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All-Day-Project (154/365)
바보의 생존학 , 99-100도, 멋-빈칸-타나토스, 검미성 작가님께 에 이어서
어느 인터넷 방송(아마 침튜브) 에서 만화가 김풍은 “낭만이란 곧 사치”라고 말했다. 무릎을 치게 만드는 직관적인 통찰이다. 가성비와 효율성이 모든 행동의 준칙이 된 현대 슬롯에서, 아무런 실용적 이득을 가져다주지 않는 낭만은 본질적으로 가장 값비싼 비용을 치러야만 누릴 수 있는 사치품이기 때문이다.
박노해 시인 역시 그의 시 «진정한 멋»에서 이 ‘사치’의 감각을 전면으로 끌어올린다. 시인은 말한다. 제대로 된 사치란 외부의 화려한 장식을 덧붙이는 낭비가 아니라, “자신이 정말로 좋아하는 것을 위해 나머지를 기꺼이 포기하는” 궁극의 자기 절제라고. 그리고 그것이 인간 그 자체를 빛나게 하는 ‘진정한 멋’의 조건이라고 말이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간을 보며 손해 보지 않으려는 영악함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왜 우리는 여전히 어떤 인물과 선택에 가슴을 데이며 ‘멋’을 느끼는가. 그것은 그들이 실제 삶에서 엄청난 기회비용을 치르며 자기만의 사치(낭만)를 주체적으로 수행(Performance)해 내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길을 기웃거리는 대신, 단 하나의 게임을 선택하고 나머지를 과감히 비워낸다.
과거 20년 동안 내 안을 맴돌던 날것의 이분법이 있었다. 바로 ‘바보와 개새끼’ 이론이다. 사람은 극단적인 딜레마 상황에서 이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는 게임이론의 고전인 ‘죄수의 딜레마’와 정확히 포개어지는데, 배신을 선택해 이익을 챙기는 자가 ‘개새끼’이고, 침묵과 협력을 선택해 독박을 쓰는 자가 ‘바보’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느끼는 ‘멋’의 스펙트럼이 이 극단의 인물들에게 모두 걸쳐 있다는 사실이다.
첫째는 ‘신념의 멋’이다. 이는 이상(Idea)을 위해 현실의 안락, 보편적인 성공, 혹은 생존이라는 거대한 ‘나머지’를 기꺼이 포기하는 선택이다. 내 삶의 길이를 줄이더라도 선명도를 높이겠다는 선언이다. 박노해 시인의 문법으로 보면, 나를 완전히 비워내어 고귀한 가치를 채우는 가장 우아한 사치다.
둘째는 반대편에 존재하는 ‘생존의 멋’이다. 진흙탕을 구르며 비굴해질지언정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자들의 눈빛에는 서슬 퍼런 에너지가 있다. 이들이 멋진 이유는 ‘생존’이라는 궁극적인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인간이 가장 버리기 힘들어하는 ‘자존심, 체면, 명예’라는 거대한 나머지를 과감하게 내던지기 때문이다. 이 역시 자존심을 포기하는 엄청난 비용을 치르는 역설적인 사치다.
결국 진짜 멋이 없는 비겁함은 유한게임과 무한게임 사이에서 간을 보며, 아무것도 버리지 않은 채 모든 이익만 취하려는 영악한 기회주의다. 반면 진짜 멋은 내가 처한 환경에서 ‘생존’이든 ‘신념’이든 하나의 게임을 명확히 선택하고, 그 규칙을 감당하기 위해 나머지를 단호하게 잘라내는 태도에서 탄생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게임의 성격은 어떠한가. 식민지와 전쟁, 압축성장기를 거쳐온 한국 슬롯는 명백히 ‘이번 한 판’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유한게임의 연속이었다. 미래의 그림자가 극도로 짧았기에 배신은 합리적 생존 전략이었고, 협력을 말하는 바보는 도태되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있다. 정보의 투명성으로 인해 평판이 즉각적으로 공유되고, 구독 경제와 플랫폼 비즈니스로 인해 관계가 장기화된다. 게임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미래의 그림자(shadow of the future)’가 무한히 길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무한게임에서는 첫 수로 협력을 두고 신뢰의 계좌에 적금을 붓는 ‘바보(Tit-for-Tat)’가 복리의 힘으로 승리한다. 수학적으로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실의 시스템은 낡은 유한게임의 규칙으로 작동할 때가 많다. 여전히 단기 실적으로 줄을 세우고, 먼저 손을 내미는 자를 바보 취급하며 이용해 먹으려 든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진짜 사치로서의 멋, 즉 ‘Greater Fool(더 큰 바보)’의 용기가 요구된다.
