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조금, 살만해진 여름.

by최이삭


#5.


여름은 무척이나 더웠다. 그런데, 날이 덥든 말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가볍고 괜찮은 날엔 일단 씻고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한 해가 시작되던 추운 겨울과 봄엔 내일이라도 당장 죽어버릴 것 같더니 여름엔 좀 달랐다.


성당 교리 수업에 열심히 나가고 글쓰기 모임도 하고 바카라도 많이 읽었다. 그동안 쌓아둔 소설이나 에세이, 그리고 그림이 많이 담긴 미술바카라을 읽었다. 가끔 필사도 했다.


잠은 8시간 정도를 잤다. 병원에서 준 약을 먹으면 자는 중간에 한 번을 깨지 않고 푹 잘 수 있었다. 어느 날 ‘살만하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일이, 앞날이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앞으로 뭐라도 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매일 매 순간 좋았던 건 아닌 것 같은데, 분명 하루 중 잠깐이라도 마음이 반짝거리는 시간이 있었다. 일단 살긴 살아보자. 조금은 잘 살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니까.



#6.


시간이 흐르고 성당에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을 조금씩 더 익혔다. 누군가 마주치면 친분도 없으면서 “안녕하세요!” 인사하는 게 버릇이 됐다. 나는 성당에서 만난 사람들이 좋았다.


우리 조에는 지민 언니가 있다. 차분한 성격에 행동도 말도 늘 조심스러운 면이 있으면서도 참 선한 사람이었다. 지민 언니의 언니는 공교롭게도 나이 순번대로 조가 쪼개지는 바람에 앞 조인 1조로 가 있었다. 지민 언니처럼 선한 사람 같은데 성격은 정반대였다. 엄청나게 활기차고 사람들을 화끈하게 리드하기도 했다. 그 덕분에 얼굴이 마주치면 우리는 서로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시간이 종종 있었던 것 같다.


서울 성북동에 있는 한 수도회로 피정을 간 날이었다. (*단어조차 생소한 '피정'은 휴대폰이나 세상 소음에서 멀리 떨어져 묵상이나 기도, 성찰 등 종교적 수련을 하는 걸 말한다. 이날 우리 같은 예비 신자들은 맛보기 차원에서 하루 날을 잡아 다 같이 경험해 보게 됐다.)


집에서 거리가 멀지 않아 이른 시간 도착한 나는, 기도실로 들어가 중간 뒤쪽 빈자리를 찾아 조용히 앉아 있었다. 앞쪽 줄에 자주 보던 모자 쓴 할머니와 중년의 여인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얼마 뒤, 지민 언니와 다른 조원 언니들도 도착했다. 언니들은 “혜정아. 같이 앉자. 이쪽으로 와!” 하고 불렀다. 우리는 기다란 의자에 한 줄로 나란히 앉았다.


그때 앞줄에 앉은 지민 언니의 언니가 뒤를 돌아보더니, 우리를 보고는 손을 붕붕 흔들며 인사했다. 그러다 옆에 있던 중년 여인과 할머니도 눈이 마주쳐서 우리는 서로 고개를 가볍게 숙이고 인사를 했다.


신부님들의 강연을 차례로 듣고 퀴즈도 맞추다 보니 어느덧 밥때가 됐다. 안내 봉사자들은 밥을 먹을 때도 시끄럽게 먹어선 안 된다며 주의를 줬다. 조용히 차분하게 줄을 서 배식하고 자리에 앉아서도 대화 없이 밥을 먹어야 한단다. 아, 정말. 입이 근질근질거렸다.


점심을 먹고 다 같이 밖으로 나가 수도회 뒷길을 산바카라 겸 걸었다. 우리는 참았던 말들을 쏟아내며 깔깔거리고 웃었다. 조용한 수도회 작은 뒤뜰에 수다 한마당이 펼쳐졌다.


다시 건물로 들어가려고 문 앞에 서 있는데, 지민 언니의 언니가 자기 조원 사람들과 함께 다가왔다. 우리는 얼굴 마주 보고 서로 웃으며 인사를 했다. 색이 고운 여름 벙거지 모자를 쓴 할머니가 활짝 웃으며 인사를 했다. 중년 여인은 살짝 어색한 듯 미소를 지었다. 그날따라 그녀의 표정은 무언지 모르게 어둡고 차분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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