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All-Day-Project (148/365)
바보의 생존학 에 이어서, 규범의 역설 에 이어서 백래시 시대 에 이어서 고민하기
우리는 이전 글에서 백래시의 시대, 단절된 공동체, 피해 인식의 딜레마라는 암울한 진단을 내렸다. 그러나 당신이 지적하듯, 그 속에서도 긍정적인 커뮤니티의 사례는 분명히 존재한다.
가족 같은 회사가 아니라, 특정 목적을 위해 모인 TF. 그 TF는 영속적이지 않다. 구성원들은 원래 팀으로 돌아갈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일시적 공동체' 안에서는 놀라운 수준의 협력과 집중이 일어난다. 왜일까?
공유된 목적은 의도나 누군가의 주도보다는 '역사적 흐름'처럼 보일 때가 있다. 이는 매우 깊은 인식이다. 어떤 목적은 누군가가 '우리는 이것을 하자'고 선언해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지하수가 스며나오듯, 수많은 개인들의 불만, 열망, 그리고 우연한 계기가 겹쳐지면서 '시대정신'의 형태로 응집된다.
물론 그 목적이 100% 모두를 단결시키는 것은 아니다. TF에도 반대자나 무관심자가 있다. 그러나 '충분히 많은 수'가 공유하면, 그 흐름은 '당연한 것'으로 굳어진다. 그리고 그 '당연함'의 지층이 쌓일 때,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부른다.
한국의 시위문화는 이 점에서 세계적으로 독특한 사례를 제공한다. 1980년대의 격렬한 충돌을 경험한 이후, 한국의 시위는 '촛불'이라는 상징과 '클락션'이라는 일상적 도구를 발견했다.
촛불은 가격이 저렴하고, 구하기 쉽고, 폭력적이지 않으며, 밤에 시각적으로 임팩트가 강하다. 클락션은 자동차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행동이다. 이 '낮은 문턱의 참여'는 '나는 여기에 동의한다'는 신호를 극도로 낮은 비용으로 송출할 수 있게 해준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웅적 희생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속된 시간에 나와서 클락션을 누르는 일'이라면 가능하다. 클락션을 누르는 그 순간, 그들은 '퍼스트 펭귄'이 아니다. 그들은 '세컨드 펭귄'도 아니다. 그들은 '제10만 번째 펭귄'이다. 그러나 그들이 없으면 그 어떤 집단행동도 임계점에 도달할 수 없다.
박종철, 이한열의 이름은 기억된다. 정의구현사제단의 사제들도 기억된다. 그러나 그 뒤를 이어 길거리로 나온 수십만 명의 '무명의 학생들', '클락션을 누른 시민들'이 없었다면, 그들의 죽음과 용기는 개인의 비극으로 끝났을 것이다.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퍼스트 펭귄의 용기만이 아니라, 세컨드부터 마지막까지의 '연쇄' 전체다.
KPOP의 사례는 더욱 흥미롭다. K팝 팬덤은 한국의 시위 문화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다. 전혀 다른 맥락(연예 산업, 팬덤 문화, 좋아요 경제)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특정 순간, 그것은 정치적 집단행동의 도구로 전환되었다.
2020년, 블랙라이브즈매터 운동 당시, K팝 팬들은 트위터에서 #WhiteLivesMatter 같은 경찰 측 해시태그를 K팝 직캠 영상으로 도배하는 전략을 펼쳤다. 이는 '무력한 개인이 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교란 전술'이었고,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K팝 팬덤이라는 공동체가 '물리적 동시성' 없이도 놀라운 수준의 '조직적 행동'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들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고, 대부분 얼굴도 모르지만, 특정 목표(좋아요 수 돌파, 음원 차트 1위, 특정 정치적 메시지 확산)를 위해 놀라울 정도로 빠르고 효율적으로 움직인다.
어떻게 가능한가? 그들은 '약한 연대'의 고수들이다. 강한 유대(가족, 친한 친구)는 아니지만, 공유된 취향과 정체성(fandom)이라는 '허구'를 중심으로 한 약한 연결망이, 특정 순간에 극도로 강력한 행동으로 전환된다. 그들은 '함께 하는 즐거움'을 이미 알고 있고, 그 즐거움이 '함께 하는 저항'으로 확장될 때, 참여의 심리적 비용은 현저히 낮아진다.
게임 커뮤니티에서 '시한부 환자를 위한 이벤트'에 동참하는 사례도 유사하다. 평소에는 서로를 '닉네임'으로만 알지만, '누군가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서사가 공유되었을 때,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암묵적 규범이 갑자기 작동한다. 게임 아이템을 모아 기부하고, 캐릭터로 퍼레이드를 열고, 그 순간을 스크린샷으로 기록한다.
이 모든 것이 온라인에서, 물리적 동시성 없이,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도 협력이 일어난다. 왜냐하면 '미래의 그림자'가 없더라도, '지금 이 순간의 공유된 감정'이 그 자체로 보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일회성 협력'이 가능한 조건이다.
우리는 종종 '최초의 용기'를 과대평가한다. 언론은 1번을 기억하고, 역사바카라은 1번을 쓴다. 그러나 실제로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2번, 10번, 1000번이다. 퍼스트 펭귄의 용기는 아무도 따라오지 않으면 그냥 '이상한 짓'으로 기록된다. 그가 '선구자'가 되려면, 뒤를 잇는 세컨드 펭귄이 반드시 필요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연쇄'다. 퍼스트 펭귄이 뛰어들고, 세컨드 펭귄이 그를 보고 뛰어든다. 그 순간, 세컨드 펭귄의 행동은 퍼스트 펭귄에게 '나 혼자가 아니다'는 확인을 주고, 주변의 관찰자들에게 '저런 행동을 해도 괜찮은가 보다'라는 신호를 보낸다.
