을 때도 학술연구를 하느냐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분명하게 정리하기 어려운 곤경을 자주 마주합니다. 때로는 이미 생각을 정리했다고 하더라도 문제를 실제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는 바로 이처럼 지속되는 곤경에서 생겨난 하나의 응답 방식입니다. 그 출발점은 아주 단순합니다. '나는 왜 이렇게 마음이 얽히고 갈등하는 걸까?'라고 묻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은 왜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것일까요? 이때 우리는 자신에게서 출발하여 이 느낌 뒤에 놓인 구조와 배경을 풀어내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은 '객관적 세계'에 대한 확실한 인식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 세계와 어떻게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지 더 잘 이해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철학적으로 말하면 이는 실용주의적 사고에 더 가깝습니다. 실용주의는 절대적 진리를 찾는 데 집착하지 않고, 어떤 인식이 '쓸모가 있는지', '효과가 있는지'에 더 관심을 둡니다. 다시 말해 그것이 우리와 세계 사이의 상호작용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되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류보: 많은 사람이 연구할 때, 특히 문헌 검토를 하거나 이론적 틀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를 자문화기술지(autoethnography), 성찰적 인류학(reflexive anthropology), 나아가 위치성 연구(positionality research)와 함께 논의합니다. 이들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과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샹뱌오: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를 학술연구에 도입한다면, 그것과 '위치성'(positionality)의 관계는 거의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영어에서 '위치'(position)에는 슬롯적 역할과 입장·관점이라는 의미가 포함됩니다. 예를 들어 당신은 누구인가, 어떤 슬롯구조 속에 놓여 있는가, 특정한 의제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반면 '위치성'은 내가 왜 어떤 일을 이런 방식으로 보는지, 왜 여기에서 출발하는지, 왜 이 일의 어떤 측면은 흥미롭다고 여기고 다른 측면은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하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가령 내가 남성이다, 혹은 학생이다 하는 것은 '위치'입니다. 그러나 현실의 삶에서 나는 남성이면서 동시에 학생이고, 현재는 중산층의 위치를 얻었으며, 또 소도시 출신으로 시험공부를 통해 올라온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여러 배경이 서로 얽히면 그것은 더 이상 하나의 특정한 위치가 아닙니다. 이는 내게 일련의 생활 경험이 있고, 그로 인해 어떤 문제에 더 민감하며,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독특한 이해를 갖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것이 '위치성'입니다.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는 것은 단순히 '나는 오늘 어떻게 생각한다', '나는 세계를 어떻게 바라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며, 개인적 견해를 평면적으로 진술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것이 강조하는 것은 여러 해에 걸친 자신의 인생 경험, 특히 자신이 슬롯의 여러 부분과 맺어온 복잡하고 풍부한 관계를 분석 자원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위치성'과 확실히 매우 가깝지만, 여전히 미세한 차이가 있습니다. '위치성'은 지식의 단일성과 안정성에 대한 포스트모던 사상의 도전에서 비롯되었으며, 지식의 다원성과 구성성을 강조합니다. 반면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는 실용주의 철학의 입장에 더 가깝습니다. 실용주의 역시 지식의 절대성을 부정하지만, 그 초점은 지식이 다원적이어서 판단할 수 없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에서 유효한 판단을 내리는 능력을 강조하는 데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와 '자문화기술지'의 관계에 관해서는, 두 가지 모두 표면적으로 '자기 성찰'과 관련되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두 경로라고 생각합니다. 전자의 귀착점은 세계 자체입니다. 연구의 주된 대상은 어떤 객관적인 슬롯현상이며, '자아'는 그 현상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매개이자 입구입니다. 우리가 어떤 현상에 주목하는 것은 자신의 경험과 그 현상 사이에 슬롯적·역사적 차원에서 어떤 내적 연관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현재의 현실적 상황이 '나'라는 주체를 통해 '나'의 일련의 역사적 기억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러한 기억은 흔히 강렬한 감정적 색채를 띠며, 외부의 관찰로는 포착하기 어렵습니다. 이 방법은 '자기 이야기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동원하여 더 광범위한 슬롯세계를 깊이 이해하고 분석하기 위한 것입니다.
반면 후자의 연구 대상은 '자아'이며, 기억 분석이나 서술 전략 등의 수단을 통해 자신의 생애사나 정체성의 복잡성을 드러내는 방식일 수 있습니다. 전자의 가치는 자기 경험을 동원함으로써 연구자가 현실과 역사의 구조적 문제를 더 깊이 볼 수 있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어떤 현상이 직관적인 차원에서는 연구자 자신과 무관해 보이더라도, '자아'라는 매개를 통해 더 깊은 이해와 통찰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이 방법의 최종 목표는 현실과 역사 자체의 복잡성 안으로 들어가 그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후자의 방법적 경로는 다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흔히 개인적 경험과 정체성 구성에 관한 자기 서술에 초점을 맞추며, 자아를 이야기하고 기록하는 데 그 효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어떤 부정적인 효과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곧 연구가 '자아'에 대한 묘사에 머물면, 오히려 자아를 통해 세계 깊숙이 들어가려는 의도를 약화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자문화기술지는 마땅히 슬롯구조와 역사적 관계를 향해야 할 분석적 긴장을 희석하거나 심지어 대체할 수도 있습니다.
성찰적 인류학에 관해 말하자면, 1960~1970년대 이후 모든 슬롯과학 분야가 성찰을 이야기해왔습니다.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는 사실 성찰성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다만 이러한 성찰은 안으로 향하는 성찰이 아닙니다. 자신을 성찰하는 동시에, 자신과 세계 사이에서 지속되는 상호작용의 관계를 어떻게 성찰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는 안정적이고 객관적이며 닫힌 세계를 먼저 설정한 다음, 그 세계와 마주 서 있는 자신을 살펴보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습니다. 그 논리는 정확히 반대입니다. 우리 각자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 자체가 참여적인 상호작용 속에서 구성됩니다. 자신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세계도 그에 상응하여 자신에게 응답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처음부터 세계를 열려 있고 자신에게 기꺼이 응답하는 것으로 여긴다면,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고 더 긍정적인 피드백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세계를 냉담하고 경직되어 있으며 반드시 그로부터 인정을 얻어내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면, 세계와 맺는 상호작용도 불안하고 방어적이며 도구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가 강조하는 것은 일종의 수평적 성찰입니다. 그것은 '그때 내가 잘못했다', '내가 충분히 용감하지 못했다'는 식의 선형적이고 죄바카라감에 기초한 도덕적 자기반성이 아닙니다. 오히려 구조적이고 관계적인 성찰, 곧 내가 느끼는 것이 나와 세계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2. 어떤 자기 자신이 방법이 될 수 있는가
류보: 방법으로 삼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이란 도대체 어떤 자기 자신입니까?
샹뱌오: 그것은 진실한 자기 자신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 먼저 한 가지 분명히 해둘 점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는 연구 대상이 반드시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동물을 연구하거나 고대 회화를 연구하거나 멀리 떨어진 슬롯현상을 연구할 때도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자기 자신'은 연구 대상이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출발점이자 통로입니다.
