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급한 답과 끝없는 고민 사이

익숙한 박스를 벗어나되 판단을 멈추지 않는 법

by장서우

수렴은 박스 안에서, 확산은 새로운 박스로


이 박스 비유는 뤽 드 브라방데르(Luc de Brabandere)의 통찰을 빌려 왔다. 그는 우리가 세계를 이해할 때 사용하는 믿음과 개념, 가정 같은 사고의 틀을 '박스'에 비유한다. 그의 관점에서 창의성이란, 기존의 박스를 벗어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박스를 의심하며 새로운 박스를 만드는 일이라는 것이다. 세계를 이해하는 틀 자체를 바꿔 끼우는 것이 창의성이라는 것이다.


이 장의 언어로 옮기면, 수렴이란 하나의 박스 안에서 기준에 맞는 답을 고르는 일이다. "자동차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가?"라고 물으면 승용차, 버스, 트럭처럼 이미 정해진 '자동차의 종류'라는 박스 안에서 답을 찾게 된다. 이 후보들을 목적과 조건에 따라 하나로 좁히는 것이 수렴이다.


반면 "자동차를 무엇으로 볼 수 있는가?"라고 물으면 다양한 박스가 열린다. 누군가는 자동차를 이동 수단으로, 다른 사람은 환경 오염의 원인이나 자산, 심지어 신분의 상징을 이야기할 수 있다. 확산은 단순히 답의 개수를 늘리는 일이 아니라, 질문을 바라보는 새로운 박스를 여는 일이다.


pexels-shvets-production-7203724.jpg새로운 박스에서, 새로운 사고로


확산과 수렴 중, 둘 사이에 우열은 없다. 둘 다 필요하다. 다만 우리에게 더 익숙한 쪽은 대체로 수렴이다. 학교에서 이론을 익히고 정해진 답이 있는 시험 문제를 풀어 온 경험은 수렴의 사고에 가깝다. 하나의 박스에서 가장 적합한 답을 꺼내면 된다. 하지만 새롭게 마주한 문제 앞에서 내가 가진 박스 안에 답이 없다고 느껴지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이 없는 상황에서 '이렇게도 해 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움직이는 힘은 확산에 있다. 같은 고객 이탈 현상도 디자인의 박스에서는 사용 경험으로, 개발의 박스에서는 성능과 오류로, 영업과 마케팅의 박스에서는 고객 관계와 제안의 문제로 다시 볼 수 있다. 경험과 사고의 폭이 넓을수록 하나의 현상에서 더 다양한 문제와 해결의 가능성을 열 수 있다.


데이터를 다룰 때도 확산은 기존 테이블의 열을 더 찾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필요한 데이터가 없다면 외부 시장 자료를 찾거나, 고객을 인터뷰하고 설문을 실시해 새로운 자료를 만들 수 있다. 질문을 먼저 세우면 데이터베이스 밖의 맥락도 탐색할 대상이 된다. 확산은 데이터 안에서 답을 기다리는 대신, 질문에 답할 근거를 어디에서 어떻게 얻을지까지 넓히는 사고다.


답이 없는 문제 앞에서 우리가 굳어 버리는 이유도 여기서 설명할 수 있다. 수렴을 주로 훈련해 온 사람에게 답이 없는 문제는 꺼낼 박스가 지정되지 않은 문제다. 데이터 앞에 앉아 답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확산이 필요한 자리에서 수렴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일이다.



데이터에서 디자인으로, 디자인에서 커뮤니티로


나 역시 현장에서 문제를 마주하며, 다양한 박스를 열어 문제를 풀어온 경험이 존재한다. 돌이켜보면 내 일의 방향이 바뀐 순간마다 새로운 박스가 열렸다.


먼저 디자인 대학원에서 자막을 연구할 때, 디자인의 문제 앞에서 데이터라는 새로운 박스를 열었다. 시선 데이터를 수집하면 사람들이 자막을 실제로 어떻게 읽는지 살펴볼 수 있었다. 감각으로만 품고 있던 자막 문제를 측정 가능한 질문으로 바꾸고, 여러 연구 방법 가운데 시선 추적 실험으로 좁혀 갔다.


