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All-Day-Project (153/365)
재미있는 글 에 이어서 생각하기
우연히 예전에 끄적여두었던 ‘취향의 지도’를 다시 펼쳐보았다. 무언가를 오랫동안 끈질기게 고민하며 매달렸다기보다는, 무심코 다시 읽어 내려간 내 글 속에서 문득 흩어져 있던 생각들이 하나의 궤적으로 연결되는 기분이 들었다.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에 나오는 “네가 좋아하는 것을 왜 좋아하는지 설명할 수 없다면, 그것은 진짜로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문장에 찔려 충동적으로 적어 내려갔던 파편들. 장르 문학, 이세계물, ‘그럴듯한 구라’로서의 세계관, 자기 완결성을 지닌 설정, 살아 숨 쉬는 캐릭터.
혼자만의 끄적임으로 남을 뻔했던 이 지도를 들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며 걷기 시작했다. 질문이 덧칠해지고, 반박이 틈을 파고들며, 마침내 빈칸들이 채워졌다. 이 글은 내 글을 다시 들여다보며 재발견한 취향의 해부도이자, 서사를 읽어내는 나만의 작은 나침반이다.
‘그럴듯한 구라’의 가장 큰 적은 아이러니하게도 과도한 설명이다. 작가가 모든 것을 촘촘하게 설명하려 드는 순간, 독자는 세계를 탐험하는 여행자에서 수동적인 방관자로 전락한다. 세계관은 나무의 뿌리와 같아서, 보여줘야 할 것은 가지와 잎의 흔들림이지 흙 속을 파헤친 뿌리의 전 단면도가 아니다. 적절한 모호함이라는 ‘빈칸’이 존재할 때 독자는 비로소 자신의 상상력과 경험을 투사하며 그 세계를 공동 창작하게 된다.
이 빈칸의 미학은 단순히 마법의 원리나 과거의 사건을 숨겨두는 설정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 더 깊은 층위에서, 가장 매혹적인 빈칸은 ‘정답이 없는 세계’ 그 자체를 의미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정답의 잣대로 끊임없이 평가받는 피로한 세계다. 그런데 허구의 세계마저 작가가 교조적인 태도로 “이것이 옳다”며 도덕적 푯말을 박아둔다면 숨이 막힐 수밖에 없다. 오히려 철저히 정답이 없는 딜레마 앞에 인물을 세워둘 때 서사는 진동한다.
어느 쪽을 택하든 완벽한 해답은 없고 잃어버릴 무언가만 남는 상황. 작가가 윤리적 판단을 유보하고 빈칸을 남겨둘 때, 우리는 그 선택의 무거움을 대리 체험하며 기꺼이 인물과 함께 앓는다. 즉, 훌륭한 빈칸은 현실에서 박탈당한 ‘선택의 고뇌와 자유’를 독자에게 돌려주는 공간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픽션의 캐릭터에게 느끼는 ‘멋’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단순한 동일시(내가 그 사람이 된 기분)나 감정이입(그 사람의 입장에 공감함)과는 다르다. 대화를 통해 우리는 아래와 같은 가설을 세웠다.
멋은 철저히 ‘적당한 거리감’에서 태어난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갈망,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일말의 동일성, 그리고 그것이 내 안의 이상향일지도 모른다는 성찰.
너무 가까우면 연민이 되고 너무 멀면 냉소가 되지만, 그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할 때 우리는 ‘나와 다르지만, 그 다름을 기꺼이 존경하고 싶은’ 멋을 느낀다.
그런데 이 공식만으로는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 어두운 매혹이 있다. 바로 타나토스(죽음과 파괴 충동)다. 생명을 확장하고 무언가를 쟁취하려는 에로스의 서사(영웅의 성장기 등)가 아니라, 자신을 세계에 용해시키고 단절을 택하며 끝내 파국을 맞는 이들에게서 우리는 왜 숭고함마저 느끼는가.