흔히 자신의 경험과 느낌을 이야기하기만 하면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를 활용한 것이라는 오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들은 타인의 기준이나 슬롯적 틀을 이용해 자신을 대상화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은퇴한 사람들 중에는 자서전 쓰기를 좋아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떤 자서전은 무척 흥미롭지만, 어떤 것은 읽기가 어렵습니다. 왜 읽기가 어려울까요? 자신을 대상으로 삼고 타인을 방법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시각, 타인의 틀, 타인의 기준으로 자신을 대상화하는 것이지요.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다른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것이지, 나의 진정한 경험과 느낌은 무엇인지, 나의 구조적 위치는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 자신에게는 딱히 특별한 것이 없는 것 같은데요. 어떻게 저 자신에게서 세계를 볼 수 있나요?"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는 여기에 이렇게 묻습니다. 왜 모든 것이 정상적이라고 느끼나요? 정상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요? 정상성 자체가 슬롯적으로 구성되는 방식입니다. 정상적인 상태는 고인 물처럼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정상성이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분명 수많은 파문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기억이 그것을 억눌렀을 수도 있습니다. 당시에는 무척 불쾌했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겼을 수 있지요. "그때는 내가 어렸으니까", "그때는 좀 젊었으니까" 하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스스로 당시의 느낌을 억누르고 '정상적인 것'으로 바꾸어놓은 것입니다. 당시의 불쾌한 감정에서 나중에 그 감정을 합리화하는 데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이 정상적인 상태를 구성하는 구체적인 고리입니다.
정상적인 것 안에는 불합리한 것이 많이 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자신과 정상적인 것 사이의 마찰 때문에 자주 고통받습니다. 다만 그것을 똑바로 바라보려 하지 않을 뿐입니다. 이러한 마찰을 붙잡고 이론적 사고를 통해 파고들면, 마치 말할 수 없거나 말할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이던 것들이 눈앞에서 매우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누구나 금광입니다. 모든 사람은 복잡한 슬롯적 관계에 의해 구성되며, 개인의 감정과 사고, 기억과 경험은 서로 작용합니다. 깊이 파고들기만 하면 그 안에는 모두 찾아낼 수 있는 이치가 있습니다. 그 이치를 파헤치면 오늘날 자신의 삶과 존재 방식에 대해 더 나은 이해를 형성할 수 있고, 다음 행동을 위한 명료한 배경도 마련할 수 있습니다.
설령 일상생활이 지루하다고 느낀다 해도, 그 지루함을 어떻게 명료하게 설명할 것인가 역시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소셜미디어의 어떤 댓글이 자신을 몹시 화나게 했다고 합시다. 화가 가라앉고 나면 자신이 유치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노는 매우 의미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아무런 까닭 없이 불쑥 생겨난 것은 아닐 테니까요.
우선 당연히 그 댓글이나 사건 자체를 분명히 파악해야 합니다. 그것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런 다음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왜 이것 때문에 유독 화가 났을까? 비슷한 일이 전에도 있었지만 그때는 이만큼 반응하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이번의 '화'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때 자신의 분노가 단순한 감정적 반응이 아니라, 흔히 그 발언에 숨어 있는 어떤 구조적인 것을 가리킨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결국 연구하는 것은 '나는 왜 화가 났는가'라는 감정 자체가 아니라, '화'를 하나의 방법이자 입구로 삼는 일입니다. 자신의 화는 일종의 직관이지만, 동시에 관찰 대상에 대한 정확한 포착이기도 합니다. 이를 통해 어떤 문제의 심층구조를 통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에서 특히 중요한 점입니다. 그것은 고정된 연구 방법의 체계가 아니라 삶을 감지하는 하나의 방식이며, 자신의 일상적 경험에서 출발하여 이 세계를 어떻게 알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류보: 개인이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를 통해 생각하고 연구하려 할 때, 우리는 흔히 한 가지 문제에 부딪힙니다. 사소해 보이는 일상적 경험에서 도대체 어떻게 가치 있는 내용을 추출하고 응축해야 할까요?
샹뱌오: 개인의 경험은 반드시 '가치'가 있어야 할까요? 저는 오히려 그 전제 자체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경험이 흥미로운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유의 주체'나 '서술의 주체'로서 자기 경험을 표현할 수 없다면, 다시 말해 자신감 있고 유창하며 의식적인 방식으로 자기 삶을 이야기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특별한 일이라도 듣는 사람에게는 "이건 누구나 겪는 일상 아닌가?" 하는 이야기로 들릴 뿐입니다. 따라서 핵심은 그 일이 얼마나 중대한가에 있지 않습니다. 자신이 그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 그 안에서 무언가를 분석해낼 수 있는지에 있습니다.
그러려면 먼저 명료하고 힘 있는 서술 주체를 세워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어떤 경험을 흥미롭다고 느끼게 한다는 것은, 사실 그 경험을 이야기하는 사람의 진정한 주체성을 느끼게 한다는 뜻입니다. 일 년에 논문 열 편을 발표한 경험은 어쩌면 매우 가치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한 문단을 쓰면서 겪는 구체적인 고민입니다. 다시 말해 경험을 이야기할 때 이 '나'는 명확하고 자각적인 자세로 담화 속에 존재해야 합니다. 이 위치가 확립되어야만 과거의 세부사항과 기억, 느낌이 활성화되어 더 분석하고 논의할 수 있는 자료가 됩니다.
여기에는 사실 두 개의 '나'가 동시에 작동합니다. 하나는 '경험적 나'이고, 다른 하나는 '분석적 나'입니다. 삶에서 겪은 일들은 '경험적 나'의 일부이지만, 그것을 연구와 글쓰기의 자료로 바꾸려면 '분석적 나'를 작동시켜야 합니다.
전에 당신이 들려준 아주 생생한 경험이 기억납니다. 어릴 때 농촌의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 부모님이 간식을 사 먹으라고 용돈을 주시면 늘 라탸오를 사 먹었다고 했지요. 친구들과 숨바꼭질할 때는 거미줄이 있는 구석에 라탸오를 숨겨두었다고요. 라탸오에 먼지와 거미줄이 달라붙으면 입으로 후후 분 뒤, 반을 찢어 친구에게 나누어주면서 "소리 내지 마. 조금만 더 쪼그려 앉아 있자"라고 했다고요.
사실 이런 장면은 의도적으로 기억해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야기할 때는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왜 그럴까요? 이러한 경험은 매우 강렬한 '장면성'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추상적이고 개념화된 조각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눈앞에 그림이 그려지는 감각적 경험입니다. 곡식 창고 같은 그 장소, 라탸오의 맛, 끈적거리는 촉감, 구석에 쪼그려 앉은 아이들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체성이 바로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에서 핵심적인 자료의 원천입니다. 이 자료를 활용할 때 첫 단계는 처음부터 개념을 들이대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세부사항과 느낌, 동작, 관계를 복원해야 하며, 그런 다음에야 분석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중요'해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자신과 타인, 자신과 이 세계 사이에 밀도 있는 관계를 구성했기 때문에 기억할 때가 많습니다. 그 밀도가 바로 경험 배후의 구조성입니다.
그리고 '딱히 이야기할 것이 없는 것 같다'고 느낄 때는 그 사실 자체도 분석할 가치가 있습니다. 왜 삶에서 이야기할 만한 일이 없다고 느끼는 것일까요? 이는 더 깊은 문제, 곧 주의력의 상실과 감지 능력의 약화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일상에 대한 주의력을 잃는다면 삶도 그에 따라 무의미해질 가능성이 큽니다.
