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는 흘거갔고, 현재는 흘러간다.
"최 강 집안! 이 곳에서는 그래도 이름만 되면 알아주는 유명한 건축가 집안이였었대...집 안도 엄청 부자였고...일제 시대부터 쭈......욱......"
지혜는 나의 표정을 한 번 살피더니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최 강 아빠가 밀었던 정치권이 선거에서 지면서 정치권에 밉보이는 바람에 은행에서 대출을 전부 막아 버렸대. 그 당시 대부분 은행 대출로 사업을 벌이던 때라, 엄청 힘들었나봐! 문어 발 식으로 벌여 놓았던 사업들이 한 회시가 부도가 나니까 도미노식으로 줄줄이 부도가 났다고 하더라고....."
지혜 이야기를 듣고 보니 학교 다닐 때, 최 혁네 집안이 이전에는 엄첨 잘 나가는 사업가 집안이었었다고 들었었던 것도 같았다.
"그랬었군...."
분위기가 왠지 모르게 더 차분히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응! 그리고......"
그 순간 측은한 감정이 지혜의 눈빛에 서렸다. 눈가에 물기가 짙어지면서 LED등 불빛이 유난히 눈가에 서린 물을 타고 빛났다.
"그리고....? 그리고는 무슨 일이 또 있었어?"
그렇게 끝이 났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응! 안 됐어... 그 집안도 참....그 일로 최 강 아빠는 병을 얻어 몇 개월 안되서 돌아가시고, 온 가족이 빛 독촉에 시달렸다고 하더라고...그러면서 어머니도 병을 얻어 병원 신세를 지게 되셨고 그 이후론 최강이 거의 가장 노릇을 했다고 들었어..그 이후로 빚쟁이들 독촉은 더 심해졌고...최 강이 집 팔고 땅 팔고 가진 것 다 정리하고, 주위 친척들과 아버지 친구분들에게 무릎까지 꿇어가면서 사정했지만, 아버지 살아계시고 잘 나갈때는 그렇게 좋은 척 달라 붙었던 사람들이 다 거들떠도 안 봤나봐. 다행히 그 중 한 분이 죄바카라감에 마음을 돌려 도와 준 모양이야! 겨우 빚은 정리하고 그때 그 분 소개로 결혼 도 한 모양이고..."
마음이 아픈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일이 정당화 되는 것도, 무슨 일을 해도 면죄부를 받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안 된 일이긴 하지만..."
잠시 마음의 동요가 일었지만 이내 다시 냉정함을 되찾아야 했다.
"그래! 그렇긴 하지!그래도 조금 의왼데..."
지혜가 나를 한편으론 대견하다는 듯이, 한편으론 놀랐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뭐가?"
"냉정함을 회복 할 거라 생각은 했지만 시골 촌놈이라 동정심이 좀 더 오래 갈거라 생각했었거든..."
"뭐어?"
아닌 척 했지만 사실 맞았다. 안 됐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난 지혜를 지켜야 했다. 내가 지금 해야 하는 일은 지혜 아니 우리 학원을 지키는 일이었다. 지혜도 그 생각을 아는지 흘깃 흘깃 계속 나를 쳐다 봤다.
"자! 이제 그만 쳐다 보시고 계획을 좀 더 구체적으로 체크해 보실까요? 현 원장님!과거는 흘러갔고, 우리는 지금 흘러가는 현재를 살고 있으니까요..."
우린, 애초 무대응으로 나가려던 전략을 바꿔, 저쪽에 해를 끼치지는 않지만 우리 쪽을 대대적인 홍보를 하기로 암암리에 현 원장이랑 방향수정을 하였었다.
"뭐야? 뭔 수학강사가 이런 시적표현을 써?백 팀장님 이러면 반칙 아닌가요? 나중에 시도 쓰시겠어요? 호, 호, 호!"
반쯤은 놀란 눈으로, 반쯤은 놀리는 눈으로 지혜가 밝게 웃었다.
"자~학원간판 그럼 '백지수학' 으로 내일 새로 달고, 전단지 작업과 DM작업이 거의 마무리 됐고, 현수막도 이번 주말부터 지정해준 10곳에 달기로 했으니, 젤 큰 시험대인 학부모 설명회 준비도 잘 진행되고 있는 것 같네요~유명 강사 섭외도 끝났구요~^^"
더 빠진 것이 있는지 체크해 달라고 현 원장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현 원장은 왠지 뭔가를 더 기획하고 있는 표정으로 말 없이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아니 뭐가 빠졌나요? 현 원장님!"
'백지수학'이라는 이름은 여러가지 의미를 담고 있었다. 먼저, 백강현의 '백'자와 현지혜의 '지'자를 따서 만든 것이고, 두번째는 기존의 어설픈 수학지식을 백지에서 새롭게 가르켜 새로운 문제가 나오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탄탄한 실력을 쌓아 주겠다는 의미였고, 세번째는 한문제를 풀더라도 백가지 지혜를 가르쳐 주겠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마지막 네번째는 우리 학원을 선택하면 자기 인생의 백지 수표가 되어 주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뒤에 학원을 뺀 이유는 너무 식상해서 였다. 너도 나도 전부 학원을 붙이고 있으니..... 수학만있어도 수학학원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인데 굳이 학원을 붙일 이유는 없었다.
최 강이랑 틀어진 마당에 최강학원은 버려야했다.
그리고 해야 할일은 새로워진 학원 이미지를 확실히 각인 시켜주기 위하여 설명회를 여는 것이었다. 그러기위해 이름만 들어도 공부에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아는 대치동에서 유명한 강사도 섭외를 해서 전단지에, 현수막에, DM에, 대대적인 홍보를 기획하고 있었고, 설명회가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내 생각엔 빠진 것이 없었는데, 현 원장은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아 고치고 싶어 하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느 부분이 심기가 불편하십니까? 원장님~"
"아니, 다 좋아! 근데 하나만 딱 수정하자. 우리! 백 팀장님!"
현 원장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이내 표정을 바꾸어 환한 미소를 지어며, 반짝이는 눈망울로 나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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