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량은 더하기, 복잡도는 곱하기

by어느 번역가

그 뒤로 소제목부터 가능하면 소문자로 쓰고 있다. 큰 제목까지 바꾸기에는 아직 조심스러워 천천히 그 방향으로 옮겨가는 중이다. 그렇게 정해둔 기준이 다음 보고서의 출발점이 된다.

올해 작업한 어느 보고서는 평소 맡던 보고서보다 분량이 세 배쯤 된다. 10개 자회사를 모두 아우르는 보고서다. 처음엔 단순하게 계산했다. 세 배면 시간도 세 배쯤 들겠지.


막상 해보니 그렇지 않았다. 시간은 훨씬 더 걸렸고 머릿속은 내내 분주했다. 분량은 더하기로 늘지만 복잡도는 곱하기로 늘어난다. 이번 작업에서 그것을 몸소 체험했다.


이유를 따라가 보면 보고서마다 겪는 러닝커브에 닿는다. 작업 전에 용어집을 미리 구축해두지만 초반 10~20% 정도는 보고서 전체를 아우를 기준을 맞추느라 시간이 걸린다. 그 구간을 지나야 비로소 속도가 붙는다.


맞춰야 할 것은 크게 두 갈래다. 하나는 형식이다. 제목의 대소문자를 어디까지 적용할지, 용어집에 없는 조직명을 어떻게 옮길지, 인포그래픽 항목을 명령형 동사로 쓸지 동명사형이나 명사구로 쓸지 같은 것들이다. 다른 하나는 내용이다. 회사가 속한 업계와 사업 내용은 물론 회사의 성격까지 새로 익혀야 한다. 품이 드는 일이지만 여기에는 뜻밖의 즐거움이 숨어 있다.


용어집은 단어를 정해줄 뿐 이런 판단까지 정해주지는 않는다. 판단은 보고서 안에 들어가 직접 부딪혀야 정해진다. 기준이 정리됐다고 느끼는 순간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더 이상 정할 게 나오지 않을 때가 정리된 때다.


이번 보고서에서 늘어난 것은 형식 쪽이었다. 자회사들이 모두 같은 업계에 속하고 지난 몇 년간 같은 업계의 보고서를 꽤 번역해온 터라 내용은 낯설지 않았다. 대신 자회사가 열 개이니 조직명도 사업장명도 표기 규칙도 그만큼 늘어났다.


러닝커브의 비율은 같아도 세 배 분량에서는 그 구간이 평소 보고서의 절반 가까이 된다. 기준을 세우는 구간이 길어지고 그 기준을 지켜야 하는 범위도 세 배로 넓어진다. 처리할 분량보다 머릿속에 동시에 붙들고 있어야 할 것이 많아서 정신이 없다.


분량이 이만큼 커지면 여러 번역가가 나눠 맡는 경우가 많다. 비슷한 규모의 보고서를 몇 명이 나눠 번역하고 감수자 한 명이 전체를 맡았는데 납기 후 몇 달이 지나도록 마무리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유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나눠 맡으면 번역가마다 러닝커브를 따로 겪고 각자 다른 기준을 세운다. 마지막에 한 사람이 그것을 하나로 맞추려면 보고서 전체의 기준을 뒤늦게 다시 세우는 셈이 된다. 감수자 한 사람의 역량 문제가 아니다. 나눠 맡는 구조에서는 누가 감수해도 같은 일이 생긴다.


그래서 올해 이 대형 보고서 입찰을 준비하던 클라이언트에게 일관성이 효율의 첫걸음이라고 제안했다. 그 방법으로 품질 관리 프로세스와 스타일 가이드를 정리해 건넸다. 입찰은 성공했고 보고서는 전량 내게 맡겨졌다. 대형 보고서일수록 나눠서 빨리 끝내는 것보다 하나의 기준으로 끝까지 가는 것이 결국 더 빠르다.


그 스타일 가이드는 하루아침에 나온 것이 아니다. 3년째 보고서를 번역하면서 판단이 필요했던 지점을 그때마다 규칙으로 정해두었고 그 규칙이 꽤 쌓였다.


제목 대소문자가 그런 예다. 한국에서는 영어 제목의 단어마다 대문자를 쓰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요즘 영어권 보고서를 읽다 보면 첫 단어만 대문자로 쓰고 나머지는 소문자로 두는 경우가 더 많다. 소문자로 쓴 제목은 한결 가볍고 친근하게 읽혔다. 그 뒤로 소제목부터 가능하면 소문자로 쓰고 있다. 큰 제목까지 바꾸기에는 아직 조심스러워 천천히 그 방향으로 옮겨가는 중이다. 그렇게 정해둔 기준이 다음 보고서의 출발점이 된다.


용어집이 단어를 쌓는 일이라면 규칙은 판단을 쌓는 일이다. 러닝커브는 매번 오지만 쌓아둔 판단이 그 커브를 조금씩 짧게 만든다. 규칙을 글로 정리하는 동안 나 자신도 정리되었다. 감으로 하던 판단에 이유가 붙자 비로소 체계가 되었다.


그 뜻밖의 즐거움은 내용을 익히는 데서 온다. 보고서를 그냥 읽으라고 하면 생각보다 오래 집중하기 어렵다. 그런데 번역하려고 한 자 한 자 들여다보며 새로운 업계를 알게 되고 회사의 성격을 파악하다 보면 어느새 보고서에 빠져든다. 이 회사가 이런 일을 하는구나, 이런 노력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문다.


가스회사 보고서를 번역할 때였다. 가스라고 하면 도시가스나 LNG 정도만 알았는데 반도체 생산에도 고순도 가스가 필요하다는 것은 새로운 발견이었다. 그냥 읽었다면 지나쳤을 수도 있는 사실이다. 번역은 아마 가장 느리고 그래서 가장 깊은 읽기일 것이다.


그 깊은 읽기에 드는 시간의 상당 부분은 기준을 세우는 데 쓰인다. 거창한 합의 절차가 아니어도 된다. 조직명과 사업장명의 공식 영문 표기 목록 하나만 먼저 건네받아도 번역가가 혼자 세워야 할 기준은 그만큼 줄어든다. 대형 보고서의 시간은 번역 속도가 아니라 기준이 언제 정해지느냐에 달려 있다.


이전 17화취향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