류보: 어떤 사람은 선생님이 이미 유명해지셨기 때문에 선생님의 경험이 '흥미롭게' 들리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선생님이 보시기에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는 학문의 진입장벽을 '낮추는' 것입니까? 이러한 연구 경로는 정말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을까요? 평범한 사람은 자신의 생활 경험에서 성찰과 표현을 통해 어떻게 방법적 의미를 지닌 사유의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샹뱌오: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는 분명 연구의 진입장벽을 낮추는 것입니다. 학술연구가 처한 한 가지 곤경은 진입장벽을 낮추기 어렵다는 데 있습니다. 낮추고 싶어도 많은 사람이 이것은 '유명인 효과'이기 때문에 보통 사람은 배울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해서 다시 장벽을 높여버리는 것이지요.
이는 적어도 두 가지 문제를 초래합니다. 첫째, 억지로 장벽을 높임으로써 이미 이름을 알린 사람들, 곧 스타나 교수, 정치인들의 삶과 언행만이 귀 기울일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는 것처럼 만듭니다. '성공한 사람'의 경험에 대한 이러한 과도한 집중은 '닭털조차 하늘로 날아오르게 하는' 식의 스타 추종 문화를 부추깁니다. 사소한 경험을 여론의 화제로 만들고 개별 현상을 보편적 진리로 오인하게 함으로써, 지식 생산의 무질서화와 피상화를 초래합니다.
둘째,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체계적인 경험을 감히 이야기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설령 이야기하려 해도 유명인의 모습을 흉내 내고, 자신의 경험을 파편화하여 유명인의 파편들과 이어 붙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유명인이 어느 곳을 방문해 인증하면 자신도 그곳에 가서 인증합니다. 이런 실천에 무슨 깊이가 있겠습니까?
전통적인 의미의 학술연구는 흔히 높은 진입장벽을 자처합니다. 이론을 알아야 하고, 모형을 다룰 줄 알아야 하며, 빅데이터를 사용하고 통계분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런 글쓰기와 표현, 분석 방식은 매우 낯설고 멉니다. 이해할 수도 없고 감히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지요.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는 이런 기술을 모르더라도 체계적이고, 심지어 매우 깊이 있는 사유를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운동과 비슷합니다. 서양에서는 헬스장에 가서 기구를 사용해야 하지만, 중국이나 인도 같은 곳에서는 요가, 좌선, 태극권, 무술처럼 신체 자체를 통해 이루어지는 운동이 많습니다. 별도의 장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런 방식이 '질을 낮추는' 것은 아니지만, 진입장벽은 분명 낮추어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런 운동에서 중요한 것은 도구가 아니라 의식과 방법입니다.
학술연구도 마찬가지입니다. 핵심은 자료 수집 능력만이 아니라 사고방식입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해결바카라부터 찾아야 한다'는 도구적 사고에서 벗어나, 더 체계적인 시각으로 자신의 생활 경험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때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는 사실 일종의 사유 훈련법이 됩니다. 자기 경험 속의 그 '가시들'을 명확히 보고, 하나하나 풀어내고,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이미 이론의 문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간단히 말해 자신의 경험을 열어젖힌 다음, 그 경험 내부에서 더 깊이 관찰하고 성찰하여 어떤 '이치'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앞서 당신이 이야기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봅시다. 어릴 때 먹었던 어떤 간식이 왜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을까요? 아마 그 시절에는 삶에 그렇게 많은 방해 요소가 없었고, 그 작은 것을 각별히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주의력이 고도로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감각이 거꾸로 하나의 힘이 되어 자신과 이 세계 사이에 실제적인 연결을 만들어주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지금의 삶을 보면, 우리가 매일 너무 바쁘고 정보가 너무 많으며 주의력이 끊임없이 분산된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 가지 일에 전념하기도 어렵고, 작지만 중요한 것들을 진정으로 소중히 여기기도 어렵습니다. 그렇게 자신과 이 세계 사이의 연결이 모호하고 추상적으로 변합니다. 과제를 완수하고, 인정을 얻고, 서류를 제출하고, 추천서를 부탁하느라 분주합니다. 이 모든 것이 중요해 보이지만, 삶 안에 있는 연결감과 실감은 서서히 사라집니다. 이때 더 깊은 차원의 것을 물어야 합니다.
물론 실제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뒤에 일련의 이론이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당연히 틀린 말은 아닙니다. 개인적 경험에만 완전히 의존해서는 더 깊이 분석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구자들이 개입하여 이러한 경험 속의 '느낌'을 정리하고, 공유하고 전파할 수 있는 사고방식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물론 오늘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겠다'고 결심했다고 해서 내일 곧바로 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은 오랜 학습과 훈련이 필요한 과정입니다. 다만 저는 이러한 학습이 효과적이고 생활에 밀착된 것이기를 바랍니다.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의 배후에는 분명 진입장벽이 존재하지만, 일상에 더 가까운 지식의 경로가 있습니다.
류보: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를 활용해 생각하고 연구하려는 사람들은 자기애적 글쓰기와 경험주의적 나열의 길로 빠지는 것을 어떻게 막아야 할까요? '자기 이야기하기'와 '세계 관찰하기'를 어떻게 결합해야 할까요?
샹뱌오: 저는 온라인에서 많은 젊은 친구와 자주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들은 아주 많은 성찰을 합니다. 문제는 그 성찰 속에 대개 자기 자신만 있고 다른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읽어보면 그들의 경험이 왜 이런 모습이거나 저런 모습이 되었는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자연히 경험주의적 나열로 이어집니다. 무엇이든 일지처럼 차례로 늘어놓지만, 전후의 인과관계와 그 사이의 이치를 설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요? 삶 속의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교류하는지, 슬롯 및 세계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이런 것들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현재의 한 가지 과제는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가 어떻게 개인적 경험에서 구조적 이해로 나아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많은 젊은이가 스무 살을 조금 넘긴 나이에 글쓰기를 시도합니다. 자신의 경험을 섬세하게 묘사할 수는 있지만, 이러한 자기 서술을 외부 슬롯에 대한 분석과 이해로 더 발전시키기는 어려워합니다.
이론적으로 이러한 '밖으로 확장하는' 능력은 슬롯과학 이론의 학습과 지속적인 독서를 통해 길러야 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교육체계에는 '감지'와 '이론'이 분리되어 있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많은 대학 수업에서 학생들이 접하는 이론은 추상적이고 거시적인 서사적 틀이며, 일상생활에서 자발적으로 생겨나는 감각과 생각은 '사적'이고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취급됩니다.
그 결과 학생들은 글을 쓸 때 글쓰기를 두 경로로 갈라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밀한 자기표현과 공식화된 '이론 적용'입니다. 학술적 글쓰기에서는 이론을 '하늘에서 떨어진' 상투어처럼 억지로 끼워 넣으며, 문제를 제기하고 경험을 이해하는 도구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론과 감지를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두 방향으로 노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집단 토론과 동료들과의 성찰 속에서 자신의 경험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비교하고 부딪쳐보는 데 힘써야 합니다. 경험 사이의 공명과 겹침을 발견하여 잠재적인 구조적 문제를 식별하고, 감지에서 분석으로의 전환을 이루는 것입니다.
