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All-Day-Project (146/365)
바보의 생존학 에 이어서 고민하기
우리는 이전 글에서 '바보의 생존학'이라는 하나의 전략을 정리했다. 개인이 무한게임에서 협력을 선택할 때, 그 선택은 평판 자본이 되어 복리로 불어난다는 논리였다. 그런데 이 논리는 하나의 전제 위에 서 있다. 바로 '평판이 실제로 기억되고 전파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질문이 솟아오른다. 집단 기억은 어떻게 동작하는가? 한 개인이 쌓은 평판은 어떻게 집단 전체의 '공유된 지식'이 되는가?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이 질문에 하나의 강력한 답을 제시한다. '공유된 허구'다. 인간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신, 국가, 법, 화폐)을 함께 믿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고, 이 능력이 대규모 협력을 가능하게 했다. 하라리의 논증을 따르자면, 집단 기억은 '이야기'의 형태로 작동한다. 이야기는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듣는 이의 뇌리에 감정과 이미지를 각인시킨다.
그러나 하라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집단 기억은 이야기만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프랑스 슬롯학자 모리스 알르바스는 '집단 기억' 개념의 선구자로서, 기억이 단순히 개인들의 합이 아니라 슬롯적 틀 안에서 구성된다고 말했다. 즉, 우리는 기억하는 방식 자체를 슬롯로부터 배운다.
이 관점에서 집단 기억의 형성 조건을 몇 가지 추출할 수 있다.
첫째, 반복되는 의례다. 매년 반복되는 기념일, 의식, 규칙. 이것들은 기억을 신체화한다. 몸이 기억하게 하는 것. 예배의 자세, 세배의 동작, 회의의 순서. 의례는 추상적 이야기를 구체적 행동으로 전환시킨다.
둘째, 공간과 장소다. 기억은 장소에 고정된다. 광화문 광장, 제주 4·3 평화공원, 회사 게시판, 단톡방. 기억을 담는 그릇이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하다.
셋째, 망각의 전략이다. 집단 기억은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잊어야 할 것을 선별한다. 어떤 사건을 기념할지, 어떤 인물을 영웅으로 삼을지는 '무엇을 잊을지'의 결정을 동반한다.
이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 개인의 경험은 집단의 기억으로 승화된다. 그리고 그 집단 기억은 다음 세대의 행동을 규율하는 '규범'의 토대가 된다.
여기서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들어간다. 도덕은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규범은 결국 제약에 불과한 것인가?
나는 '주어지는 도덕'이라는 개념에 회의적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십계명도, 선험적 도덕 법칙도, 결국은 특정 집단이 특정 시점에 합의한 규칙의 신격화였을 뿐이다. 도덕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된다.
그렇다면 규범은 단순한 제약인가? '하지 마라'는 명령의 집합인가?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하면, 우리는 니체의 관점에 서게 된다. 니체는 도덕을 약자가 강자를 묶어두기 위해 발명한 '노예 도덕'이라고 보았다. 규범은 권력에 대한 억압적 장치에 불과하다는 시각이다.
그러나 나는 이 시각이 절반의 진실만 말한다고 생각한다. 규범은 분명히 제약이다. 하지만 그 제약은 동시에 힘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이 역설을 이해하기 위해 하나의 비유를 빌리자. 강물이 제방 안에서 흐를 때, 제방은 강물의 자유를 제약한다. 그러나 그 제약 덕분에 강물은 에너지를 모아 전기를 생산할 수 있다. 제방 없는 강물은 범람하여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규범도 마찬가지다. '타인을 죽이지 말라'는 제약은 나의 행동 자유를 축소하지만, 그 제약 덕분에 나는 두려움 없이 길을 걸을 수 있다는 엄청난 자유를 얻는다. 제약이 자유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이 역설은 '바보와 개새끼' 이론과 정확히 연결된다. 개새끼는 제약을 거부한다. 그는 규칙을 무시하고 단기적 이익을 챙기는 것이 진정한 자유라고 믿는다. 바보는 제약을 받아들인다. 그는 '약속은 지킨다'는 자기 제약을 선택함으로써 장기적 신뢰를 얻는다.
누가 더 자유로운가?
단기적으로는 개새끼다.
그는 제약의 굴레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개새끼는 자신의 평판을 잃음으로써 오히려 더 많은 제약 속에 갇힌다. 그는 언제나 의심받고, 언제나 방어적이며, 진정한 협력의 세계에서 배제된다.
바보는 반대다.
그는 단기적으로는 제약 속에 갇혀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신뢰의 네트워크 안에서 더 넓은 자유를 누린다.
이것이 '제약을 더하는 것이 힘을 더해주는' 역설의 핵심이다. 자발적으로 수용한 제약은, 외부로부터 강요된 제약과 전혀 다른 효과를 낳는다.
엘리너 오스트롬의 공유자원 연구는 이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그녀는 전 세계의 공유목장, 공유어장을 조사하면서, 자발적으로 합의된 규칙을 지키는 공동체가 오히려 더 오래 지속되고 더 번영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중앙정부가 강요한 규제도, 완전한 자유방임도 실패하는 곳에서,
지역 공동체가 스스로 만든 '제약'이 성공했다.
그렇다면 가장 원초적인 제약, 즉 '당장의 생리적 욕구를 제한하는 슬롯적 합의'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식욕, 성욕, 안전욕구. 이 욕구들은 우리 몸의 가장 깊은 곳에서 솟아오른다.
동물이라면 이 욕구를 즉각 충족시키는 것이 옳다. 그런데 인간은 왜 음식을 나누고, 성적 충동을 통제하며, 당장의 안전을 버리고 위험을 감수하는가?
