샹뱌오 막스플랑크연구소 프로필 및 인터뷰(2022)
뭔가 매우 집착하는 사람 ... 같아 보이긴 한데. 샹뱌오가 막스플랑크연구소장에 취임한 이후의 궤적을 가늠해보고 싶어 프로필,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과 인터뷰를 AI로 번역했다.
관심 분야: 이동성, 중개자, 정치경제, 중국, 인도, 동남아시아
1980년대 중국의 격렬한 이념 논쟁 속에서 성장하면서, 저는 거대한 철학적·정치적 사상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래서 1990년 베이징대학교에서 슬롯학을 공부하기로 했습니다. 동시에 저는 제 고향인 원저우의 사람들에게도 깊이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중국 동남부 해안의 중규모 도시인 원저우는 민간경제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규모 사업가들이 삶을 대하는 방식은 교과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거대한 사상과 작은 행위 사이의 이러한 긴장이 저의 지적 여정을 규정해 왔습니다.
교과서의 이론에 환멸을 느낀 저는 학부와 석사과정 시절 대부분의 시간을 베이징 남부의 한 이주민 공동체에서 보냈습니다. 대부분 원저우 출신이었던 이주민들은 도시에서 합법적인 지위를 갖고 있지 않았으며, 정부에 의해 주기적으로 일제 단속을 당하고 강제 송환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원저우와 중국 전역의 도시들을 연결하는 연결망을 구축함으로써 활기찬 의류산업을 발전시키고 부유해질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연결망은 교역을 촉진했을 뿐 아니라, 국가의 경직되고 영토적으로 구획된 구조를 우회하고, 때로는 그 구조를 활용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주민들의 작은 행위들은 제게 커다란 교훈을 주었습니다. 중앙집중적인 정치구조, 분절된 지방 국가권력, 그리고 통합적으로 작동하는 비공식경제 사이의 상호작용이 중국을 변화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저는 그 공동체에 관한 제 기록이 '민족지'이며, '인류학'이 제게 잘 맞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옥스퍼드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호주에서 일하는 인도 출신 이주 컴퓨터 엔지니어들을 주제로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첨단기술 부문에서는 초국적으로 연결된 중개업체들, 이른바 '인력 중개업체(body shops)'가 변동성이 큰 노동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제 연구 참여자들과 같은 엔지니어들을 대륙을 가로질러 파견하고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엔지니어들은 인도에 있는 가족, 결혼시장, 카스트에 기반한 슬롯적 연결망에서 자원을 끌어옴으로써 세계 노동시장의 불확실성에 대처했습니다. 우리가 경제적·기술적 세계화라고 부르는 것은 실재합니다. 그 과정이 마을과 가구 수준까지 이어지는 여러 규모의 슬롯관계에 의해 지탱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2004년부터 저는 중국 동북부의 저숙련 노동자들을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 일자리에 알선하는 상업적 중개자들을 연구했습니다. 이 중개자들은 질서를 만들어 냄으로써 돈을 법니다. 다시 말해, 복잡한 위계관계를 만들어 지대를 추구하고 해외의 이주민들을 규율하는 것입니다. 2008년부터는 중국 서북부에서 동남부로 이주한 무슬림들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그곳에서 아랍어와 중국어 사이의 통번역자로 일하고, 외국인 무슬림 상인들을 대신해 현지 상품을 구입하는 대리인으로도 활동합니다. 저는 중국 국가가 촉진하는 무역의 세계화와 국가가 억제하는 종교의 세계화에서 이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유학 이주, 귀환 이주, 그리고 급변하는 지정학에 관한 중국 대중의 인식도 연구했습니다.
하지만 박사학위 취득 후 수행한 이러한 연구 프로젝트들에는 혼란과 불안이 끊임없이 따라다녔습니다. 인류학자로 자리 잡으려 했던 저는 최신 영미권 문헌에서 이론적 의의를 인정받을 만한 연구를 찾아 나섰고, 이 분야를 이끄는 학자들처럼 말하고자 열망했습니다. 저는 실패했습니다. 이주민과 중개자들의 삶에 관한 개념들을 만들어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할 수는 있었지만, 그 길을 계속 걸어가고 싶을 만큼 제 흥미를 끄는 새로운 이해에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더 나쁜 것은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들을 점점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제 자신에게도, 세계에도 낯선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절박하게 돌파구를 찾던 저는 2010년대 초부터 더 폭넓은 독자를 위한 글을 쓰고 중국어로 인터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젊은이들이 자신의 딜레마와 걱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이론을—그렇습니다, 이론을!—얼마나 절실하게 요구하는지에 놀랐습니다. 젊은이들은 왜 상황이 지금과 같은 모습인지, 왜 자신이 지금과 같은 감정을 느끼는지 알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다르게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을지 묻습니다. 그들은 삶의 경험 자체를 연구하는 학문인 인류학이 많은 것을 제공할 수 있음을 제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요컨대, 그들은 제가 제 학문의 가치를 재발견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막스플랑크연구소(MPI)에서 저는 '삶을 위한 인류학(anthropology-for-living)'을 실험해 보고자 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더 나은 공동의 삶을 만들어 가는 데 활용할 수 있는 통찰을 제공하는 연구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학술적인 질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씨름하고 있는 관심사에서 출발하는 접근법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관심사는 객관적인 슬롯적 모순에 대한 사람들의 주관적 경험을 반영합니다. 절실하게 느껴지지만 좀처럼 명확하게 표현되지 않는 이러한 관심사들은 기존의 이론과 방법으로 쉽게 분석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러한 접근법이 이론적 혁신을 위한 공간도 열어 주기를 바랍니다. 저는 저와 제 독자 모두가 중요하게 여기는 현실의 문제에 시간을 쏟고 싶습니다. 우리 부서가 인류학을 실제 사람들의 삶에 유익하게 활용함으로써 인류학을 발전시켜 나가기를 바랍니다.