둘째, 슬롯과학 이론의 생명력을 다시 활성화해야 합니다. 이론 읽기가 더 이상 언어기호를 쌓아 올리는 일이 아니라, 개인의 경험을 불러내고 깊이 있는 사유를 자극할 수 있는 사유의 도구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역사 속에서 진정으로 힘 있고 생명력 있는 이론들이 오랫동안 전해질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그것들은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이를 통해 더 광범위한 슬롯문제를 생각하게 합니다.
현재 우리의 문제는 이론의 생명력이 떨어져 나갔다는 데 있습니다. 이론이 교과서에 들어간 뒤, 그 이론에 의존한 논문이 많이 나왔지만, 그중 상당수는 사유 없이 그대로 적용한 것입니다.
많은 젊은이는 이런 이론 학습이 너무 지루하다고 느껴 과감히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로 바꾸려 합니다. 그러나 이론이 없어서는 안 될 도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론이 개입하지 않으면 경험은 쉽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파편적이고 감정적인 자료가 됩니다. 따라서 이론을 다시 읽고 이론적 사유를 재개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에 반드시 필요한 부분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이론을 읽는 관점도 바꾸어야 합니다. 이론을 바카라장에 진열된 명언이나 멋진 문구로 취급하지 말고, 살아 있는 사람들이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현실에 응답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공자를 읽을 때, 단지 '공자가 무슨 말을 했는가'를 되풀이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지금을 살고 있다면 오늘날의 슬롯적 모순과 갈등에 어떻게 응답할지 상상해야 합니다. 과거의 그의 견해는 왜 통찰력이 있었을까요? '그가 어떻게 생각했는가'에서 더 나아가 '그가 실제적인 슬롯 상황에 어떻게 응답했는가'를 이해하고, 이를 통해 그 안에 담긴 이론적 가치를 체득해야 합니다. 이처럼 그 입장에 들어가 보고 생각을 생성해내는 읽기야말로 이론을 활성화하는 효과적인 방식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신의 경험을 문제화한 다음 분석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론을 읽을 때 이론적인 것을 경험화하는 것입니다. 곧 경험을 문제화하고, 이론을 경험화하는 것입니다.
류보: 어떤 학자들은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의 핵심이 '개인적 경험의 문제화'에 있다고 봅니다. 연구자가 관련된 이론적 사유를 할 때 개인적 경험을 '가져오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이 이러한 개인적 경험을 문제화하는 대신 서사화하는 쪽으로 나아가, 인간과 슬롯, 세계의 관계에 대한 사유 과정을 자기 이야기를 하는 일로 바꾸어버립니다. 이런 식으로 서사가 '좁아지는' 곤경에 어떻게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론과 경험 사이의 거리는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샹뱌오: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발판이 있습니다.
첫째, 그것은 세계를 인식하려는 것입니다. 현상학과 실용주의, 실존주의 등의 철학은 우리가 단순히 세계를 인식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응답하고 세계에 일정한 행동의 효과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줍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면 세계를 제대로 인식할 수도 없습니다.
둘째,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는 것도 아닙니다. 자아에 대한 인식은 외부 세계와 접촉하고 그것을 감지하고 이해하면서 서서히 형성됩니다. 다시 말해 외부 세계를 인식하는 것과 자아를 인식하는 것은 한 과정의 두 측면입니다. 세계를 관찰하고 그 안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위치와 반응, 고유성을 점차 의식하게 되고, 이는 다시 이 세계에 대한 자신의 판단과 행동 방식에 영향을 줍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자연스럽게 실존주의의 핵심 명제인 '나는 누구인가'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 질문에는 선험적인 답이 없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는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하는가의 결과입니다. 정체성은 실천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는 것은 확정적이고 명료한 자아에서 출발하여 세계를 분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끊임없이 자아를 열고 고정된 '자아' 개념을 해체함으로써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바라볼 것을 강조합니다.
먼저 완결되고 자기 정합적인 경험체계를 갖춘 다음 그 경험을 분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삶의 파편들과 감정적 느낌만이 있으며, 이것들은 모두 일상 속에 '녹아' 있습니다. '자아'는 이러한 파편을 모아 표현하고 성찰하도록 돕는 임시적인 담지체일 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는 것은 하나의 삶의 태도이자 사고방식에 더 가깝습니다. 이는 불교의 '마음챙김'(mindfulness)과 비슷합니다. 자신과 주변의 관계에 주의를 기울이고, 현재의 감지 속에서 이해와 판단을 형성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고프먼은 자아가 우리가 수행하는 구체적인 역할들과 같지는 않지만, 그 역할들을 조직하는 담지체라고 말했습니다. 한 사람은 동시에 아들이자 아버지이자 연인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슬롯적 역할들은 매우 실재적입니다. 우리가 세계와 상호작용하고 생계를 얻으며 바카라임을 이행할 수 있도록 하는 기본적인 형식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역할도 '완전한 자아'가 아니며, '나는 누구인가'를 다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자아는 물론 존재합니다. 하지만 본질적이고 안정적인 핵심을 지니고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여러 옷, 즉 역할들이 걸려 있는 옷장에 가깝습니다. 자아가 드러내는 것은 구조성을 띤 일종의 일관성입니다. 자아가 일관성을 갖는 것은 고정불변의 본질이 있어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역할 사이에 일정한 조직 논리와 역사적 연결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완전한 '나'가 아닙니다. 삶 속에서 경험의 파편과 판단의 출발점, 상호작용의 흔적을 포착하고, 그것들을 통해 세계를 알고 자기 자신도 아는 것입니다.
류보: 자신과 세계 사이의 상호작용 및 그 세밀함에 지나치게 주목하면 개인의 경험이 확대되어 개인적 경험의 헤게모니가 생기고, 그 결과 합의가 존립할 공간이 좁아지지는 않을까요?
샹뱌오: 세밀함이란 상호작용의 세밀함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어느 모임에서 갑자기 여러 사람과 '공명'을 찾은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 '공명'을 한때의 흥으로 여기고 그냥 지나가게 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그것을 고밀도의 경험으로 다룰 수도 있습니다. 고밀도라는 것은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공명'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그 사람들의 어떤 경험이 내 경험과 어느 지점에서 겹치는가?
자신의 감각에 도취한다면, 앞서 처음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것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가 아닙니다. 그저 자기 이야기를 한 번 늘어놓는 것일 뿐입니다.
자기 자신을 연구 방법으로 삼으려면 '문제감'을 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제감'이란 연구자가 어느 지점에 문제가 있고, 무엇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어떤 일은 마음에 걸리고, 어떤 세부사항은 마주할 가치가 있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연구를 통해 확인하든 일기를 써서 기록하든, '문제감'은 세부사항을 깊이 파고들고 상호작용의 높은 밀도를 알아차리게 하는 중요한 동력입니다. 이러한 '문제감'이 드러나면 독자도 읽으면서 큰 자극을 받습니다. 설령 정작 자신은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완전히 설명하지 못하더라도 말입니다. 명확한 결론은 없지만 '문제감'이 있는 세부사항은 오히려 독자에게 여지를 줍니다. 서로 다른 독자는 서로 다른 해석을 하게 됩니다.
