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은 쌓을수록 강력해지는 법입니다
도쿄에서 밥 먹으며 공부합니다 — 3박 4일의 여행에서 발견한, 맛있는 한 끼 뒤의 비즈니스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잘 세운 여행 계획이라도, 갑작스러운 날씨 변화 앞에서는 한순간에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런 뜻밖의 상황이 인상 깊은 만남으로 이어지기도 하죠. 이번 여행에서 제가 발견한 가장 의외의 공간도 그랬습니다. 카페라고 부르기엔 너무 크고, 푸드홀이라 부르기엔 커피 향이 너무 짙은 곳이었죠.
일본에서의 첫 끼를 만족스럽게 마친 뒤, 저와 아내는 갑자기 갈 곳을 잃고 말았습니다. 예기치 않게 비가 내렸거든요. 원래 계획은 따로 있었습니다. 도쿄타워를 바라보며 수영할 수 있는 낭만적인 수영장을 마침 찾아 두었고, 저녁에는 일본에서 근무 중인 아는 동생과 아자부다이 힐스에서 만나기로 했죠.
하지만 첫날부터 비를 맞으며 수영하기에는 아내의 컨디션이 썩 좋지 않았습니다. 부랴부랴 저녁 약속 장소도 숙소 근처로 바꿨습니다. 작년 여행 때 방문했던 초밥집이자, 다음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도 한 오노데라 토류몬으로 말이죠.
그러자 시간이 애매하게 남았습니다. 저녁 약속은 8시인데, 식사를 마치고 나니 아직 오후 5시도 되지 않았거든요. 멀리 가기는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바로 숙소로 돌아가기에는 아쉬운 시간. 여행 중 이럴 때가 제일 난감합니다.
그 순간 올해 5월 출장으로 다녀왔던 도쿄의 새로운 명소, 뉴우먼 타카나와가 떠올랐습니다. 바로 옆에는 당시 미처 가 보지 못했던 복합 문화시설 몬 타카나와도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았고요. 긴자에서 그리 멀지 않은 데다, 무엇보다 비 오는 날 돌아다니기에는 실내만 한 곳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급히 목적지를 바꿨습니다. 그땐 몰랐습니다. 커피나 한잔하자며 찾아간 그곳에서, 이번 여행에서 가장 인상적인 공간 중 하나를 만나게 될 줄은요.
뉴우먼 타카나와와 몬 타카나와. 타카나와 게이트웨이역 일대를 새로 개발한 ‘타카나와 게이트웨이 시티’에 지난해 가을부터 올봄 사이 차례로 문을 연, 따끈따끈한 명소들입니다. 최근 도쿄 여행을 준비하셨다면 한 번쯤 이름을 들어 보셨을 거예요. 특히 몬 타카나와의 독특한 외관을 사진으로 보신 분들이 많을 텐데요. 막상 직접 경험해 보니 겉모습보다 안에 갖춰진 것들이 더 재미있었습니다.
몬 타카나와의 정식 명칭은 ‘The Museum of Narratives’. 이름에는 뮤지엄이 붙어 있지만,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전시 시설로만 채워진 곳은 아닙니다. 전시 공간과 공연장뿐 아니라 넓은 다다미 공간, 족욕을 즐길 수 있는 테라스, 옥상 정원과 농장까지, 곳곳에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더 흥미로운 건 특정 전시나 프로그램을 보러 가지 않더라도, 편하게 건물을 둘러보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점입니다. 꼭 무언가를 관람하거나 사지 않아도, 와서 쉬고 걷고 머물라는 거죠.
오는 길에 지하철에서 정보를 찾아보며 가장 기대한 건 족욕 테라스였습니다. 여행 내내 많이 걸을 게 분명하니, 잠시라도 발의 피로를 풀며 경치를 즐기고 싶었거든요. 하필 비가 오는 바람에 제대로 즐기지는 못했지만, 경관만큼은 정말 멋졌습니다. 날이 좋았다면 꽤 오래 머물렀겠구나 싶었죠.
