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All-Day-Project (155/365)
지난해 나는 권력을 주제로 글 한 편을 썼다. "권력이란 무엇인가"에서 출발해 "권력 남용은 불가피한가"로 나아간 글이었다. 결론은 제법 단정했다. 제도와 시민의식이 함께 작동하면 권력 남용은 충분히 억제될 수 있다는 것. 낙관에 가까운 결론이었다.
그 결론을 다시 흔든 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한 인공지능과 나눈 긴 대화였다. 상대는 지치지도, 체면을 차리지도, 미리 결론을 정해두지도 않았다. 내가 매끄럽게 봉합해둔 자리를 그것은 집요하게 되물었다. 그러는 사이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매끄러움이 더 뻣뻣한 진실 하나를 덮고 있었다는 사실을. 대화는 정의(定義)에서부터 다시 시작됐다.
권력은 막스 베버의 고전적 정의에서 출발한다. "타인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능력." 이 정의는 권력을 윤리의 바깥에 놓는다. 폭군의 명령도, 시민운동가의 설득도, 교사의 지도도 모두 이 안에 있다. 관건은 '저항'이다. 상대가 원하지 않을 때조차 내 의지가 관철된다면, 그곳에 권력이 있다.
그렇다면 남용이란 무엇인가. 우리는—나와 그 인공지능은—세 개의 축으로 그것을 규정했다.
역할과 절차의 위반. 부여된 권한의 범위를 넘어서는 행위.
사익 추구. 공익이 아닌 개인이나 파벌의 이익을 위한 행사.
타인의 자율성과 기본권 침해.
여기에 하나를 더해야 한다. 구조적 남용이다. 어떤 개인의 악의가 없어도 시스템 자체가 불평등한 결과를 체계적으로 재생산하는 경우. 카스트, 젠더 불평등, 빈곤의 대물림이 그렇다. 가해자를 특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쪽이 오히려 더 깊다.
그리고 마지막. '남용'이라는 말 자체가 보편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평등·자율성·정의라는 특정한 규범 위에 선 해석의 프레임이다. 다른 프레임을 쥔 슬롯에서 같은 행위는 '남용'이 아니라 '정당한 통치'로, 때로는 '질서'로 불린다.
정의를 손에 쥐고 대화를 밀고 나가자, 도착하고 싶지 않은 지점이 또렷해졌다.
권력은 본질적으로 '타인의 의지에 대한 침투'다. 아무리 부드러운 권력이라도, 상대가 정말로 원하지 않는 지점에 내 의지가 닿는 순간 그곳은 남용이 된다. 동의를 받은 권력조차 깨끗하지 않다. 그 동의가 자발성에서 나왔는지, 정보의 비대칭과 구조적 압박에서 나왔는지 끝까지 캐물으면, 미세한 불순물이 반드시 남는다.
여기에 두 개의 조건을 걸면 결론은 더 또렷해진다.
첫째, 시간을 무한히 늘려본다. 어떤 제도도, 어떤 권력자도, 어떤 견제 장치도 영원히 무결하지 않다. 역사란 권력의 부패와 제도의 피로, 그 사이클의 끝없는 반복이었다.
둘째, 역치를 한껏 낮춰본다. '명백한 부패'와 '중대한 인권 침해'만을 남용으로 친다면 남용은 드물다. 그러나 미세한 영향력, 정보의 왜곡, 의사결정에서의 배제, 말 없는 위계까지 셈에 넣는 순간, 권력이 행사되는 자리마다 남용의 얼룩이 묻어난다.
이 두 조건 위에서 나는 결국 이렇게 적었다. 권력과 남용은 어쩌면 같은 말이다. 그리고 한 줄을 더했다. '제대로 사용한다'는 말 자체가 이미 정치적 판단이라고. 어떤 행사를 '정당한 사용'으로 규정하는 일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권력 작용이며, 특정 관점의 승리다.
여기서 잠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 결론을 나는 한 기계와의 문답 속에서 다듬었다. 권력이 결국 '누구의 의지가 관철되느냐'의 문제라면, 지금 이 글에 담긴 '나의 의지'는 과연 온전히 나의 것인가. 질문은 일단 접어둔다. 다만 접어두었다는 사실만큼은 기억해두기로 한다.