'문제감'은 흔히 '절박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절박감'이란 여기에 어떤 문제가 있으며, 역사적으로 보면 작은 문제일 수도 있지만 지금의 나 개인에게는 시급히 마주해야 할 일이 되었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절박감'은 개인의 경험과 자신이 놓인 환경이 만들어내며, 이 자체가 하나의 구조적 문제입니다. 또한 '절박감'은 개인이 어떤 구조적 상태에 대해 직접적으로 느끼는 감각이며, 개인적 경험과 구조적 상태, 역사를 연결하는 핵심적인 접점입니다.
아직 구조적 분석의 언어로 이를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더라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절박감'을 붙잡아 문제의식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러한 감지를 바탕으로, 정리할 가치가 있다고 느끼는 삶의 세부사항과 경험을 정리해나가는 것, 그것이 자신의 것이든 다른 사람의 것이든, 그 자체로 아주 훌륭한 출발점입니다.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모든 이치를 분명히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 과정에서 사유의 방향감각을 세우는 것입니다. 학술연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논픽션이나 일기,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는 경우에도 이 방법은 똑같이 성립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세부사항에 주목하는 것은 이런저런 '문제감'과 '절박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의 '문제감'과 '절박감'은 모호할 뿐입니다. 연구와 글쓰기는 바로 이 '문제감'과 '절박감'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이 두 감각을 준거로 삼을 때, 고밀도의 경험은 풍부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4. 디지털 시대에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
류보: 오늘날 세계에서 과학기술은 거대한 구성적 힘이 되었으며, 이는 소셜미디어가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미치는 영향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알고리즘 추천 시스템은 우리의 클릭과 체류, 공유, '좋아요'를 정밀하게 추적하여, 우리가 누구이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이해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처럼 고도로 개인화되어 있으면서도 외부 기술에 의해 움직이는 정보 환경에서 우리는 점차 '콘텐츠에 의해 선택되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이러한 수동적인 콘텐츠 수용 메커니즘을 어떻게 보십니까? 이는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에서 강조하는 주체성과 자기 성찰 능력에 충돌하는 것일까요? 또한 이러한 배경에서 디지털 시대가 자기 인식과 행동 능력에 제기하는 도전에 대응하려면,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를 어떻게 더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까요?
샹뱌오: 소셜미디어 시대에 알고리즘과 빅데이터의 추천 메커니즘은 분명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에 더 높은 요구를 제기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흔히 "샤오훙수가 갈수록 나를 더 잘 알아"라고 말하는 것이 아주 구체적인 사례입니다. AI와 빅데이터 시스템은 과거의 행동 데이터를 기록하여 '자아'의 모형을 만들고, 끊임없는 추천과 피드백을 통해 이렇게 연산된 '당신'을 확인하고 강화합니다. 이때 우리는 '자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의 '자아'는 더 이상 신체 내부나 심리 내부에 있는 주체적 존재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느 정도 데이터로 구성된 모의적인 '나'로 외부화되어 있습니다. 이 모의적인 '나'는 사실 자신의 일부 행동 선호를 확대해놓은 것입니다. 중요한 점은 그것이 확대하는 것이 이미 드러낸 자신의 일부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자아는 불완전하고 일면적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일면성이 끊임없이 강화될 때, 그것이 자신을 이해하는 주된 준거가 된다는 데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알고리즘이 확인해준 이 단편적인 자아를 진정한 자아라고 오인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의제에 관한 자신의 글이 대량으로 추천되고 많은 '좋아요'를 받으면, "나는 이 의제에 관해 권위가 있다"고 느낄 수도 있고, 심지어 "이 세계는 모두 나에게 동의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는 무엇보다 더 높은 경계의식을 요구합니다. 무엇을 경계해야 할까요? 자신과 세계 사이의 관계가 복잡하며, 알고리즘으로 손쉽게 환원할 수 없다는 점을 의식해야 합니다. 자신의 자아는 단순한 알고리즘의 출력물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경험과 상황, 관계 속에서 역동적으로 생성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해받는 것'과 '자신을 이해하는 것' 사이에 언제나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거리는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바탕으로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펼쳐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경계하고 나면 자아의식에 대해서도 더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소셜미디어 시대에 데이터가 보여주는 자아는 아무 근거 없이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 우리가 원래 가지고 있던 어떤 표현과 선호에서 비롯됩니다. 다만 문제는 그러한 내용이 특정한 방식으로 확대되고 단순화된다는 데 있습니다.
이를 이해하려면 '자아'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로 돌아가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기 전에는 명확한 '슬롯적 자아의식'을 갖지 않습니다. 배고픔이나 피로처럼 신체 차원의 자기 감각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떤 사람인가', '다른 사람의 눈에 나는 어떤 모습인가'라는 자아의식은 반드시 타인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자신이 비치는 과정을 통해 점차 형성됩니다.
과거에는 이러한 상호작용 속의 투영이 구체적이고 섬세했습니다. 사람들 사이의 이해와 피드백에는 장면이 있고 맥락이 있으며 과정이 있었습니다. 서로 다른 자리에서 서로 다른 측면을 드러냈고, 그 측면들이 함께 자신에 대한 이해를 구성했습니다. 이는 '누적적'이고 '세부적인' 방식으로 자아와 세계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소셜미디어에서는 이러한 투영이 평면적이고 계산 가능한 형식으로 확대됩니다. 예를 들어 '좋아요' 수, 공유 횟수, 댓글의 방향은 '내가 주목받고 있다'는 느낌을 빠르게 만들어냅니다. 마치 세계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자신과 공명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투영의 풍부함과 차이는 평평하게 지워지고, 자아도 과장되고 거칠며 단일한 것이 됩니다. 소셜미디어는 오늘날 상호작용의 세부사항을 떼어내 버렸습니다. 상호작용의 빈도는 높고 공간적 범위도 넓지만, 상호작용의 섬세함은 사라졌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부분에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러한 자기 관찰과 성찰을 통해 '나'에게 서로 다른 모습이 있다는 점만 알아서는 안 됩니다. 그 차이가 슬롯 환경과 기술 매체, 교류의 구조에 의해 어떻게 형성되는지도 더 나아가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는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 사실 더 중요해졌습니다.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를 활용하지 않으면 온라인 소셜미디어의 특수성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소셜미디어의 영향은 단지 전달 방식이나 정보구조를 바꾸는 데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 깊은 차원에서 소셜미디어는 사람의 심리적 느낌과 자기 인식을 통해 우리의 슬롯적 행동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이러한 변화는 경험 속에 내재되어 있어 자신의 상태를 성찰해야만 의식할 수 있습니다.
많은 젊은이가 소셜미디어 연구에 열중하는 것은 사실 그 현상 자체가 새롭고 중요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연구를 통해 자신을 더 잘 이해하려 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를 명확하게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 배후에는 분명 미디어를 이해함으로써 자신을 되돌아보려는 동기가 있습니다.