2021년 막스플랑크연구소(MPI)의 경제적 실험 부서를 출범시킨 이후, 저는 인류학적 연구의 한 접근법을 발전시키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쏟아 왔습니다. 이 접근법은 연구 대상 집단의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무엇을 걱정하고 중요하게 여기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 질문을 찾아내고 자료를 이론화합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점점 커지는 압박감, 과도한 경쟁, 여론의 양극화, 혹은 무력감에 관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심사는 주관적으로 경험되는 슬롯적 모순입니다. 빈곤이나 주변화 같은 관습적인 범주를 적용하는 것만으로는 쉽게 풀어낼 수 없으므로, 새로운 이론적 설명이 필요합니다. 또한 이러한 관심사는 연구자들이 해당 현상의 가장 문제적인 측면을 민감하게 포착하도록 하고, 연구 대상 집단에 의미 있는 통찰을 만들어 내도록 이끕니다.
저는 동료들과 협력하여 우리의 민족지적 사례연구들에 걸쳐 나타나는 유사한 관심사와 주제를 식별하고, 개별 사례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슬롯적 모순을 밝혀내며, 일반화할 수 있는 방법과 개념, 분석틀을 명확히 제시하고자 합니다. 아래에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하겠지만, 부서에서 제가 수행하는 연구 활동은 '프로젝트'를 수행한다기보다 '사유의 갈래들'을 발전시키는 일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이 활동들에는 통상적인 프로젝트와 달리 정해진 기간이나 현지조사 장소, 예산이 없습니다. 이러한 사유의 갈래들은 저와 다른 연구자들이 생산한 자료, 기존 자료와 새로운 자료 등 다양한 출처의 민족지 자료를 공통의 관심사를 중심으로 이론화하고, 새로운 질문을 제기하고자 합니다. 이 과정에서 저는 관련 공중과 함께 공동연구를 수행하는 방법도 탐색할 것입니다.
'유예(Suspension)'
'유예'에 관한 제 연구는 더 나은 삶의 기회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가운데 지금 여기의 문제에 맞서는 데에는 무력해졌다고 느끼는 많은 중국인의 감정에 응답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2014년에 이러한 딜레마를 서술하기 위해 '유예'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이 용어는 소셜미디어에서 빠르게 받아들여졌으며,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의 삶의 처지를 비판적으로 설명하는 데 이 말을 사용했습니다. 이 용어가 학계에서 슬롯로 건너간 일은 제가 이를 더 깊이 탐구하도록 북돋아 주었습니다. 이러한 유예의 감각 이면에는 어떤 정치경제적 틀과 인지적 틀이 있는가? 이 개념은 다른 슬롯적 영역을 분석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인가? 예를 들어, 끊임없이 논문 출판의 압박을 느끼는 학자들이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관여하는 일을 유예하는 학계의 세계를 분석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인가?
'부근(The Nearby)'
'부근' 프로젝트는 '유예'라는 생각이 발전한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2019년의 한 인터뷰에서 저는 중국 대중의 의식 속에서 일어난 '부근의 소멸'이 사람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왜곡한 것은 아닌지 물었습니다. 소셜미디어가 지배적인 정보원이자 의사소통 수단이 되면서, 대중의 인식은 아주 먼 것, 예를 들어 추상적인 민족주의적 감정이나, 아주 가까운 것, 즉 개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사로잡히는 경향을 보입니다. 슬롯적 삶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성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공적 논쟁의 양극화와 일상적 실천에서의 무력감에 일조할 수 있습니다.
그 인터뷰로부터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중국 각지에서 제목에 '주변'을 넣은 미술 전시가 적어도 네 차례 열렸습니다. 저는 더 깊이 탐구해야 할 바카라임을 느꼈습니다. 어떤 물질적 힘들이 주변의 의미를 비워 내고 있는가? 전자상거래인가, 소유관계인가, 기층의 통치인가, 소셜미디어인가, 아니면 이 모든 것인가? 우리가 일상생활을 조직하고 슬롯를 이해하는 방식에서 주변이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어떻게 주변을 공적 의식과 공적 삶 속으로 되돌려 놓을 수 있는가? 2022년 초에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정기적인 집단 토론과 예술 워크숍을 통해 이러한 질문들을 탐구합니다.
코로나19와 이동성
저는 이동성 연구실(Mobility Lab)의 일환으로 코로나19 팬데믹의 영향을 성찰하는 데에도 공통의 관심사 접근법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세계 여러 지역의 사람들은 바이러스 자체보다 슬롯의 파편화를 더 걱정하는 듯합니다. 공동의 실존적 위협에 직면했음에도 슬롯는 더욱 분열되었고, 공적 신뢰는 약화되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중국의 이동 제한을 사례로 검토함으로써, 코로나19 이전과 유행 기간 모두에 걸쳐 슬롯적 쇠퇴, 즉 슬롯적 연대의 소멸을 초래하는 메커니즘을 탐구합니다. 이를 통해 슬롯적 복구의 가능한 수단을 구상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슬롯적 복구란 체계의 즉각적인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보통 시민들이 자신의 삶의 조건을 바꾸기 위해 취하는 행동을 뜻합니다.
