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래시의 시대
바보는 어떻게 살아남는가

2026 All-Day-Project (147/365)

byJamin

바보의 생존학 에 이어서, 규범의 역설 에 이어서 고민하기


1. 역차별이라는 환상, 혹은 실체로서의 백래시


MAGA, 유럽의 네오나치즘, 한국의 극우화, 그리고 여혐. 이 현상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역차별' 호소다. '이제는 우리가 피해자다'라는 서사.


이 서사가 단순한 거짓말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 그렇지 않다. 적어도 주관적 인식의 차원에서는 '진짜'다.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진 특권(남성의 우위, 백인의 중심성, 기성세대의 경제적 지배력)이 조금씩 침식될 때, 그 침식을 경험하는 개인에게 그것은 '손해'다. 이전보다 못해졌다면, 그것은 상대적 박탈감이 아니라 절대적 경험으로 느껴진다.


게임이론의 언어로 번역하자면, 이는 '협력 게임'의 전환 과정에서 발생하는 '조정 비용'이다. 오랫동안 한쪽이 불평등한 혜택을 누리는 '불균형 협력'에 익숙해진 집단이, 갑자기 '공정한 게임'으로 전환될 때 극심한 고통을 느낀다. 그들은 자신들이 '배신당했다'고 느낀다. '원래 규칙이 그랬는데, 왜 갑자기 바꾸냐'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인식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너희는 손해 본 게 아니라 특권을 덜 누리는 것일 뿐"이라는 설명은 논리적으로는 옳을지언정, 심리적으로는 전혀 먹히지 않는다. 상대적 박탈감은 절대적 손실보다 더 격렬한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그렇다면 장기적 신뢰를 위해 기꺼이 단기적 손해를 감수하는 '바보 전략'은 이 지점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피해 인식을 무시하거나, 도덕적 우위에 서서 비판하는 것이 '개새끼' 전략을 강화할 뿐이라면?


2. 연결된 슬롯의 역설: 공조 대신 필터버블


이러한 상대적 박탈감과 피해 인식을 폭발적으로 증폭시킨 것은 다름 아닌 기술의 발전이었다. 1990년대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인터넷은 낙관주의의 상징이었다. 전 세계가 연결되면 서로를 이해하고, 갈등은 줄어들고, 인류는 하나의 공동체로 나아갈 것이라고 믿었다.


현실은 정반대였다. 연결은 더 강력해졌지만, 공조는 약화되었다. 왜 이런 모순적인 결과가 나타났을까?


진화심리학의 답변은 잔인하다. 인간의 뇌는 '전 세계 모두'를 '우리'로 인식하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던바의 수 150명이라는 인지적 한계를 넘어, 우리는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찾는다. 인터넷은 그 방법을 극도로 정교화했다. 알고리즘은 내가 이미 동의하는 의견만 보여주고, 내가 증오하도록 학습된 대상을 정확히 추천한다.


'동질 집단의 원격 연결'은 다원화와 진보적 의제의 확장에 기여한 면이 있다. 성소수자, 여성, 환경 운동가들이 물리적으로는 소수였지만 온라인에서 힘을 모은 사례는 분명하다. 그러나 동시에, 이 연결은 반대 집단과의 '공동체적 긴밀함'을 거의 완전히 소멸시켰다.


'한 판이 끝나면 헤어지는 사람끼리의 놀이 문화'는 정치 영역에까지 확장되었다. SNS 논쟁은 일회성 게임이다. 상대방의 닉네임도 기억하지 못하고, 다음에 다시 만날 가능성도 희박하다. 이런 구조에서 Tit-for-Tat의 협력 전략은 작동하지 않는다. 미래의 그림자가 너무 짧다. 그래서 사람들은 '최후의 일격'을 날리는 배신 전략에 더욱 매료된다.


3. 공동체의 조건: 물리적 동시성의 소멸이 가져온 것


"공동체는 물리적 동시성을 담보하는 것"이다. 하지만 온라인 커뮤니티는 '동시성'을 제공하지만 '물리적 동시성'은 제공하지 않는다. 같은 시간에 같은 채팅방에 접속하는 것과, 같은 공간에서 같은 땀을 흘리고 같은 음식을 나누는 것은 질적으로 다르다. 후자에서는 도망칠 수 없다. 갈등이 생기면 다음 날 또 얼굴을 마주쳐야 한다. 그 불가피성이 협력의 조건을 만든다.


사무실, 학교, 동네, 가족. 이 전통적 공동체들은 물리적 공간을 공유하기 때문에 '강제된 반복 게임'의 성격을 갖는다. 싫어도 또 만난다. 그 '또 만남'의 불가피성이, 사람들로 하여금 배신의 비용을 계산하게 만든다.


그런데 현대 슬롯는 이 '불가피한 또 만남'의 영역을 극적으로 축소시켰다. 온라인 게임은 언제든 옮길 수 있고, 학교는 졸업하면 끝이며, 동네는 이사 가면 그만이다. 가족조차도 물리적 거리 두기가 쉬워진 시대다.


이 '이탈의 용이함'은 개인의 자유를 확장했지만, 공동체의 규범을 유지하는 메커니즘을 심각하게 약화시켰다. '어차피 나중에 안 볼 사람'에게 왜 협력해야 하는가? 그것은 완벽한 죄수의 딜레마다. 그리고 그 답은 언제나 '배신'이다.