학술적 훈련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일종의 '역방향 작업'을 더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어떤 특별함이 있는가'에서 출발해 온라인상의 모습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소셜미디어의 구조적 특징, 곧 상호작용 방식과 가시성의 논리, 알고리즘 추천 등을 깊이 이해함으로써 그러한 특징이 자신에 대한 감각과 표현 방식을 어떻게 형성했는지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를 통해 궁극적으로 미디어 메커니즘을 깊이 이해하는 데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미디어를 이해하게 되면 자신에 대한 인식도 그에 따라 달라지고, 자기 자신을 더 잘 파악하게 될 것입니다.
류보: 선생님께서 보시기에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는 개인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경험을 통해 인간과 세계 사이의 관계구조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디지털 시대에 인공지능(AI)을 기반으로 하는 지식 생산 체계는 현실세계의 일종의 '탈경험화'를 초래하며, 이는 경험세계에 대한 인간의 감지 능력을 약화합니다. 인간과 세계의 관계에서 AI가 차지하는 위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또한 개인은 이러한 '탈경험화'의 지식 생산 경향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샹뱌오: 저는 AI를 많이 사용해보지 않아서 찬성하거나 부정하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 분야의 연구자들이 다양한 시도와 논의를 하는 모습은 반갑습니다. AI는 분명 세계를 관찰하는 하나의 방식을 제공합니다.
현재까지 저는 AI가 긍정적인 영향을 만들어낸 사례를 관찰하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많은 사람이 AI를 이용해 텍스트를 생성하고 다듬는 작업을 하는 것은 보았습니다. AI는 분명 효율과 정확성을 높여줍니다. 그러나 바로 거기에 단점도 있습니다.
예전에 우리는 글을 쓸 때 왜 힘들다고 느꼈을까요? 텍스트를 쓰는 것은 고강도의 사고 훈련이기 때문입니다. 글쓰기는 언어와 심상, 사실이라는 세 요소를 유기적으로 결합합니다. 글쓰기란 바로 인간과 세계 사이의 어긋남 속에서 지속적으로 조율하는 일이며, 표현을 통해 사유와 경험, 현실을 다시 연결하고 독자를 함께 생각하는 일에 초대하는 것입니다.
지금 AI가 쓰는 것은 매우 정교하고, 생성되는 텍스트는 갈수록 표준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는 개인이 글을 쓰며 겪는 고투, 사고의 마찰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런 텍스트에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플라스틱 껍데기처럼 정교하지만 죽어 있는 것입니다.
물론 AI가 어떤 측면에서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검색이나 정보 정리, 세부사항의 처리에서 AI는 효율을 높여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유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진정한 사유는 반드시 글쓰기를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젊은 연구자가 글쓰기를 AI에 맡긴다면, 사실 사고 훈련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투를 포기하고 써낸 글은 무의미합니다. 슬롯과학 연구의 목표는 결코 현실의 정보를 모사하거나 데이터를 개괄하는 데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독특한 이해와 표현을 통해 세계에 대한 감각과 의미 창조를 다시 활성화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자기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다른 사람의 이해를 도와, 그들에게 새로운 힘의 감각을 주는 것입니다. 저는 AI가 이 점을 해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AI의 좋은 점은 연구자의 절박감을 높이고, 의미 해석에 관한 연구를 더욱 강조하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AI는 우리에게 다시 인간이 될 것을 요구합니다. AI의 등장은 개인이 자신을 되돌아보고 주체성을 세우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체성을 소모시킵니다. AI는 어느 정도 단기적으로 연구자의 논문 발표 속도를 높여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눈앞의 작은 이익을 챙기는 일입니다.
계속해서 기술적이고 요약적인 연구에 종사한다면, 곧 AI를 당해낼 수 없다는 점을 알게 될 것입니다. AI로 짜깁기한 논문들이 고도로 '동질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AI가 대체할 수 없는 영역, 곧 사유와 느낌, 표현, 공명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이것이 제가 글을 쓰는 사람이 겪는 '고투'라고 말한 것입니다.
인간은 다시 '고투'를 마주해야 합니다. 세계의 복잡성과 불확실성, 언어의 한계와 왜곡을 마주해야 하며, 다른 사람과 공동의 느낌을 형성하고 사유의 차원에서 공유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고투'가 주체성이 생성되는 순간입니다.
주체성은 사방에 벽을 세워 자신을 세계로부터 격리하는, 이미 완성된 방이 아닙니다. 개인이 이해와 표현의 어려움 속에서 끊임없이 형성해가는 것입니다. 언어와 느낌을 서로 맞추려고 애쓰고 타인과 사유의 공명을 이루려 할 때, 이러한 소통의 노력과 표현의 어려움이 바로 '다시 인간이 되는' 과정입니다. 그것은 내적인 성찰이면서 동시에 외부와의 연결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AI의 등장은 오히려 우리가 다음 사실을 더 분명하게 의식하도록 합니다. 인간이 인간인 까닭은 이해하고 표현하는 과정에서 그 불확실한 '고투'를 감당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많은 사람이 AI로 작성한 지원서와 추천서를 받습니다. 언어가 유창하고 표현이 정확하다는 점을 분명히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읽을 때는 '아무런 느낌이 없고', 머릿속에 인상을 남기지 못합니다. AI식 글쓰기가 가져오는 이러한 무감각은 우리가 AI를 싫어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글에 진정성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평소 우리의 글과 표현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그 안에서 저자의 소통하려는 충동과 절박함, 정말로 표현하고 싶은 의도를 느낄 수 있습니다. AI를 통해 우리는 언어가 소통성을 잃고 비소통적인 표현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AI가 생성한 것은 '플라스틱 꽃'과 같습니다. 정교하지만 생명력이 없습니다. 모두가 AI를 이용해 정교하게 글을 쓰고 표현한다면, 세계는 '플라스틱 꽃'으로 뒤덮일 것입니다. 그때 진짜 풀 한 포기를 보아야 비로소 마음이 움직일 것입니다. 연구자는 세계가 '플라스틱 꽃'에 잠긴 상황에서 진짜 풀 한 포기를 지키듯이 AI를 사용해야 합니다.
류보: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플라스틱 꽃'은 매우 생생한 비유입니다. AI 시대의 지식 생산과 인간관계를 일종의 '플라스틱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형식은 표준적이고 정교하지만 내적으로는 생명력이 부족하며, 개인의 진정으로 가치 있는 감정과 실제로 표현되는 의미를 서로 분리하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샹뱌오: 저는 그 표현이 매우 흥미롭고 성립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플라스틱화'는 '표준화'와 다릅니다. 단지 형식이 통일된다는 뜻이 아니라, 고도로 정밀한 가소성과 생명력 없는 질감을 더욱 강조합니다.
AI는 사용자의 요구에 따라 내용을 맞춤 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바탕은 '플라스틱화'되어 있으며, '투명하지만 통기성은 없는' 심상을 만들어냅니다. AI는 플라스틱화를 지식 생산의 위험한 경향으로 확산시킵니다. 형식은 극도로 정밀하지만 내용은 점차 생명력을 잃는 것입니다.
학문을 하는 관점에서 AI를 이해해봅시다. 지식 생산을 단순히 '카메라식' 방식으로 세계를 묘사하고 세계를 어떤 구조적 그림으로 '고정'하는 일로 이해한다면, 그 부분의 작업은 AI가 쉽게 넘겨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학문은 '세계를 한 장의 지도로 그리는 일'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의미를 해석하는 일로 전환해야 하며, 그 해석 과정에서 주체성을 세우고 단련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연구자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신의 시점으로 바라보는 '지도 제작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독자와 손을 잡고 숲을 가로지르는 안내자에 가깝습니다. 자기 자신을 그 안에 들여놓고, 경험을 열어젖히며, 자신을 방법으로 삼아 인간과 세계 사이의 관계구조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AI가 할 수 있는 것은 외적인 형태를 생성하는 일이고, 인간이 해야 할 것은 내적인 의미를 해석하는 일입니다.