이번에는 데이터 분석가가 되어 마주한 어려움 앞에서는 디자인이라는 다른 박스를 열었다. 질문이 달라졌다. 이 화면을 사용할 사람은 누구인가. 그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판단해야 하는가. 처음 요청한 기능이 아니라 해결해야 할 문제는 무엇인가. 기술적으로 무엇을 만들 수 있는지보다, 사용자의 문제를 먼저 정의하고 실제로 필요한 것을 만드는 디자인적 사고에 도달했다.


박스가 바뀌자 답의 형태도 달라졌다. 사용자가 직접 질문하며 탐색하기 어려운 조직에서 대시보드를 하나 더 만드는 대신, 데이터가 어떤 문제를 보여주며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인사이트 리포트를 만들었다. 분석 기술을 버린 것이 아니다. 같은 분석을 사용자의 맥락이라는 새 박스 안에서 다시 수렴한 것이다.


최근에는 다른 박스를 열었다. 이번에는 정보를 전달하는 형태에서 더 나아가, 더 많은 사람이 스스로 질문을 만들도록 돕는 방식을 떠올렸다. 커뮤니티라는 박스를 열어, 분석가의 역할을 데이터를 처리하고 화면을 개발하는 사람으로 한정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배우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용자를 연결하는 사람으로 넓혔다. 서로 만나 사례를 나누고, 다른 사람의 업무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하는 구조였다. 그 수렴의 결과로 그룹사에서도 여러 관계사의 구성원이 참여하는 사내 데이터·AI 커뮤니티를 기획해 운영하고 있다. 매달 밋업을 열어 각자의 업무 경험과 정보를 공유하고, AI를 실제 업무에 적용한 사례를 함께 만든다.


IMG_3763.HEIC데이터 분석에서, 커뮤니티 운영을 하기까지


혼자서 문제 정의의 중요성이나 방법을 이야기해도 그 전파의 규모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하지만 커뮤니티에서 한 사람이 자신의 문제 해결 경험을 동료와 나누고, 그 동료가 다시 다른 사람에게 전한다면 배움은 더 넓게 퍼질 수 있을 것이다. 조직의 데이터 활용 문제에 대한 답이 언제나 새로운 시스템이나 대시보드일 필요는 없었다. 때로는 사람들이 반복해서 만나 서로의 경험을 다음 사람의 아이디어로 바꾸는 구조가 답에 더 가까운 경우도 존재했다.


해외 OTT의 자막 문제를 시선 데이터로 검증한 연구, 대시보드 대신 만든 인사이트 리포트, 여러 관계사의 사용자를 연결한 커뮤니티는 겉으로 보면 서로 다른 일이다. 그러나 사고의 구조는 같았다. 데이터와 디자인, 커뮤니티라는 서로 다른 박스에서 가능성을 넓혔고, 그때의 문제와 조건에 맞는 하나의 형태로 좁혔다. 자막 연구는 여러 연구 방법 가운데 시선 추적을 고른 수렴이었고, 인사이트 리포트는 여러 전달 형태 가운데 해석을 담은 리포트를 고른 수렴이었으며, 커뮤니티는 기술을 일방적으로 보급하는 대신 사람들이 서로 나누고 배우는 구조를 고른 수렴이었다.


창의적인 문제 해결은 기발한 아이디어 하나를 떠올리는 일이 아니다. 같은 문제 앞에서 새로운 박스를 열어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고, 그 안의 가능성 가운데 지금의 맥락에 맞는 것을 활용하는 일이었다. 다른 박스를 가진 사람은 같은 문제 앞에서 다른 확산을 할 수 있다.



성급한 수렴, 끝나지 않는 확산


물론 이러한 확산과 수렴이라는 사고 방식을 반복할 때는 두 극단을 경계해야 한다.


첫 번째는 성급한 수렴이다. 실무의 시간은 무제한이 아니다. 회의는 짧고, 보고는 빨리 올라가야 하고, 의사결정자는 결론을 원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서둘러 좁힌다. 데이터 몇 개를 보고 "원인은 이것이다"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답이 없는 문제에서 성급한 수렴은 위험하다. 문제를 충분히 열어 보지 않은 채 결론을 내리면, 데이터는 판단의 근거가 아니라 이미 정해 둔 결론을 꾸미는 장식이 된다. 내가 회의실에서 본 데이터 오용의 한 모습이다. 결론이 먼저 있고, 그 결론의 타당성을 위해 숫자가 동원된다.