문제의식(The Question Consciousness)
공통의 관심사 접근법을 발전시키려면 슬롯적 관심사가 실제로 학술적 질문을 어떻게 형성해 왔는지 검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제의식' 프로젝트는 글로벌 사우스의 연구자들에게 자신이 어떤 연구 질문을 던져 왔는지, 왜 그러한 질문을 던졌는지, 그로 인해 어떤 효과가 생겼는지, 그리고 어떻게 의미 있는 지적 의제를 발전시킬 수 있을지 성찰하도록 요청합니다. 일련의 워크숍과 공동 집필 작업을 통해, 우리는 글로벌 사우스의 연구가 지역의 관심사와 더욱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동시에 전 세계적으로도 유의미해지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글로벌 사우스의 젊은 학자들이 세계적인 사상가로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 자신의 연구 활동은 끊임없이 발전하겠지만, 그 모든 활동은 하나의 포괄적인 노력으로 모일 것입니다. 그것은 부서 안에서 하나의 사고방식을 길러 내고, 특정한 유형의 연구 실천을 전 세계적으로 옹호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연구는 질문을 찾아낼 때 공통의 관심사에서 출발하고, 연구 참여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문제화하는 방식에 따라 자료를 분석하며, 이론화 과정에서 정동과 정치경제를 연결하고, 마지막으로 연구 과정 전반에 걸쳐 다양한 공중과 소통합니다.
샹뱌오 교수와의 인터뷰
인터뷰: 즈데네크 우헤레크, 아담 호랄레크¹
샹뱌오(Biao Xiang)는 2020년부터 독일 할레안데어잘레에 있는 막스플랑크 슬롯인류학연구소의 경제적 실험의 인류학 부서장을 맡고 있다. 연구소의 세 부서 가운데 하나인 이 부서를 설립하기 전에는 옥스퍼드대학교 세인트휴스 칼리지의 교수로 재직했다. 샹뱌오는 2006년 옥스퍼드에서 박사학위논문 『글로벌 인력 중개(Global Body Shopping)』를 완성했다. 그는 경제인류학과 이주에 초점을 맞춘 연구로 저명한 인물이 되었다. 지금까지 100편이 넘는 논문과 저서를 발표했으며, 그중 상당수는 인류학 전반의 이론과 방법론, 그리고 슬롯에서 슬롯인류학이 차지하는 위치를 다룬다. 막스플랑크 슬롯인류학연구소는 특히 중부 유럽의 학계에서 핵심적인 기관이자 박사과정 학생들과 중견·원로 연구자들이 만나는 중요한 거점이다. 이에 우리는 신임 부서장에게 부임 후 처음 겪은 경험, 개인적인 학문적 목표, 슬롯인류학의 방향에 관한 구상, 그리고 학계와의 소통 계획을 물었다.
¹ 이 글은 2022년 10월 28일 프라하에서 우리 세 사람이 나눈 대화를 옮긴 것이다. 명료성을 위해 일부를 편집하고 내용을 보충했다.
교수님, 부서 이름이 다소 독특합니다. 부서의 사명과 주된 관심사를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이 부서의 주된 사명은 특정한 질문이나 주제를 다루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새로운 방식의 연구 실천을 탐색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학술적인 질문에서 출발하고 싶지 않으며, 학술 지식의 축적에만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슬롯 속의 사람들이 자신이 살아가는 조건을 이해하고 생각하는 데 활용할 수 있는 새로운 개념, 새로운 관점, 때로는 그저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내고자 합니다.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하고 싶은 것이지요.
제게 하나의 사례이자 본보기가 되는 인물은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존 듀이입니다. 그는 삶을 위한 철학을 주창했습니다. 듀이에게 철학이란, 사람들이, 곧 공중이 세계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도록 철학자가 세계를 서술하는 방식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이 세계가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신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주어진 상황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지를 숙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개발하려는 연구 결과나 도구도 이런 종류의 것입니다. 저는 이를 '공통의 관심사 접근법'이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서 무엇을 걱정하는지에서 출발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기후변화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젊은이들에게 기후가 걱정되는지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개념적으로는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일상적인 분투에 실제로 영향을 미칠까요? 저는 의문입니다. 그들은 훨씬 더 구체적이고 당장 닥친 수많은 문제를 처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묻기도 합니다. "개인인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기후는 정말이지 제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밖에 있는걸요." 솔직히 말해, 반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기후 문제에 관해 자신들을 끊임없이 훈계하는 사람들이 엘리트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런 환경 담론에서 소외감을 느낍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기후변화를 걱정하지 않는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그들에게 "지금 무엇이 걱정되나요?"라고 묻는다고 해 봅시다. 물론 이런 질문을 꺼내기 전에는 어느 정도 이야기를 나누어야겠지요. 중국의 많은 젊은이, 특히 여성들이 걱정하는 문제 가운데 하나는 아이를 낳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입니다. "결혼해야 할까? 아이를 가져야 할까?" 그리고 많은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아시다시피 중국의 출산율은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젊은이들이 걱정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런 물음입니다. "이 세계는 망가졌고, 아이들은 이 모든 폭염과 예측할 수 없는 날씨를 겪어야 하며, 별다른 희망도 없는데, 내가 왜 이 세계에 새로운 생명을 데려와야 하지?" 지금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인 젊은 세대는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기쁨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기후를 걱정하는 방식은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좋아, 우리는 아이를 낳지 않을 거야"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당면한 관심사는 관습적인 형태의 가족생활을 포기해야 할지 여부입니다. 이러한 관심사는 기후변화와 관련되지만, 아이를 가져야 할지 말아야 할지 생각할 때는 다른 많은 문제도 얽혀 들어옵니다. 부동산 가격, 성역할, 부모의 압박 등이 모두 한데 모이는 것이지요. 이러한 복잡성 때문에 그 관심사는 매우 현실적인 것이 됩니다. 그들이 기후변화에 관해 무엇을 생각하는지, 혹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더 알고 싶다면, 아이를 가질 것인지 같은 그들 자신의 질문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이런 종류의 질문은 곧바로 그들의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리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기후변화에 관한 유엔 자료만 제시한다면, 특정한 사안에 대한 인식은 높일 수 있겠지만, 이 세계에서 개인의 실질적인 행위능력이 무엇인지, 어떻게 삶을 다르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논의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공통의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한 가지 사례입니다. 공통의 관심사는 미리 규정된 의제와는 매우 다릅니다. 공통의 관심사를 살펴볼 때 우리가 묻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이 문제들은 사람들의 삶에서 실제로 어떻게 전개되는가? 주어진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이것이 우리 부서가 하는 일입니다.