5.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와 지식 생산
류보: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는 슬롯과학과 공적 영역에서 많은 논의와 변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자아와 세계의 관계는 어떻게 자기 자신을 통해 세계를 느낄 것인가의 문제로 해석되었고, 이는 일종의 내향적인 사유 패러다임을 촉진했습니다. 지식 생산의 관점에서 볼 때,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는 새로운 지식 윤리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샹뱌오: 어떤 것이 '새로운' 것인지 논증하는 일은 무척 번거롭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가 하나의 지식 생산 방식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더 주목할 만한 것은 그것이 '새로운가 아닌가'가 아니라 그것의 특징입니다.
이러한 지식 윤리는 지식이 거울도 아니고 지도를 그리는 일도 아니며, 무언가를 휘저어 움직이게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지도를 그린다는 것은 세계 바깥에 서서 어떤 지역을 그리는 것입니다.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보는 것이지요. 지식은 경관입니다. 숲속을 걸어가면서 숲이 어떤 모습인지 보고, 그제야 어떻게 걸어갈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도처럼 숲의 경계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을 경관으로 보든, 무언가를 휘저어 움직이게 하는 것으로 보든, 주관과 객관이 융합되고 자아와 탐색이 융합되어야 합니다. 그 목적은 객관적인 진리를 찾아 세계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데 있지 않습니다. 독자에게 쓸모가 있고, 독자가 힘을 느끼며,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되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고 느끼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류보: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자아'를 통해 바깥을 향해 연구의 공공성을 세워 독자가 읽고 힘을 얻도록 할 수 있을까요? 또 어떻게 안으로는 타자에 대한 민감성을 길러, 그들이 왜 나와 같거나 다른지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을까요?
샹뱌오: 저는 우리가 '범주'(category)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을 통해 공공성을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범주'는 우리가 통상 말하는 '개념'과는 조금 다릅니다. 개념은 일반적으로 지시적인 것입니다. 하나의 개념은 상대적으로 명확한 상태나 대상을 가리켜야 하며, 비교적 분명한 정의와 경계를 지닙니다. 그러나 '부유' 같은 것은 사실 그렇게 명료하게 규정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의 경험적 상태이며, 사람들이 알아보고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개념보다는 범주로 다루는 것이 더 적절할 수 있습니다.
'범주'의 특징은 그 자체로 일종의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는 점입니다. 단순히 어떤 사물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과 사유를 불러일으키고 사람들이 자신의 처지를 그 범주와 연결하도록 이끕니다.
'주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개념으로 다루려 하면 설명하기가 어려워지기 쉽습니다. 경계가 명확하고 기능이 분명한 정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범주로서는 시사점을 지니며, 사람들이 자신의 생활환경과 관계망, 슬롯적 위치 등을 생각하도록 자극할 수 있습니다.
제 말은 연구의 공공성이 반드시 거대한 의제를 다루는 데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공명을 일으키고 사유를 촉발할 수 있는 범주를 제시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물론 대다수 학생, 특히 석사과정 학생에게 공공성을 지닌 '범주'를 직접 제시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다지 현실적이지 않을 수 있으며, 박사과정 학생에게도 반드시 쉬운 일은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학생들의 연구에 공적인 의미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과학은 본래 축적의 과정입니다. '반제품' 같은 연구라 하더라도 개념과 자료, 문제의식에서 진전이 있다면, 앞으로 더 성숙한 성과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학생 단계에서 '범주를 제시하는 것' 말고도, 학생들의 연구가 어느 정도 공공성을 드러내도록 할 수 있는, 더 실현 가능한 방식이 있을까요? 이 점은 저도 아직 완전히 정리하지 못했지만, 계속 논의할 가치가 있는 의제입니다.
저는 우리가 연구를 통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상태가, 사유의 힘을 지니고 공적 논의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무언가로 연구를 구체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공공성'과 '사상성'은 사실 일치합니다.
이른바 '사상성'이란 반드시 매우 체계적인 이론적 틀을 갖추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느끼고 공명할 수 있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잡지 『인물』에 실린 「배달기사, 시스템에 갇히다」를 봅시다. 이 글은 어떤 개념이나 이론적 범주를 명시적으로 제시하지 않았지만, 시스템에 갇혀 있다는 매우 강력한 심상을 제공했습니다. 이 심상 자체가 문제의식을 구성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광범위한 논의와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이 놓인 슬롯적 위치를 성찰하도록 촉발했다는 데 그 공공성이 있습니다. 동시에 이토록 거대한 집단의 노동 상태를 드러냈다는 사실 자체도 공적 가치를 지닙니다. 따라서 유효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만으로도 사유의 힘과 공적 가치를 가질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타자에 대한 민감성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입니다. 어떤 연구는 구체적인 개인을 매우 세밀하고 민감하게 이해하면서도, 그 자체로 더 광범위한 슬롯구조나 공통의 경험을 건드리지는 못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강한 공공성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와 타자에 대한 민감성은 사실 같은 일입니다.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가 강조하는 것은 '나는 누구이고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자신의 느낌과 경험을 통해 슬롯 속의 실제 사람들과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접할 것인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세계를 분석 대상으로 삼겠다"는 데서 출발한다면, 자연스럽게 구체적인 것과 타인에게로 향하게 됩니다. 별도로 "다른 사람에게도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자신에게 상기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를 폐쇄적이고 끊임없이 내면을 들여다보는 과정으로 이해한다면, 실제로 다른 사람을 배경이나 소품으로 여기기 쉬워집니다. 이때는 타인에 대한 민감성을 인위적으로 강조하려 해도 부자연스럽고,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핵심이 처음 이 방법에 들어설 때의 자세와 목적에 있다는 점입니다. 자기 자신을 하나의 입구로 삼아 세계를 보려는 것인가, 아니면 그저 자신을 정리하고 있는 것인가? 이것이 이후에 펼칠 수 있는 이해의 경로를 결정합니다. 출발점이 세계를 향해 있고, 구체적이며 열려 있기만 하다면, 자아와 타인 사이의 긴장과 연관은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입니다.
류보: AI가 우리의 삶에 침투하고 '자기 자신'을 개조할 때,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는 AI를 방법으로 삼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까요? AI는 현재의 학문적 실천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샹뱌오: 이 문제를 논의하려면 중국과 해외의 관점을 이념형적으로 비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AI가 이처럼 큰 영향을 미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중국 슬롯는 AI 같은 신기술에 더 개방적인 태도를 보이며, 실제 도입 속도가 빠릅니다. 둘째, 중국에서는 슬롯과학과 인문학의 분리가 비교적 뚜렷합니다. AI는 슬롯과학과 친화성이 높아 단기간에 '성과'를 내기 쉽습니다. 셋째, '승진하지 못하면 떠나야 하는' 제도적 압력이 적지 않은 학자들로 하여금 연구 속도를 높이기 위해 AI를 혁신적으로 활용하는 데 박차를 가하도록 합니다.