4. 피해 인식의 딜레마: 내 세대 안에서 나는 피해자일 수밖에 없는가?


"본질적이고 단기적이거나 적어도 내 세대 안에서 나 개인에게는 피해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계속 있는 것 같다." 이 인식을 부정하지 말자. 어떤 구조적 변화는 필연적으로 승자와 패자를 낳는다. 기후 정의를 위해 탄소 배출을 줄이면, 에너지 산업 종사자들은 피해를 본다. 여성 할당제가 도입되면, 일부 남성들은 승진 기회에서 밀려난다. 글로벌 공급망이 재편되면, 특정 국가의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는다.


이 '피해자'의 위치에 내가 서 있다면? 나는 과연 '바보'가 될 수 있을까? 장기적 신뢰를 위해 단기적 손해를 감수하라는 말이, 내 아이의 밥상을 빼앗는 일이라면?


여기서 바보 전략은 분명한 한계에 부딪힌다. 바보 전략은 '감당 가능한 손해'를 전제로 한다. 생존이 걸린 문제 앞에서는 협력을 선택할 여유가 없다. 이것이 압축성장기의 한국이 '개새끼 전략'에 매몰되었던 이유다.


그렇다면 지금의 백래시 현상은, 바로 그 '생존이 걸린(혹은 생존이 걸렸다고 느껴지는) 피해자들'의 반발이 아닌가? 기존 특권층이 갑자기 '피해자'가 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상대적 지위 하락을 '생존의 위협'으로 인식한다. 그 인식이 합리적이든 아니든, 그 인식이 현실을 움직인다.


5. 가능한 전환점: 피해를 공유하지 않고 공동체를 복원할 수 있는가?


이 절망적인 진단 속에서, 어떤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첫째, '피해'의 범위를 확장하는 상상력이다. 내가 지금 겪는 손해를, '나만의 손해'로 보지 않고 '우리가 함께 겪는 전환의 비용'으로 재정의하는 것. 예를 들어, 탄소세로 인해 난방비가 올랐을 때, '정부가 나만 괴롭힌다'고 생각할지, '이 비용은 지구를 살리는 데 함께 지불하는 것'이라고 생각할지. 후자의 프레임이 가능하려면, 그 비용이 공정하게 분배되고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믿음을 실제로 실현하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다.


둘째, '미래의 그림자'를 다시 길게 만드는 작은 실천들이다. 국가적·지구적 수준에서는 미래의 그림자가 짧아졌지만,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작은 단위에서는 여전히 길 수 있다. 아파트 동대표 선거, 온라인 게임 내 동호회, 아이들의 학부모 모임. 이런 수준에서는 '또 만날 사람'들과의 관계가 여전히 유효하다. 이 작은 공동체들 안에서 협력 게임을 성공시키는 경험을 축적하는 것. 그것이 상실된 신뢰의 근육을 다시 키우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


셋째, 온라인 공간에서도 '바카라임지는 자아'를 유지하는 것이다. 한 판이 끝나면 헤어지는 구조나 플랫폼을 탓하기보다, 나 스스로가 익명성과 일회성 뒤에 숨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파편화된 디지털 커뮤니티 안에서도 나의 발언과 행동이 누적되어 나 자신의 '장기적 평판'을 구성한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 결국 시스템을 바꾸는 것도, 문화를 바꾸는 것도 '미래를 내다보고 행동하는 개인'에서 출발한다.


6. 바보의 다음 질문: 나는 여전히 바보이기를 선택하는가?


결국 첫 번째 글로 돌아온다. "이것이 내가 선택한 게임이다."


모든 전략적 계산에도 불구하고, 환경은 바보에게 불리하다. 극우의 물결, 단절된 공동체, 피해 인식의 딜레마. 이 모든 것을 고려해도, 나는 여전히 바보이기를 선택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은 '예'지만, 전제가 붙는다.


나는 '순진한 바보'가 아닌 '전략적 바보'이기를 선택한다. 피해 인식을 부정하지 않는 바보. 상대의 손실을 인정하고, 그 손실을 분담하는 방법을 협상하는 바보. 물리적 동시성이 없더라도, 작은 단위에서는 '또 만남'을 의도적으로 설계하는 바보. 온라인 게임에서도 길드원과의 관계를 일회성이 아닌 지속적 관계로 전환하려는 바보.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혼자 바보'가 아니라 '함께 바보'가 되기를 선택한다. 백래시의 시대에 바보 한 명의 힘은 미약하다. 그러나 바보들의 연결망이 촘촘해질수록, 그 안에서 '협력이 이긴다'는 경험의 사례가 축적될수록, 그 이야기는 새로운 서사가 된다.


7. 끝나지 않는 질문: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당신은 이 거대한 흐름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나도 확신할 수 없다. 때로는 개새끼 전략이 너무나 합리적으로 보인다. 때로는 바보의 길이 너무나 외로워 보인다. 그래도 다시 묻는다. 내가 선택한 게임은 무엇인가?


만약 당신이 이 글을 여기까지 읽었다면, 당신은 이미 그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고 있는 중일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같은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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