우리 부서는 삶을 위한 인류학을 어떻게 과학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지 탐색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관심사들을 찾아내고 풀어헤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즉, 이러한 관심사들이 생겨나는 원인, 특히 정치경제적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혀내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려는 것은 심리학적 분석이 아닙니다. 물론 공통의 관심사에는 심리적인 차원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그것은 사람들이 자신이 살아가는 현실을 지각하고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그다음에는 연구 대상자들과 함께 '공동연구(co-research)'를 수행하는 실험을 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관심사를 파악하고 서술한 뒤, 연구 대상 집단이 우리의 서술에 동의하는지 살펴봅니다. 이어서 그 관심사들의 원인은 무엇이며, 이런 관심사들이 어떤 잠재적인 행동 변화를 낳을 수 있는지에 관한 잠정적 분석을 발전시킬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대중매체를 통해, 그리고 예술가나 언론인과 협력하여 공중의 반응을 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왕복 운동을 통해 반드시 이론이라기보다는 일련의 서술, 곧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경험을 성찰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언어를 발전시키고자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전반적인 사명입니다.
이러한 사명을 설정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주 단순합니다. 저는 그저 21세기의 슬롯연구가 이전의 방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중의 교육 수준은 극적으로 높아졌고, 젊은이들은 글을 읽을 수 있으며 또 읽고 싶어 합니다. 사실 그들은 삶과 세계의 의미를 많이 생각하기 때문에 상당히 정교한 이론에 목말라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소셜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새로운 기술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학술지 논문을 쓰는 일에 우리 자신을 가두어야 할까요?
오늘날 세계에 변화를 일으키고자 한다면 대중의 동원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생활양식과 기본적인 이해 방식을 바꾸지 않는다면, 단순한 기술적 처방만으로는 오늘날 세계의 중요한 문제 가운데 어느 것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세계의 많은 정치적 대립은 상당 부분 공통의 관심사나 상식을 둘러싼 싸움입니다. 미국에서는 트럼프 지지자들과 민주당 지지자들이 서로 대화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동의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을 사실로 인정할 것인지, 자신이 살아가는 조건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와 같은 매우 기본적인 문제들입니다.
많은 사람이 혼란과 불안을 느낍니다. 공중에게는 자신이 걱정하는 문제들을 끝까지 생각해 나가는 데 도움이 되는 언어가 정말로 필요합니다. 결국 진정으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주체는 사람들 자신이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도구를 제공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새로운 접근법에는 새로운 현지조사 방법론이 필요하겠군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를 위한 일련의 방법과 연구 프로그램을 개발하고자 합니다. 그러려면 하나의 부서가 필요합니다. 공통의 관심사에서 출발하여 연구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학술적인 질문이나 이미 인정받는 의제에서 출발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습니다.
부서에서 진행하는 공동 프로젝트를 하나 예로 들겠습니다. 박사후연구원인 마리오 슈미트가 이끄는 프로젝트로, '압박감'을 다룹니다. 세계 여러 지역의 젊은이들은 자신이 가난하다고 느끼지 않으며, 반드시 주변화되었다고 느끼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주류 정치에 대해서는 점점 환멸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들은 불평등을 걱정할까요? 개념적으로는 그렇습니다. 불평등은 객관적인 사실로서 언제든 비판할 수 있는 대상입니다. 누구나 불평등은 나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불평등 안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살펴보면, 그들의 당면한 관심사는 그 불평등한 체계 안에서 어떻게 올라갈 것인가입니다. 그들은 체계가 나쁘다는 것을 알지만,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로 인해 압박감이 생깁니다. 그들은 자신을 발전시키고 다른 사람보다 앞서기 위해 끊임없이 분투해야 합니다. 하지만 도덕적으로는 자신의 삶 전체에 문제가 있다고 느낍니다.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과 도덕적 부담을 감당해야 한다는 압박이 함께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압박감'을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다면, 젊은이들에게 직접 와닿는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소통은 '불평등'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보다 훨씬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연구는 어렵습니다. 압박감과 같은 개념에서 출발하면 많은 것이 얽혀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공통의 관심사 가운데 상당수는 경제적 기회, 개인적 관계, 교육제도, 생활비 등에 동시에 걸쳐 있습니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삶은 복잡합니다! 그렇다면 하나의 관심사에 어떻게 명확하고 전문적인 정의를 부여할 수 있을까요? 그것을 기존 학술 문헌과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까요?