현재 AI가 일으키는 충격은 상당히 큽니다. 중국의 인문슬롯과학은 AI를 마주하여 반드시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합니다. AI는 우리에게 행동하고 합의를 모아, AI가 아직 대체하지 못한 새로운 방향을 탐색하도록 요구합니다. 여기에는 인문학과 슬롯과학을 더욱 긴밀하게 결합하고, 사물에 대한 구조적 기술에서 더 깊은 의미를 지닌 해석으로 전환하는 일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경계해야 할 것은 AI에 대한 정서적 의존입니다. 예를 들어 AI가 의인화되어 사용자의 감정에 맞추어 말할 때, 사용자는 소통에서 의존으로, 사유에서 이끌려가는 상태로 쉽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 소통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서로의 상호작용 속에서 세계에 대한 이해를 갱신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한 이해는 미리 예상할 수 없습니다. 어릴 때 어머니와 다투었던 일, 옆집 아이가 자신을 질투했던 일, 이웃과 오기를 부렸던 일과 같은 풍부하고 독특한 삶의 경험을 생각해보세요. 인간의 경험과 감정의 방향성이라는 차원에서 AI는 '자기 자신'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AI의 의인화는 분명 경계해야 할 사용 방식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우리 자신을 성찰할 계기, 곧 '인간의 AI화'를 성찰할 계기도 제공합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AI의 등장이 사실 좋은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AI화 과정을 중단하도록 우리를 몰아세우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인간의 AI화'는 AI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판에 박힌 형식화, 감정 없는 문헌 정리, 논문 발표를 목적으로 한 생산라인식 글쓰기는 그 자체로 인간의 감각과 언어를 미리 '플라스틱화'하는 일이었습니다. AI의 도래는 이 문제를 확대하고 다시 가시화했을 뿐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인간의 AI화'가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진짜 AI와 맞설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류보: 인간이 AI를 성찰과 세계 인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인간과 세계 사이에 보편적으로 존재하지만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했던 거리감을 의식하게 하는 일이 아닐까요?
샹뱌오: 사실 그 느낌은 '간격'입니다. '거리'가 격차에 대한 거부라면, '간격'은 직접 마주하는 것입니다. 간격이란 두 행동 사이에 놓인 상태로, 앞으로 행동할 수도 있고 뒤를 돌아보며 성찰할 수도 있습니다.
AI 시대에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는 실제로 더욱 절박해졌습니다. AI는 세계를 더 다채롭게 만들지만, 동시에 더욱 종잡기 어렵게 만듭니다. 현실세계 위에 다시 AI가 생성한 시뮬라크르의 세계가 놓이면서, 세계는 더욱 명확히 보기 어려워졌습니다.
따라서 한편으로 우리는 구체적인 자기 자신에게 돌아가, 자신의 범위 안에서 AI의 환각으로부터 벗어나고, 자기 주변에서 출발해 세계를 명료하게 보아야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세계는 복잡합니다. 어느 한순간에 이 세계를 완전히 명확하게 보겠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합니다. 모든 일을 다 생각해서 정리한 뒤 행동할 수도 없습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동시에 명확히 보아야 합니다.
세계가 모호하더라도 자신의 느낌과 생각에 따라 행동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주의를 기울이고, 이를 바탕으로 우선 작은 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비교적 좋은 효과가 있다면, 자신의 생각을 이해한 토대 위에서 계속 행동하면 됩니다.
불확실성 속에서 '걸어가며 살피는' 것입니다. 곧 환각에서 벗어나고, 느낌의 출처를 복원하며, 작은 걸음으로 검증하면서 판단을 축적하는 것입니다.
류보: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는 지식 생산을 지향하는 슬롯과학 연구에 어떤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을까요?
샹뱌오: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어떤 의미에서 슬롯과학의 민주화와 공공화를 촉진하여 사유가 삶의 일부가 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연구를 더 이상 자원이 풍부하고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집단에 한정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생각하고 관찰하며 슬롯에 대한 이해를 형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연구와 사유는 반드시 일련의 훈련이나 하나의 팀을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모든 사람은 이미 일상생활에서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는 것은 이러한 사유를 한층 더 체계화하여 연구에 가까운 상태로 만드는 것일 뿐입니다.
슬롯과학의 민주화 외에도, 그것은 사람들이 삶 속에서 더욱 체계적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삶을 연구 쪽으로 한 걸음 밀어주어 누구나 자기 삶을 성찰할 수 있도록 합니다.
더 나아가 인식론이나 방법론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의 출발점은 거대한 틀이나 구조적 설정이 아닙니다. 경험적인 삶의 의제에서,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이 진정으로 '막힌다', '괴롭다', '혼란스럽다'고 느끼는 지점에서 출발합니다.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는 하나의 삶의 태도이면서 동시에 연구 방법입니다. 그것은 삶 속의 사유와 연구 속의 전문적 사유를 모두 '유기화'합니다.
유기화란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학술회의에 가보면, 어떤 사람들은 단상에 올라 매우 재미없게 논문을 읽습니다. 그러나 논문을 다 읽고 내려와 식사하면서 푸념할 때는 하는 이야기가 모두 흥미롭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기적인 것에서 유기적인 것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하필 재미없는 것들을 골라 논문으로 쓸까요? '논문은 원래 그렇게 써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특정한 '표준화된', '학술적인' 형식을 갖추어야만 연구라고 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반면 삶 속에서 절박감과 문제감을 느끼는 것들은 푸념할 때만 이야기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런 연구는 무기적입니다. 이우의 플라스틱 장난감과 같습니다. 플라스틱은 무기적인 것이어서 마음대로 가공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선명한 색을 칠하더라도 본질은 여전히 플라스틱입니다. 사람들에게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새로운 것이 자라나지 못합니다. 숲속의 나무나 들판의 바람이 아니며, 생명력 있는 촉감이 부족합니다.
그렇다면 '유기적인 사유'란 무엇일까요? '유기적'이라는 것은 사유가 삶 속의 실제 문제에 대한 깊은 감지에서 비롯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흔히 기성의 학술 언어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매우 미묘하고 직관적이며 구체적이어서 곧바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강한 문제감과 절박감을 지닐 수 있습니다.
왜 많은 사람이 하이데거를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로 여길까요? 핵심적인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언어로 포착하기 어려운 실존적 문제들에 응답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가령 '지금 이 순간 나의 존재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와 같은 문제입니다. 그는 체계적인 이론으로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감지에 의해 추동되는 방식으로 '인간이 인간인 것'의 경험적 토대를 탐색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 역시 섬세한 삶의 감지에서 출발합니다. 그는 거대한 이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와 의미, 생활세계에 대한 미시적인 관찰 속에서 유기화된 사유를 수행했습니다.
'유기적'이라는 것은 반드시 슬롯적 심성과 관계되며, 의미의 문제와 관련됩니다. 그 상황 안에 있는 사람에게 이 일이 무엇을 뜻하는지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깥에서 한 번 바라보는 데 그칠 뿐입니다.
'유기적'이라고 해서 반드시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방법으로 삼기'는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비교적 실행 가능한 방안입니다.
편집: 리메이(李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