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내 내다보니, 내가 되었다]

절에 가서 살아라.

by태고


" 엄마, TV 소리 좀 줄여줘. "



엄마가 도끼눈을 뜨며 나를 노려본다.


" 야, 내가 내 집에서 TV도 못 트냐??


조용한 절에 가서 살아, 이년아 "



전화를 받는 순간, 이 사람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부터 생각한다.

그게 일상이 되다 보니,

어느새 나에게 쉰다는 것은

아무것도 듣지 않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 같다


그렇다

엄마 말이 맞다.

언젠가부터 집에서 발생하는 소음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초를 하나 켠다.

휴무 전날은 슈퍼에 들러 라면을 사고, 과자를 산다.

불도 되도록 켜지 않는다. 좋아하는 주광색 조명을 킨다.

동굴에 들어갈 준비를 한다

이틀 동안 아무것도 듣지 않겠다.


이것이 내가 쉬는 방식이다


가습기를 튼다.

부드러운 연기가 얼굴에 떨어짐을 느낀다.

평온하다. 편안하다.

이렇게 변한 내 모습이 조금은 슬프다



우리 몸의 모든 세포가 새롭게 바뀌는 데 얼마나 걸릴까?
80일이 걸린다.
우리 몸은 매초 매일 380만 개의 세포를 교체한다.
죽은 세포는 몸 밖으로 배출되거나 분해되고, 동시에 새로운 세포가 만들어지며 그 자리를 메운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약 80일 후,
머리부터 발끝까지 상당 부분이 새로운 세포들로 교체된다
그렇다면 대부분이 새로운 세포들로 바뀐 80일 후의 나는,
지금 이 순간의 나와 같은 사람일까.
아니면 조금 다른 존재일까




나는 멜로 영화를 좋아했고, 그 남자는 SF 광이었다.

슬기로운 연애생활을 위해 합의를 보자.

이번 주는 멜로, 다음 주는 SF. 서로 토 달지 않기 OK?

평범한 연애였다

2년의 교제 후 그는 떠나갔지만 나는 지금 SF 광이 되었다.

[인터스텔라] , [그래비티]처럼 스케일이 크고 배경이 우주인 SF 영화가 나오면

눈이 돌아가서 영화관에 혼자 가서라도 본다.



- 예전엔 시끄러운 카페도 잘만 갔는데, 이제는 음악 소리 큰 카페를 피한다

- 예전엔 전화 오면 받았는데, 이제 쉬는 날은 진동도 꺼둔다




회식을 하고 나면 기가 빨려서 이틀은 앓아누워야 하는 극단 내향인이지만,

그런 성격으론 슬롯생활을 할 수가 없으니

매달 갚아야 할 빚은

나를 회사에서 발표도 하며,

나서야 할 땐 나설 줄 도 아는 선택적 외향인 흉내자로 둔갑 시켜 놓았다.



그렇게 나는,

SF 영화를 좋아하고, 쉴 때는 모든 소리를 차단하며, 회사에선 발표도 곧잘 하는

41세 이태고 씨가 되었다.


기억은 사라져도 흔적은 남는다.

나를 스쳐간 시간, 환경, 인연은

내게 영향을 미치고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겼다

그 흔적은 내가 된다.

흉내 내다보니 그 모습이 내가 돼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