다른 한편으로, 이것이야말로 인류학이 포착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절실하게 느끼지만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어떤 것이지요. 우리는 그것을 풀어헤치고 차근차근 구체화할 새로운 방법과 언어가 필요합니다. 아직은 실험 중입니다. 물론 현재의 상황을 이해하려면 여전히 과거의 지적 자원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과거의 지적 자원은 대개 매우 전문화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에 관한 연구이고, 저것은 가족에 관한 연구라는 식이지요. 그러한 전문화는 우리가 연구 질문을 제기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이것은 종교학에 기여하는 질문인가? 아니면 가족연구에 관한 질문인가?
전반적인 삶의 조건에 관해 질문하면 학문 지형 속에서 길을 잃은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철학을 참고할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매우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관심사를 이야기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과학적'인 일련의 방법을 만들어 내지는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연구자들이 서로 다른 사례에 유사한 방법을 적용할 수 있을 만큼 체계적인 무언가를 얻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부서 명칭에서 '경제적 실험'은 무엇을 뜻합니까? 말씀하시는 구상은 그보다 훨씬 폭넓은 것 같습니다.
'경제적 실험'이라는 이름을 생각해 낸 것은 2019년에 제가 세계를 진단했던 방식 때문입니다. 저는 세계가 무게중심이나 방향감을 잃었다고 생각합니다. 금융위기 등을 거친 뒤 많은 사람은 세계경제에 어떤 체계적인 변화가 일어나리라고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위기조차 세계경제를 변형시키기에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플랫폼 경제처럼 여기저기서 많은 단편적이고 실험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동시에 우리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에 대한 뚜렷한 감각은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일종의 실험뿐입니다. 무엇이든 예측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막스플랑크의 직바카라을 맡았을 때, 이런 실험들을 기록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우리의 현재 초점은 다릅니다. 상황이 얼마나 빨리 바뀌었는지요! 우리는 실험 사례를 기록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의 기본 진단은 그대로입니다. 핵심은 세계경제를 하향식으로 재설계하는 데서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경제는 생활양식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플랫폼 기업은 슬롯관계와 대단히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기업들은 실제로 슬롯관계에서 돈을 벌며, 인구의 상당 부분을 포섭하고 사람들이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고 있습니다. 정동과 감정이 중요해졌습니다. 공통의 관심사는 이전보다 더 복잡해졌지만, 슬롯변화에 대해서도 더 중요해졌습니다. 저의 기본 진단은 같지만, 대응 방식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그 이름을 생각해 낸 것은 2년여 전, 아직 옥스퍼드에 있을 때였습니다. 당시에는 실험 사례를 기록하는 전통적인 방식의 연구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개입을 더 강조하고 사람들에게 더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이런 종류의 공동연구 쪽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름은 그대로 둘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이름을 너무 꼼꼼하게 읽지 않기를 바라면서요. [웃음]
지역적으로 특별히 선호하는 곳이 있습니까?
첫째는 중국이 중국인 자신에게조차 정말로 세계적인 수수께끼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 일어나는 일은 전 세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중국은 단순히 하나의 사례가 아니라 하나의 패러다임입니다. 특히 오늘날 중국에서 일어나는 온갖 극적인 변화는 면밀한 주의를 요구합니다. 둘째, 공통의 관심사는 서로 공유하는 관심사이지만, 그것이 드러나는 양상과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은 언제나 지역적으로 특수합니다. 진정한 공동연구를 하고자 한다면 특정한 공중을 선택해야 합니다. 전 세계의 공중과 의미 있는 방식으로 대화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중국이 일종의 실험실이자 출발점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에서 어떤 것을 관찰하고, 그것이 그 맥락 안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는 것이지요. 그런 다음 서로 다른 지역에서 연구하는 학자들과 학술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이 처음 자라난 기반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중국에 더 집중하기로 했다는 사실에 저 자신도 놀랐습니다. 저는 진지하게 인도 연구를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2년 전 우리가 세운 지역적 연구 계획이었는데, 이제 생각이 바뀐 것입니다. 물론 연구에서 비교는 이루어지겠지만, 초점은 선명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 부서가 중국연구 조직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부서 구성원들은 매우 세계적인 시야를 지니고 있으며,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우리는 연구 지역과 관계없이 우리의 의제를 공유하는 사람들을 찾습니다. 즉, 공통의 관심사가 이끄는 인류학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다만 중국이 질문을 끌어내는 주요 원천이자, 초기의 생각들을 시험하는 실험실이 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인류학의 고전적인 덕목, 곧 한 지역슬롯에 대한 헌신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한 지역슬롯에 헌신하지 않는다면, 그곳 사람들이 어떤 공통의 관심사를 지니고 있는지조차 알아낼 수 없습니다. 누구나 어느 슬롯에든 가서 기후변화 문제를 연구할 수 있고, 자신이 찾는 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새로운 질문이 나오지 않으며,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에 가닿지도 못합니다. 더욱이 우리는 공중과 대화를 이어 가고자 합니다. 우리의 이해가 옳은지, 우리의 해석을 공중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자 합니다. 그러려면 정말로 그 지역에 대한 헌신이 필요합니다.
