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초중반으로 예정됐던 프로젝트들이 공교롭게 한꺼번에 지연되면서 미니 브레이크가 생겼다. 이런 시간이 주어지면 즐거움보다는 불안이 먼저 온다. 계획에서 어긋났기 때문이다. 소파에 앉아 쉬는 대신 작업 데스크에 앉아 비수기가 되면 하려고 했던 일들을 미리 조금씩 해두었다. 새로운 클라이언트 개발을 위한 사전 작업, 번역 프로세스 정비 같은 것들이었다.
그 사전 작업마저 끝나자 이제 뭘 하지, 하는 막막함이 찾아왔다.
그 막막함 속에서 어제부터 다시 필사를 시작했다. 글로벌 기업의 지속가능성 철학과 활동을 담은 보고서를 읽는 재미, 영어 감각을 유지하는 효과, 만년필로 눌러쓰는 손의 감각, 그리고 어느새 마음이 가라앉는 느낌까지. 한 가지 행위에 여러 가지가 딸려 왔다.
필사를 하다 보니 문득 지금도 그때와 똑같이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대학 4학년 때, 자취방에 웅크리고 앉아 영어 시사주간지를 읽으며 분석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토플 바카라을 풀거나 학원을 다니는 대신 그때도 나는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요령을 잘 부리지 못하는 성향이 공부하는 방식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던 셈이다. 읽고 또 읽으며 해석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잘 쓴 영어가 몸에 배었다. 그 습관은 미국에 와서도 이어졌고, 지금 번역가로 살아가는 데 근간이 되어주고 있다.
AI가 번역을 이렇게 잘해주는데 영어 공부가 왜 필요하냐는 말을 종종 듣는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더 중요한 건 잘 쓴 영어에 대한 감각을 갈고닦는 일이라고 믿는다. 계획이 어긋나 막막해질 때마다 결국 손이 가는 곳은 언제나 이런 돌아가는 길이었다. 누구나 가지지 못한 눈을 가지려는 노력, 그것이 지금 번역뿐 아니라 어느 분야에서든 통하는 원칙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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