에로스가 ‘어떻게 승리하고 살아남을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라면, 타나토스는 ‘어떻게 나만의 방식으로 질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다. 타나토스가 멋으로 승화되는 지점은, 그것이 인간이 가진 ‘통제와 생존에 대한 강박’을 완전히 놓아버리는 궁극의 해방감이기 때문이다. 세상과 타협하여 생존하는 대신, 거꾸로 선 목표(소멸)를 향해 돌진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완벽하게 통제해 내는 캐릭터들.
마지막 순간 녹색 불빛을 향해 손을 뻗으며 부서지는 개츠비나, "빵!" 하고 웃으며 쓰러지는 카우보이 비밥의 스파이크 스피겔을 떠올려 보라. 그들의 소멸 궤적이 예외적으로 ‘완벽한 자유’와 일치할 때, 우리는 현실에서는 감히 꿈꿀 수 없는 형태의 카타르시스와 미학적 경외감을 경험한다.
텍스트를 마주할 때 우리는 종종 필연적인 불편함과 마주한다. 나는 이 불쾌함을 해부하기 위해 두 개의 축을 교차시켰다. ‘작가의 의도성’과 ‘서사적 필요성’이다.
이 사분면을 통해 내가 가장 견디지 못하는 텍스트의 정체가 선명해졌다. 작가의 무의식적 혐오(여성 비하, 타자 혐오, 극우적 마초이즘 등)가 투영되었으면서 서사적으로 아무런 필연성도 없는 글.
나는 그런 텍스트를 주저 없이 덮는다. 반면, 《파이트 클럽》처럼 극단적인 파괴 충동과 남성성의 폭력이 작가에 의해 치밀하게 ‘의도되었고’, 또 현대슬롯의 병리를 찌르는 서사에 반드시 ‘필요한’ 불쾌함이라면 나는 기꺼이 그것을 이야기의 일부로 견뎌낸다.
하지만 이 사분면에는 끊임없이 독자를 시험에 들게 하는 ‘회색 지대’가 존재한다. 작가가 비판을 위해 의도적으로 불편한 현실을 서사에 끌어들였으나, 그 폭력과 일탈의 묘사가 지나치게 매혹적인 나머지 오히려 비판하려던 대상을 미화해버리는 경우다.
피카레스크물(악인이 주인공인 장르)이나 안티 히어로 서사에서 흔히 발생하는 이 딜레마 속에서, 독자는 작가와 끊임없는 줄다리기를 해야 한다. ‘나는 지금 이 불쾌한 서사적 도구에 비판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는가, 아니면 은밀하게 동조하며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로 소비하고 있는가?’ 이 질문을 멈추지 않는 한, 불쾌함마저도 훌륭한 독서의 재료가 된다.
“이토록 치밀하게 분석한다면, 직접 한번 써보는 건 어떨까?”
대화 상대의 제안에 나는 그저 웃었다. 아직은 텍스트를 탐구하고 해체하며 내 안의 지도를 수정하는 즐거움이 백지앞에 서는 창작의 부담보다 크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내 글을 다시 읽고 빈칸을 채워나가며 타인과 대화를 나눈 이 과정 자체가 이미 아주 느슨한 형태의 창작이었는지도 모른다. 수동적인 소비자를 넘어 텍스트의 해부도를 그리는 순간, 독자는 필연적으로 창작자의 시선을 닮아가기 때문이다.
언젠가 진짜 내 글을 쓰게 된다면, 작가가 독자를 가르치려 들지 않는 한적한 마을의 3일짜리 이야기 같은 것을 써볼지도 모른다. 뿌리는 보이지 않게 숨기고, 정답 없는 딜레마라는 빈칸을 남겨두어 독자가 스스로 걸어 들어올 수 있는 세계. 거기에 거리감을 유지한 채 동경할 수 있는(때로는 기꺼이 부서지는) 캐릭터 하나, 그리고 외면할 수 없는 불편한 질문 하나를 던져두는 그런 글 말이다.
그때까지는 기꺼이 즐거운 탐구자로 남을 것이다. 어제 쓴 내 글을 오늘 다시 읽으며 생각을 뒤집고 확장했던 것처럼, 이 글 역시 완성된 마침표가 아니라 내 취향의 지도를 그리는 끝없는 여정의 의미 있는 기착지로 남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