세 번째, 네 번째가 뛰어들면, 그 행동은 더 이상 '이상한 짓'이 아니라 '작은 물결'이 된다. 열 번째가 뛰어들면 '시작된 것'이 된다. 백 번째, 천 번째가 뛰어들면 '시대의 흐름'이 된다.
이것을 '연쇄 반응의 물리학'이라고 부르자. 퍼스트 펭귄은 활성화 에너지다. 그러나 반응이 지속되고 확산되려면 '임계 질량'이 필요하다. 그 임계 질량을 채우는 것은 세컨드, 서드, 포스 펭귄들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컨드 펭귄의 역할이 단순히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세컨드 펭귄은 퍼스트 펭귄의 행동을 '정상화'한다. '저 사람이 미친 짓을 했다'는 평가가, 세컨드 펭귄이 등장하는 순간 '저 사람들이 무언가를 시작했다'로 바뀐다.
그리고 그것이 열 명, 스무 명으로 늘어나면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라는 프레임으로 전환된다.
세컨드 펭귄은 바로 그 프레임 전환의 첫 번째 고리다.
'현실적으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참여'가 중요하다. 이것은 매우 현실적인 전략이다.
'매일 밤 촛불을 들고 나가라'는 명령은 많은 사람을 지치게 한다. 그러나 '일주일에 한 번, 가까운 곳에서, 30분만'이라면 많은 사람이 감당할 수 있다. '거리에 나와서 최전방에 서라'는 부담은 너무 크지만, 'SNS에 같은 해시태그를 올리는 것'은 쉽다.
집단행동의 성공 조건 중 하나는 '참여의 문턱'을 낮추는 것이다. 문턱이 낮을수록 더 많은 세컨드, 서드, 포스 펭귄이 참여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참여할수록, 그 행동은 '정상'에 가까워진다.
이 '낮은 문턱의 참여'가 모여서 '99도'의 물을 만든다. 99도의 물은 아직 끓지 않는다. 그러나 그 온도를 유지하고 있다면, 마지막 1도의 열만 더해지면 즉시 끓는다. 문제는 99도를 유지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쉽게 지치고, 관심은 다른 곳으로 이동하며, '이 정도면 됐다'는 안주가 찾아온다.
따라서 '세컨드 펭귄'의 역할은 단순히 처음에 뛰어드는 것만이 아니라, 그 온도를 유지하는 '지속적 참여자'가 되는 것까지 포함한다. 즉, '99도를 유지하는 존재들'이 바로 역사적 전환의 숨은 주역들이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면, 우리는 이전까지의 '바보 이론'을 한 단계 수정할 수 있다.
초기 버전의 바보 이론은 '내가 먼저 바보가 되겠다'는 개인의 결단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는 중요하지만, 부담스럽고 외로울 수 있다. '내가 먼저'라는 압박이 오히려 용기를 주저하게 만들기도 한다.
수정된 버전의 바보 이론은 '함께 바보가 되는 기술'에 초점을 맞춘다. 여기에는 여러 층위가 있다.
첫째, '감당 가능한 바보짓'을 설계하는 능력. 나 자신에게, 그리고 함께할 사람들에게 너무 큰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 방식으로 협력의 게임을 설정하는 것. '영웅'이 아니라 '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행동 양식.
둘째, '세컨드 펭귄'을 환영하는 문화. 퍼스트 펭귄만 영웅시하지 말고, 두 번째로 뛰어든 사람, 세 번째로 뛰어든 사람, 그리고 그냥 따라온 사람에게도 똑같은 존중과 인정을 보내는 것. 그들이 바로 '99도를 100도로 만드는 결정적 차이'이기 때문이다.
셋째, '실패한 바보'를 안전하게 회수하는 시스템. 모든 바보짓이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실패한 바보를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아니라 '우리가 비웃어야 할 실패자'로 기억하는 문화는, 다음 바보의 용기를 죽인다.
반대로, 실패한 바보에게 '괜찮다, 함께 하자'는 손을 내미는 문화는, 실패의 비용을 낮추고 더 많은 시도를 가능하게 한다.
퍼스트 펭귄이 되고 싶은가? 그것은 좋은 선택이다. 하지만 당신이 세컨드 펭귄이 되기로 선택했다면, 그것도 좋은 선택이다. 더 많은 사람이 감당할 수 있고, 더 지속 가능하며, 혼자의 외로움을 덜 타는 선택이다.
"나는 세컨드 펭귄이 되겠다. 그리고 그 온도를 유지하는 99도의 한 방울이 되겠다."
그것은 '이것이 내가 선택한 게임이다'라는 첫 번째 고백의, 또 다른 버전이다. 덜 화려하지만, 더 견고하고, 더 많은 사람이 함께할 수 있는 버전.
우리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처음으로 손을 들고, 누군가가 두 번째로 손을 들고, 누군가가 그 손을 놓지 않고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서로의 이름을 모르고, 서로의 얼굴을 모르더라도, 그 손의 숲이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바로 '미래의 그림자'가 되어,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쓰기 시작할 것이다.
그것이 '함께 바보가 되는' 일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희망이다.
그리고 그것이, 백래시의 시대에도 바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