비교연구가 주된 방법이 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상호참조(inter-referencing)'라고 부르는 것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있습니다. 상호참조는 비교와 어떻게 다를까요? 비교란 서로 구분되는 두 개 이상의 사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상호참조란 한 지역적 맥락 안에서 삶의 조건을 살펴보면서, 다른 맥락의 상황을 참조하여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입니다. 비교는 어떤 식으로든 모든 구체적인 사례 위에 서서 그것들을 넘어서는 위치를 함축합니다. 반면 상호참조는 하나의 맥락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되,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관찰한 내용을 분석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부서 회의에서는 각자가 서로 다른 지역적 맥락에서 수행한 연구 사례를 자주 논의합니다. 하지만 그 사례들이 얼마나 비슷하거나 다른지 알아내려고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이 사례 A에 관해 관찰한 내용이 내가 사례 B를 더 깊이 이해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 이것은 위계적인 유형이고, 다른 것은 수평적인 유형이군……"이라고 말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관점을 빌려 오는 것입니다. 이는 지역에 뿌리내린 사고방식입니다. 당신은 사례 A에 충실하고, 저는 사례 B에 충실하며, 우리 중 누구도 A+B라는 초월적인 위치로 자신을 끌어올리는 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상호참조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늘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체코인 동료가 "독일 사람들은 대학 강좌를 이런저런 방식으로 운영한다더군……"이라고 말할 때, 관심은 비교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더 깊이 성찰하려는 것이지요.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제대로 하고 있는가? 어떻게 다르게 할 수 있을까?
이러한 공통의 관심사의 인류학은 어떤 종류의 이론을 발전시키게 될까요? 이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이 없다고 인정해야겠습니다. 우리는 분명 이론을 발전시키고자 합니다. 공중이 그 그림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알아보고, 어떻게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 알 수 있도록 삶을 서술하고자 합니다. 물론 이 그림이 곧 이론입니다. 그렇다면 이 이론은 어떤 모습일까요? 저도 모릅니다. 제 짐작으로는 철학, 심리학, 그리고 우리의 토대를 이루는 정치경제학이 혼합된 형태일 수 있습니다.
중국의 과도한 경쟁에 관해 제가 관찰한 내용을 짧게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이를 통해 이론화가 어떻게 우리의 연구 실천의 일부가 될 수 있는지 조금이나마 감을 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중국의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언제나 서로 경쟁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그것을 피곤하고 무의미하다고 여깁니다. 학교에 다닐 때는 공부하는 내용을 즐기기보다 다른 사람보다 잘하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이나 회사에서 보내는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은이들에게는 자신이 좋아하지도 원하지도 않는 경쟁에 왜 갇혀 있는지를 이해할 이론이 필요합니다.
그들의 관심사에서 출발하여 저는 하나의 모순이라고 이해되는 것을 봅니다. 개인 수준의 치열한 경쟁과 체계 수준의 자원 및 권위의 집중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입니다. 이 체계 수준은 철저하게 반경쟁적입니다. 중국 슬롯에서 가장 경쟁적인 영역은 어디일까요? 상업은 아닙니다. 상업에서 사람들은 경쟁을 피하려고 합니다. 누구나 '틈새시장'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시장이 경쟁에 기반한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이데올로기입니다.
가장 심하거나 치열한 경쟁은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요? 학교입니다. 근대 교육은 모든 인간을 동등한 토대 위에서 길러 내고, 어니스트 겔너의 표현을 빌리면 근대 국민국가의 기반이 되는 상호 교환 가능한 시민들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렇지요? 그렇다면 학교는 모든 곳 가운데 경쟁이 가장 적고 평등을 가장 많이 증진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토록 지옥 같은 교육 경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것이 체계 차원의 중앙집중화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이 이처럼 경쟁적으로 된 것은 단일한 권위가 무엇이 좋은 교육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체코공화국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중국에서는 14억 인구 전체가 최고의 대학은 단 두 곳뿐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이제는 세계적으로도 엄청난 인기를 누리며 아무런 의문 없이 받아들여지는 대학 순위표가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모순적입니다. 미국에서는 사람들이 언제나 다양성을 이야기하지만, 엘리트 가정이 자녀의 진로와 교육에 관해 내리는 결정을 보면 극도로 동질적입니다.
교육제도를 어떻게 조직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이러한 중앙집중적 권력은 그 제도 안에서 개인들 사이의 경쟁을 극도로 치열하게 만듭니다. 모두가 하나의 기준에 따라 이 단일한 권위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같은 게임에 들어오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경쟁은 더 치열해집니다. 이것은 다양성 없는 민주주의의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을 뒤흔들고자 할 때 어디에서 출발해야 할까요? 이 중앙집중적 권위의 힘을 어떤 식으로든 약화해야 할까요? 젊은이들이 또래 관계, 지식의 본질, '공부'의 의미에 관해 새로운 이해를 발전시키도록 장려해야 할까요? 아니면 부모들이 이러한 압력솥 같은 교육방식을 지속시키는 동시에 그것에 반감을 느끼기도 한다는 점에서, 가족 내 세대 간 관계를 생각해야 할까요?
그들의 견해를 듣기 위해서는 '공동연구'가 필요합니다. 이 과정에서 더 깊이 있는 이론들이 나올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또래 관계는 제도적 구조에 의해 어떻게 조건 지어지는가? 젊은이들은 자신의 가치나 타인의 가치를 어떻게 판단하는가? 그런 질문들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직면한 주요 과제 가운데 하나는 공통의 관심사가 매우 모호하고 다면적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론적 혁신을 위한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기존의 언어로 현실을 포착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세계를 서술하는 새로운 방식을 찾아야만 하는 것이지요.