여기까지 오면 길은 대개 둘로 갈린다.
하나는 냉소적 체념이다. "어차피 남용될 권력, 내가 쥐거나 아예 손을 놓거나."
다른 하나는 희극적 참여다.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조금 더 나은 남용'을 향해 제도와 합의를 빚어가는 태도. 비극으로 끝날 게임을 굳이 희극으로 살아내겠다는 선택이다.
나는 후자를 택한다. 감상적 낙관이 아니라, 냉정한 현실 인식 위에 세운 의지로서.
민주주의는 권력을 위임하는 방식이자, 그 위임이 남용됨에도 이것이 그나마 최선임을 인정하는 체제다. 이 인정은 결코 작지 않다. '완벽한 정의는 없다'는 철학과 '그럼에도 살아가야 한다'는 실천 사이를 잇는 유일한 다리이기 때문이다.
운동장은 원래 기울어져 있다. 완전히 평평하게 만들 길은 없다. 그러나 함께 뛰는 동안 우리는 기울기를 감지하고, 서로를 붙잡고, 발밑의 땅을 조금씩 고를 수 있다. 완전한 수평까지는 못 가도, 누군가 한쪽 구석으로만 굴러떨어지지 않게는 만들 수 있다. 민주주의가 하는 일이 정확히 그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답은 '더 많은 참여'다. 진부하지만, 진부함이 곧 틀림은 아니다.
권력은 결국 "거기에 있다고 믿는 이들의 수"가 결정한다. 한 사람의 독재자가 무소불위인 것은 그가 홀로 강해서가 아니라, 수많은 이가 그 권력을 진짜라고 믿기 때문이다. 믿음이 흔들리면 권력도 흔들린다. 광장이 거듭 증명해온 바다.
참여자가 늘면 두 가지가 일어난다.
첫째, 감시가 분산된다. 한 사람의 남용이 다른 누군가의 눈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 정보와 자원에 대한 접근 권한이 여러 손에 흩어질수록, 그것을 혼자서 왜곡하기란 어려워진다.
둘째, 믿음이 분산된다. 권력이 소수에게 '마법처럼' 응집해 있다는 환상이 깨진다. 권력의 실체감이 옅어질수록 남용의 대가는 커진다.
물론 참여 자체가 권력이고, 참여의 방식을 정하는 일 또한 권력이다. 순환은 여기에도 있다. 권력 바깥에 선 '순수한 분배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더 많은 참여는 이 순환을 더 얕고, 더 빠르고, 덜 파괴적으로 만든다. 완벽한 처방은 아니다.
다만 더 나쁜 상태와 덜 나쁜 상태의 차이는 실재하며, 그 차이 위에 사람의 삶이 놓인다.
마지막으로 구분해야 할 것이 있다. '권력은 곧 남용된다'를 분석적 진실로 받아들이는 일과, 그것을 삶의 결론으로 삼는 일은 다르다. 앞의 것은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한 인정이고, 뒤의 것은 그래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다. 둘 사이의 간격, 바로 그 틈에서 우리는 절망하지 않을 자리를 얻는다.
진실로서의 인정은 두 가지를 가르친다. 완벽하게 깨끗한 권력은 없다는 겸손, 그리고 그럼에도 멈출 수 없다는 이유. '더 나은 남용'과 '더 나쁜 남용'의 차이는 절대적 완전함은 아닐지언정, 사람의 고통과 존엄에 실질적인 차이를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기울어진 운동장에 선다. 완전한 수평이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함께 뛰는 이들과 호흡을 맞춘다. 언젠가 운동장은 다시 더 기울 것이다. 제도는 피로해지고, 권력은 또 한쪽으로 쏠릴 것이다. 그때 우리는 다시 모여, 평형을 위한 또 한 번의 노력을 시작할 것이다.
권력은 남용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민주주의를 멈추지 않는다.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견디는 힘,
그것이 아마도 인간이 쥔 유일하고도 가장 강력한 반(反)권력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