진화인류학의 답변은 '지연된 보상의 감지 능력'이다. 인간의 뇌는 '지금 먹는 고기 한 조각'보다 '나누어 먹고 얻는 장기적 협력 관계'가 더 큰 가치임을 계산할 수 있게 진화했다. 이것은 전두엽의 발달과 관련이 있다. 다른 동물들이 '지금-여기'의 자극에 반응하는 반면, 인간은 '미래-저기'의 이익을 상상할 수 있다.
이 능력이 문화적 학습을 통해 '도덕적 감정'으로 체화된다. '음식을 나누지 않으면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단순한 계산을 넘어 수치심이나 죄바카라감 같은 감정으로 자리 잡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슬롯적 합의'의 확장 메커니즘이다. 최초의 합의는 아마도 아주 작은 집단, 즉 던바의 수 범위 내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우리 부족은 함께 사냥한 고기를 나눈다'는 규칙이 그 예시다.
이 규칙이 확장되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규칙을 위반한 자에 대한 처벌' 시스템이다. 규범은 무료로 지켜지지 않는다. 위반자를 감시하고 처벌하는 메커니즘이 있어야 한다. 문제는 처벌 자체에도 비용이 든다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자신의 비용을 들여 남의 규칙 위반을 처벌하는가? 이른바 '일차적 처벌자' 문제. 진화심리학은 이 질문에 '처벌을 통해 자신의 평판을 높이려는 욕구'라는 답을 내놓는다. 즉, 규칙을 지키는 것뿐 아니라, 규칙 위반자를 처벌하는 사람까지 '바보'의 전략 안에 들어온다.
둘째, '규칙의 정당화 서사'다. 규칙이 단순한 힘의 관계로만 유지되면, 힘의 균형이 바뀔 때 규칙도 무너진다. 규칙이 오래 지속되려면 '이 규칙은 옳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종교, 이념, 철학이 그 역할을 한다.
한국 슬롯에서 이 역설이 잘 작동하는가? 솔직히 말해, 잘 작동하지 않는 지점이 많다.
첫째, 한국의 규범은 '자발적 합의'보다 '외부 강제'의 성격이 강하다. 압축성장기의 유산으로, 많은 규칙이 위로부터 내려왔다. 이 때문에 규범을 따르는 것이 '내 선택'이 아니라 '억압에 대한 순응'으로 경험된다. 결과적으로 규범은 힘을 주는 제약이 아니라, 단순히 짐이 되는 제약으로 남는다.
둘째, '무임승차자 처벌'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한국 슬롯는 '눈치'와 '체면'이라는 비공식적 제재에 크게 의존한다. 이는 작은 집단에서는 효과적이지만, 익명성이 높아진 현대 슬롯에서는 취약하다. 누가 규칙을 어겼는지 모두가 알지만, 누구도 '처벌자' 역할을 자청하지 않는다. '바쁘니까', '나만 손해 보니까', '내 일이 아니니까'.
셋째, 규범의 정당화 서사가 약하다. 한국 슬롯는 빠른 근대화 과정에서 전통적 서사(유교, 공동체주의)를 상당 부분 상실했고, 새로운 서사(자유민주주의, 인권, 생태주의)는 아직 충분히 체화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이 '왜 이 규칙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내적 동기를 갖지 못한다.
여기서 '바보의 생존학'은 다음 단계로 진입한다. 개인이 먼저 바보가 되는 것을 넘어, '작은 규범'을 함께 만들어가는 단계.
거대한 이념이나 국가적 프로젝트가 아니라, '우리 팀의 회의 규칙', '우리 동네의 쓰레기 배출 규칙', '우리 가족의 저녁 식사 규칙' 같은 것들. 이 작은 규범들이 자발적으로 합의되고, 지켜지고, 위반자에 대한 부드러운 제재가 작동할 때, 사람들은 '제약이 주는 힘'을 몸으로 경험한다.
이 경험이 축적되면, 더 큰 규범으로 확장될 수 있다. 신뢰는 위에서 아래로 전파되지 않는다. 신뢰는 아래에서 위로, 작은 공동체에서 큰 공동체로, 몸에 밴 습관에서 추상적 원칙으로 성장한다.
따라서 바보의 다음 전략은 이것이다. 먼저 바보가 되는 것을 넘어, 함께 바보가 되는 규칙을 만들자. 그 규칙은 처음에는 제약처럼 느껴지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우리에게 날개를 줄 것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자. '바보와 개새끼'의 이분법은 결국 '어떤 자유를 선택할 것인가'의 질문이었다.
개새끼의 자유는 제약이 없는 자유다. 하지만 그 자유는 고립의 자유이며, 불신의 자유이며, 언제나 배신당할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살아가는 자유다.
바보의 자유는 제약을 선택하는 자유다. 자신을 묶는 줄을 스스로 선택함으로써, 그 줄이 다른 이와 나를 연결하는 밧줄이 되는 자유. 혼자서는 누릴 수 없는, 함께일 때만 가능한 자유.
규범은 제약이다. 하지만 그 제약은 '족쇄'가 될 수도 있고, '날개'가 될 수도 있다. 차이는 그것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달려 있다. 남이 강요한 제약은 족쇄다. 함께 합의하고, 함께 지키고, 함께 어기는 자를 돌보는 제약은 날개가 된다.
이것이 내가 믿는 '제약의 역설'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보가 개새끼를 넘어설 수 있는 궁극적 이유다. 개새끼는 혼자 날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는 혼자 있는 곳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