바로 옆 뉴우먼 타카나와도 비슷합니다. 지난 출장에 이어 이번에도 들른 곳이자,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은 28층과 29층에 자리한 ‘루프트바움’이었습니다. 지상 약 150m 높이에 진짜 나무와 식물을 심어 놓은 공중 정원인데요. 멀리 도쿄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풍경 사이로 식당과 카페가 이어집니다. 쇼핑몰 꼭대기 층이라기보다 잘 만든 공원이나 휴양지에 더 가까웠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더현대 서울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건물 안을 볕이 잘 드는 공원처럼 꾸며 놓은 그곳 말이죠. 무료 전망대나 휴식 공간이 많은 건 저 같은 방문객에겐 반가운 일이지만, 운영하는 쪽에서는 당장 매출이 발생하지 않는 공간에 투자하는 셈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사람들이 머무를 곳을 마련하는 건, 이제 쇼핑만으로는 방문을 이끌기 어렵기 때문이겠죠. 일부러 찾아올 이유를 만들어 줘야 하는 겁니다. 이걸 잘해 냈기에, 우리 피드 속 ‘도쿄에 가면 꼭 가 봐야 할 곳’ 리스트에 몬 타카나와와 뉴우먼 타카나와가 등장하는 것일 테고요. 그리고 이 ‘머무를 이유’를 유독 다채롭게 만들어 둔 곳이, 제가 곧이어 만난 그곳이었습니다.
한 시간가량 열심히 구경하다 보니 목이 말라 왔습니다. 평소라면 식후에 커피 한잔을 했을 텐데, 이날은 그러지 못한 채 시간이 꽤 지나 있었죠. 아내에게 카페를 찾아보자며, 지난 출장 때 들렀던 뉴우먼 타카나와 1층으로 향하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러다 길을 잘못 들었는지, 한 층 전체가 하나의 큰 매장으로 이루어진 공간에 다다랐습니다. 처음엔 솔직히 요즘 유행한다는 푸드홀인 줄 알았습니다. 여러 식당이 모인 대형 공용 식당가를 흔히 푸드코트라고 부르잖아요. 푸드홀은 그보다 식당과 먹거리의 구성, 공간의 분위기를 한층 고급스럽게 꾸민 곳에 가깝습니다. 대표적으로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의 ‘하우스 오브 신세계’가 있죠. 그곳에 가면 좋은 식당은 물론이고 고급 식료품점까지 함께 있거든요.
신기한 마음에 에디터로서의 탐구심이 솟아올랐습니다. 일단 오는 길에 봐 둔 작은 카페로 가려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도, 방금 본 공간이 궁금해 급히 챗GPT에게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이곳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 ‘오가와커피 라보라토리’ 매장이라는 겁니다.
오가와커피. 이제 겨우 도쿄에 조금 익숙해진 저에겐 처음 듣는 이름이었지만, 일본 여행을 자주 다니신 분들이라면 알 법한 곳입니다. 흔히 교토 3대 카페 중 하나로 불린다니까요. 무려 1952년에 창업했을 만큼 긴 역사를 자랑하는 이곳은 ‘교토의 커피 장인’을 지향해 온 브랜드인데요. 2020년대 들어 파격적인 변신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오가와커피 라보라토리(OGAWA COFFEE LABORATORY)’라는 이름의 플래그십 스토어를 만든 겁니다.
타카나와 매장은 네 번째 플래그십이었는데요. 그 확장 과정도 재미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더 다양한 원두를 고를 기회를 주는 매장으로 시작해, 커피를 직접 만들고 체험하는 곳으로 실험을 이어 갔습니다. 그리고 타카나와에 이르러서는 아예 커피 바깥으로 영역을 넓힌 거죠.