어떤 경험을 통해 이러한 접근법에 이르게 되셨습니까?
여러 해에 걸쳐 축적된 경험이 저를 이끌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학술연구, 특히 제가 지적으로 성숙해진 1990년대 이후의 연구에서 소외감을 느꼈습니다. 중국어 문헌과 영어 문헌 모두에 대해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많은 글이 상당히 생기 없다고 느낍니다. 인류학의 많은 서술이 인상적이고 감동적인 글이 되려 한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제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글에 묘사된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도 건드리지 못한다고 저는 거의 확신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인류학보다 경영학이나 심리학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보입니다. 저는 왜 그럴까 하고 묻습니다. 한 가지 이유는 연구자 측의 문제적인 죄의식일 수 있습니다. 연구자들은 언제나 사람들의 행위능력을 찬양하려 하며, 외부인의 눈에는 이해되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인류학의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터무니없어 보이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 뒤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식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정말로 그것이 필요할까요? 물론 사람들은 자신이 이상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겨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고,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행위능력의 발휘라고 결론 내리는 것이 삶의 목적일까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바꾸고 싶어 하고, 비판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약자의 무기'라는 방식으로 행위능력을 발휘하는 데 진저리가 나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러한 소외감 때문에 저는 2014년 무렵부터 중국어로 대중적인 글을 쓰고 중국 매체와 대중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제 지적인 외로움을 달래려는 무의식적인 시도로 시작된 것 같습니다. 중국의 젊은이들로부터 정말 많은 반응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엄밀한 의미에서 전문적인 학술연구는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상호작용은 저를 생각하게 하고, 이런 방식으로 생각할 때 저는 정말로 행복감과 해방감을 느낍니다. 저는 더 이상 말만을 통해 생각하지 않습니다. 감정과 상상력을 통해 생각하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어떤 공통의 관심사든 거의 언제나 동시에 중대한 정치적 관심사나 쟁점이 됩니다. 중국에서 공통의 관심사를 연구하고 논의할 가능성은 어느 정도입니까?
음, 지금 중국에서는 의미 있는 주제라면 무엇이든 민감합니다. 사실 공통의 관심사는 다른 주제보다 낫습니다. 민주주의를 논의하는 것보다는 경쟁, 압박감, 아이를 가질지에 관한 결정을 논의하는 편이 더 '안전'하지요.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중국의 슬롯연구가 새롭게 직면한 과제는 증거에 기반한 설명을 만들어 내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중대한 변화가 너무나 많이 일어나고 있어서, 사실에 관한 확정적인 설명에 도달할 만큼 충분한 정보를 끝내 수집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투명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깁니다. 하지만 독일 같은 나라에서도 슬롯생활이 너무나 복잡해지고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어떤 현상을 안정된 대상으로 붙잡아 두고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밝혀내기가 어렵습니다. 독일에서 극우가 대중적인 지지를 얻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 누가 정확히 짚어 낼 수 있을까요? 왜 그토록 많은 사람이 기후변화에 무관심하거나 코로나19 백신 접종에 반대할까요?
이러한 상황에서 저는 공통의 관심사 접근법이 가치 있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최근에 쓴 글 가운데 하나는 중국의 코로나19 봉쇄에 관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서술하고 분석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결론을 내리기에는 정보가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아주 분명하게 보였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부조리하다는 느낌이 널리 퍼져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무엇이 정확히 그 부조리를 초래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것이 부조리하다는 사실은 압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조리의 감각이 정부와 삶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압니다.
따라서 현실이 아무리 붙잡기 어려워 보이더라도, 공통의 관심사는 현실에 관여하는 좋은 진입점이 됩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이 정리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정보를 모으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온갖 불확실성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고, 지금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그들이 처한 당장의 환경을 이해하고, 무엇을 특히 부조리하다고 여겼는지, 또 왜 그렇게 여겼는지를 기록하고 분석함으로써, 우리는 부조리한 시대에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부분적인 도구들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²
21세기의 필요에 부합하는 인류학적 연구는 어떤 유형일까요? 물론 제가 학문 전체를 대변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저의 가장 큰 관심사가 무엇인지 알고 싶으시다면, 제 질문은 이것입니다. 작은 개인은 거대한 변화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 이러한 변화들은 엄청나며, 작은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또한 예측할 수 없고, 많은 사람에게는 이해할 수조차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을 생각해 보십시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벌이는 전쟁이나, 다음 선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미국을 생각해 보십시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이러한 변화에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의 관심사는 이렇습니다. "이런 시대에 어떻게 윤리적이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물론 인류의 역사는 극적인 변화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교육 수준, 의사소통 기술, 욕망, 그리고 그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매우 달라졌습니다. 의미의 의미가 이전과 달라진 것입니다.