두 번째는 끝나지 않는 확산이다. 가능성은 무한히 늘어날 수 있다. 원인도 많고, 관점도 많고, 이해관계자도 많다. 계속 질문만 넓히면 어떤 판단도 내릴 수 없다. 분석을 위한 분석이 쌓이고, 회의는 늘 "조금 더 알아보자"로 끝난다. 이것도 실패다. 답이 없는 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결국 확산과 수렴 사이의 균형을 잡는 일이다. 충분히 넓게 보고, 어느 순간 바카라임 있게 좁혀야 한다.


현장의 일에는 언제나 시간과 비용의 한계가 있다. 확산과 수렴도 그 제한된 시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한 번의 과정만으로 문제와 해결바카라을 모두 확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판단을 미룰 수도 없다. 현재의 근거로 하나의 답을 고르고 실행한 뒤, 그 결과를 보며 문제와 해결바카라을 다시 고쳐야 한다. 이 반복이 오늘의 답을 내일의 더 나은 답으로 바꾼다.



문제 해결의 언어가 된 디자인 사고


여기까지가 디자인적 사고를 움직이는 기본 원리다. 답이 없는 문제를 만나면 질문으로 노드를 열고, 확산과 수렴을 거쳐 현재의 근거와 조건에 맞는 판단까지 나아간다.


이 바카라에서는 디자인 분야가 축적해 온 문제 해결 관점을 넓게 가리킬 때 '디자인적 사고'라고 쓴다. 그 관점을 전공 밖에서도 배우고 적용할 수 있도록 정리한 개념과 방법론은 '디자인 사고(Design Thinking)'라고 부르겠다.


앞에서 살핀 흐름이 오늘날 '디자인 사고'라는 이름으로 묶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1960년대의 디자인 방법론 연구와 사이먼의 논의는 디자인을 결과물의 모양보다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1982년 나이절 크로스(Nigel Cross)는 디자인을 과학이나 인문학과 구별되는 '디자이너 고유의 앎의 방식(Designerly Ways of Knowing)'으로 설명했고, 피터 로(Peter G. Rowe)는 1987년 저서 제목으로 『Design Thinking』을 사용했다. 1990년대에는 IDEO가 디자이너의 사고와 방법을 조직의 혁신에 적용하는 실천 언어로 확산했다. 스탠퍼드도 1950년대 말부터 이어 온 인간 중심 디자인 교육을 바탕으로 2005년 디스쿨을 열었다. 이 계보를 거치며 디자인 사고는 디자이너가 어떻게 사고하는지를 설명하는 말에서, 전공과 직무를 넘어 배울 수 있는 문제 해결 방식으로 의미가 넓어졌다.


그 결과 디자인 사고는 오늘날 공학과 경영, 교육과 의료 등 여러 영역에서 답이 없는 문제를 다루는 대표적인 사고법으로 활용된다. 각 분야에도 고유한 문제 해결 방식이 있지만, 디자인적 사고는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서 사람과 맥락을 살피고, 문제와 해결의 가능성을 함께 열어 간다. 생각에 머물지 않고 빠르게 형태를 만들어 현실에서 시험한다는 점도 답이 없는 문제와 잘 맞는다. 디자인만 창의적이어서가 아니라, 디자인의 사고 과정이 새로운 문제를 정의하고 가능한 답을 만들어 가는 공통의 언어가 된 것이다.


실무와 교육에서 디자인 사고는 흔히 공감, 문제 정의, 아이디어, 프로토타입, 테스트의 과정으로 소개된다. 디자인 모델에 따라 각 단계의 이름과 개수가 달라질 수 있지만, 그 안에서 움직이는 사고는 같다. 공감으로 사람과 상황을 넓게 이해하고, 지금 다룰 문제를 정의한다. 해결의 아이디어를 펼친 뒤 하나의 형태로 만들고, 사용자와 현실에서 시험한다.


다만 이 과정은 다섯 칸을 차례대로 통과하는 고정된 체크리스트가 아니다. 공감과 문제 정의에서는 문제의 가능성을 확산하고 수렴한다. 아이디어와 프로토타입, 테스트에서는 해결의 가능성을 다시 확산하고 수렴한다. 테스트에서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오면 문제 정의로 돌아가 노드를 다시 열 수도 있다. 디자인 사고는 결국 답이 없는 문제 앞에서 확산과 수렴을 반복하며 문제와 해결을 함께 구체화하는 실천의 과정이다.


이제 이 과정을 구성하는 사고를 하나씩 살펴보자. 첫 번째는 문제의 다이아몬드를 여는 공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