제가 처음에 이곳을 카페로 알아보지 못한 것도 어쩌면 당연했습니다. 커피·베이커리·레스토랑·젤라토·초콜릿·디저트·델리·맥주·피자·와인·식료품, 그리고 바카라을 읽으며 쉬어 가는 라이브러리 라운지까지, 12개의 ‘라보라토리(Laboratory)’가 한 층에 이어진 구조였거든요. 처음에 식료품 매장이나 푸드홀로 착각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규모는 더 놀랍습니다. 약 4,000㎡로, 개장 당시 세계 최대 스타벅스 매장으로 알려졌던 스타벅스 리저브 로스터리 도쿄보다도 큽니다. 커피 브랜드가 만든 공간으로서는 정말 이례적인 구성이자 규모라 할 수 있습니다.
브랜드를 만드는 건 결국 경험입니다. 상품을 써 본 기억은 물론이고, 광고를 보며 받은 인상과 브랜드가 전하는 가치까지 복합적으로 쌓여 우리가 떠올리는 브랜드의 모습이 되니까요.
이런 인상을 가장 직관적으로 전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먹는 경험입니다. 맛과 향, 공간과 서비스를 한자리에서 느낄 수 있거든요. 구찌 같은 명품 브랜드가 아예 레스토랑을 여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각광받는 공간이 카페입니다. 국내에서도 루이뷔통, 디올 같은 럭셔리 브랜드부터 자라 같은 대중적인 브랜드까지 자체 카페를 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비교적 부담 없이 자주 들를 수 있으면서도, 커피와 공간으로 브랜드의 이미지를 직관적으로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이미 커피를 팔고 있는 브랜드가 새로운 인상을 만들고 싶을 때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아마 오가와커피 라보라토리도 이런 고민에서 출발한 곳이 아닐까요? 오가와커피는 70년 넘게 교토에서 커피 장인으로 이름을 쌓아 온 브랜드입니다. ‘교토의 좋은 커피집’이라는 평판은 든든한 자산이겠죠. 다만 지역을 넘어 일본 전체로, 더 나아가 세계에서 더 널리 기억되는 브랜드가 되려면, 그 이름을 처음 접한 사람에게도 ‘오가와다움’을 전할 경험이 필요했을 겁니다. 타카나와 매장은 그 경험을 커피 한 잔 너머로 넓히려는 시도로 보였습니다.
사쿠라신마치에서 시작해 시모키타자와와 아자부다이를 거쳐 타카나와에 이르기까지, 몇 년에 걸친 실험은 그 답을 찾는 과정이었을 겁니다. 젤라토도, 빵도, 초콜릿도, 더 나아가 맥주와 식사까지 즐기고, 장도 보고 돌아갈 수 있도록 한 거죠. 한 브랜드 안에서 경험하는 것이 많아질수록, 그 이름에 연결되는 기억도 풍성해지니까요.
이런 방향은 타카나와 매장을 소개하는 오가와 측의 문장에서도 드러납니다. 이곳을 ‘오가와커피(OGAWA COFFEE)’에서 ‘오가와(OGAWA)’로 진화하는 브랜드의 모습을 처음으로 입체적으로 구현한 거점이라고 표현했거든요. 이름에서 ‘커피’를 떼어 낸다는 건, 커피를 넘어 일상 전반에서 만나는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 기억되고 싶다는 선언처럼 읽혔습니다.
저도 꽤 오래 머물다 숙소로 돌아갔지만, 마음만 먹으면 하루 종일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베이커리는 오전 7시, 커피는 8시부터 문을 열고, 점심과 카페 타임을 거쳐 키친·피자·커피·와인·맥주 등은 최대 밤 11시까지 운영하거든요. 말 그대로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를 통째로 담아낼 수 있도록 설계된 거죠.
다만 아무리 다양한 매장을 모아 두더라도, 방문객이 둘러보기만 하고 떠난다면 이런 시도가 꾸준히 이어지기는 어려울 겁니다. 머무는 시간이 실제 소비로 이어져야 하니까요. 오가와커피 라보라토리는 일단 발을 들이면 자연스럽게 다음 경험으로 넘어가도록, 세심하게 설계된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가와는 12개나 되는 라보라토리를 어떻게 한 사람의 하루 안에 자연스럽게 엮어 넣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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