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에는 온도가 있다
소양강에서 돌아오는 길
소양강댐이 석양에 물들고 있었다.
낮의 빛이 조금씩 물러나고 산등성이와 강물 위로 붉은빛이 내려앉았다. 물은 빛을 받아 천천히 다른 색이 되었다.
그 풍경 속에 남편과 제자가 있었다.
34년 전에는 선생님과 제자였던 두 사람.
이제 한 사람은 예순을 넘겼고, 한 사람은 아직 한참 일하고 살아내야 할 시간을 지나고 있다.
그런데 둘 사이에는 이상하게 좋은 온도가 흘렀다.
너무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오래 만나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고,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를 알아보는 온기.
나는 조금 떨어져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저녁의 온도가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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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은 체호프로 시작했다.
남편이 새벽일을 나간 뒤 나는 안톤 체호프의 단편소설을 오디오로 들었다.
요즘 나는 소설을 그냥 듣지 않는다.
어떻게 시작하는지, 평범한 장면을 어디에서 붙잡는지, 이야기가 어느 순간 사람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는지를 따라가며 듣는다.
체호프의 소설에는 대단한 영웅이 잘 보이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간다.
사랑하고, 슬퍼하고, 외로워하고, 말하고 싶어 한다.
때로는,
이런 이야기도 소설이 되는구나.
싶을 만큼 소소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소소함이 사람의 깊은 곳을 건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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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한 이야기가 오래 남았다.
아들을 잃은 마부가 있다.
그는 자신의 슬픔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다.
마차에 손님이 타고 내린다.
그런데 아무도 그의 이야기에 오래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갈 길이 있다.
마부에게는 세상이 무너진 일인데 다른 사람에게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 잠깐 들은 이야기일 뿐이다.
나는 그 장면에서 한동안 나오지 못했다.
세상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에게 관심이 없다.
내가 아무리 아프다고 말해도 상대에게는 자기 손톱 밑의 작은 가시 하나가 더 아플 수 있다.
그것이 인간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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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일본의 화가 쿠사마 야요이에 관한 이야기도 보았다.
그녀는 오랫동안 반복되는 환각과 정신적 고통을 겪으면서도 점과 반복의 이미지를 작품으로 만들며 살아왔다.
나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볼 때마다 생각한다.
고통이 있다고 모두 예술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고통 그 자체가 사람을 더 선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사람은 자기 고통으로 가득 차면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볼 여유를 잃기도 한다.
나 역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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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야가 말했다.
‘너도 남의 말 안 들었잖아.’
아픈 말이다.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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