Greater Fool이란 시스템이 아직 나를 보호해주지 않는 과도기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바보가 되기로 자처하는 자들이다. 남들이 배신의 주사위를 굴리며 즉각적인 현금을 챙길 때, 홀로 신뢰의 신호를 송출하며 기꺼이 독박을 쓰는 존재다. 당연히 그가 치러야 할 기회비용은 뼈아프고 막대하다. 그것은 조롱과 손실을 내 돈 주고 구매하는 삶의 가장 사치스러운 수행이다.
검미성 작가의 소설 《망겜의 힐러》에는 이 비장한 수행의 본질을 꿰뚫는 대사가 등장한다.
주사위에서 좋지 않은 눈이 나오는 것은 사람의 의지가 아니지만,
그 주사위를 던지기로 결정하는 것은 사람이지.
그리고 세상에는 좋지 않은 눈이 나올까 두려워
주사위를 아예 던지지 않는 사람들이 더욱 많고.
그러나 그는 주사위를 던졌으며,
좋지 않게 나온 눈조차 받아들이고 치열하게 싸웠으니,
그 모든 것은 그의 의지였다.
그러니 그는 운명의 노예가 아닌 승리자라,
태양의 갈채를 받을 자격이 있어.”
잃는 것이 두려워 주사위를 주머니에 숨겨두는 자들은 운명의 노예들이다. 그들은 가성비의 계산기를 두드리며 안전하게 살아남을 수는 있겠지만, 결코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없으며, 인간 그 자체의 고유한 빛을 뿜어내지도 못한다.
진정한 멋은 좋지 않은 눈이 나올 확률을 뻔히 알면서도 내 손으로 주사위를 굴리는 ‘낭만적 결단’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실제로 최악의 눈(배신, 실패, 고독)이 나왔을 때조차 비겁하게 핑계를 대거나 다시 개새끼의 문법으로 회귀하지 않고, 그 결과를 기꺼이 온몸으로 받아내며 다음 판을 준비하는 치열함 속에서 완성된다.
그것은 박노해 시인이 노래한 ‘궁극의 자기 비움’과 포개어진다. 주사위 눈이라는 환경적 제약을 넘어, 오직 자신의 의지로 판을 짜고 그 비용을 바카라임지겠다는 주체성이야말로 인간을 가장 아름답게 만들기 때문이다.
다시 거울 앞에 선다.
시스템이 알아서 무한게임의 규칙으로 바뀌기를, 나 대신 세상이 먼저 아름다운 바보들로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것은 멋이 없다. 누군가는 첫 번째 바보가 되어 Tit-for-Tat의 첫 수인 ‘협력’을 던져야만 비로소 세상의 게임 규칙이 바뀌기 시작한다.
내가 먼저 바보가 되는 일. 그것은 중2병적인 치기나 낭만적 도취가 아니다. 1회성 판돈을 쥐고 흔드는 유한게임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고, 내 삶의 평판 자본을 스스로 통제하겠다는 지독하게 영리하고 단단한 실존적 사치다.
나의 첫 주사위에서 좆같은 눈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사위를 던질 것이다. 그리고 그 불리한 눈조차 기꺼이 받아들이고 치열하게 나의 게임을 플레이해 나갈 것이다. 기꺼이 낭만이라는 가장 값비싼 사치품을 소비하며, 내 손으로 가지 않은 길을 만들어 갈 것이다.
이것이 바보의 생존학이 가르쳐주는 최종 전략이며, 내가 거울 앞에서 기꺼이 선택한 나만의 진정한 멋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