제가 관심을 두는 또 다른 질문은 좀 더 방법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절박한 문제들을 이해할 때 정치경제, 정동, 윤리를 어떻게 한데 연결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어떻게 평가하며, 다른 사람들의 가치와 행동을 어떻게 평가할까요? 그리고 이러한 평가는 의사결정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저는 이러한 서로 다른 측면들을 한데 연결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제 초점은 언제나 정치경제에 있습니다. 제 목표는 권력관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물질적 자원이 어떻게 조직되고 분배되는지, 그리고 이러한 구조적 조건이 사람들의 감정을 어떻게 형성하며 무엇이 좋은지, 무엇을 위해 살아갈 가치가 있는지를 판단하는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림은 독자들에게, 자신의 삶을 결정한다고 느끼는 상황 속에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사람들이 큰 그림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보고, 서로 다른 것들이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게 되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좋아, 우리는 상황을 바꾸기 위해 우리 자신을 조금 바꾸거나, 어떤 행동에 나서거나, 특정한 일을 다르게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해."
² 이 인터뷰로부터 한 달 뒤인 2022년 11월 말, 중국 전역에서 정부의 코로나19 봉쇄 조치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부조리하다는 감각이 이 시위들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는 점은 명백하다.
주로 교수님 자신의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앞으로 몇 년간의 전망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부서의 다른 프로젝트들은 어떻습니까? 함께 토론할 여지가 있다고 보십니까?
몇 가지 공통 주제가 있습니다. 이동성이 그중 하나이지만, 그것이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주제는 때에 따라 바뀝니다. 부서를 진정으로 하나로 모으는 핵심은 사명감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학술연구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영향을 미치고자 합니다. 사명은 추상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사명이란 지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선 우리는 현재의 시점에 대해 잘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조건 속에서 살고 있는가? 우리가 현실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주요 문제는 무엇인가? 개입을 위한 실행 가능한 전략은 무엇인가? 현재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공중, 특히 청년들이 끊임없이 변하는 삶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분석에 목말라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류학자들은 이러한 요구에 잘 부응하지 못합니다. 우리 인류학자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기반은 이미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보자들을 자신의 역사와 삶을 만들어 가는 창조자로 보아야 합니다. 그들이 삶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어떤 일들로 고심하고 있는지, 그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려 하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피해자라고 부르는 사람이 되고, 어떤 사람들은 범죄자가 될 수도 있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일상의 영웅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접근법은 공통 주제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부서를 하나로 모을 것입니다. 경험적 차원에서 우리 사이의 공통점이 곧바로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흥미로운 대화를 나누기 위해 더 크고 깊은 질문들을 던지려고 합니다. 어쩌면 이것도 '이론 구축'의 일부일 것입니다.
부서 회의에서 나온 사례를 몇 가지 들어 보겠습니다. 지난 회의에서는 온갖 서로 다른 사례를 바탕으로 '때맞음(timeliness)'이라는 질문에 이르렀습니다. 왜 때맞음일까요? 우리는 서로 매우 다른 제보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에게 적절한 때에 적절한 일을 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젊은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노력하지만, 부모님처럼 안락한 삶을 살 수는 없다는 걸 알아요." 왜 그럴까요? "부모님은 20년 전에 이 작은 아파트를 사셨어요. 지금은 가격이 다섯 배가 됐죠. 하지만 이제 저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부동산시장에 진입할 수가 없어요. 부모님은 그저 적절한 시점에 집을 사셨던 거예요."
이것은 자의성과 무력감을 느끼게 합니다. 계획이나 노력이 무의미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삶을 형성하는 데 작용하는 이러한 자의적인 때맞음의 정치경제적 원인, 사람들이 왜 흔히 때맞음의 게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결과는 무엇일 수 있는지를 논의했습니다. 이것이 한 가지 사례입니다.
우리의 토론에서 나온 다른 질문들로는 압박감, 잔혹함, 소외, 외로움, 인정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젊은이에게 공통적인 문제가 일종의 '말문 막힘(speechlessness)'이라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이 소셜미디어에서 매우 활발하게 활동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상하게 들립니다. 우리가 뜻하는 바는, 그들이 자신의 가치와 어긋난다는 이유로 많은 것을 거부하고 싶어 하지만 그것을 정확하게 비판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치적 검열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불합리하다고 여기는 많은 것이 전적으로 정당한 것처럼 보인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압박감이란 기본적으로 자신이 내키지 않는 어떤 일을 하도록 강요받는 데서 생기지만, 그것은 저항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압박감이 그토록 큰 해를 끼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저항하고 비판하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역설적으로 정보 과잉과 의사소통의 과잉 역량입니다. 정보도 의견도 그저 너무 많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커뮤니케이션 연구에 더 많이 투자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부서에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방식입니다. 제게 부서를 만든다는 것은 대화의 방식을 만들고, 공유하는 사고방식을 만드는 일입니다. 때로 이것은 취향의 문제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어떤 질문이 흥미로운지, 무엇이 생각해 볼 가치가 있는지, 혹은 어떤 것이 눈에 띄기는 하지만 분석적 가치는 제한적인지에 관한 감각 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종류의 판단에 관해 공통의 이해에 도달하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모호해 보이고 모호하게 들린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 부서는 에너지 전환이나 인구구조의 변화와 가족 변동을 연구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주제 자체로 무엇을 하는지 설명이 되고, 중요성도 분명해집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그쳐 더 깊고 미묘한 어떤 것, 이를테면 삶 속에 뒤얽힌 모순들에 다가가고자 합니다. 우리 부서의 노력이 전 세계적으로 더 많은 논의를 이끌어 내는 일종의 촉매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시간을 내어 질문에 답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앞으로 하시는 일이 잘되기를 기원하며, 교수님의 답변이 저희에게 그랬던 것처럼 『카르고(Cargo)』 독자들에게도 영감을 주기를 바랍니다.
Biao Xi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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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x Planck Institute for Social Anthrop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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