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하는 것과 해야 하는 것은 다르니까
장을 보러 가기 전, 남편에게 감자 심부름을 받았다.
"러셋 포테이토로 사 와."
마트에 가면 감자가 여러 종류로 나뉘어 있다는 건 평소에도 알고 있었다. Russet, Yukon Gold, Red Potato, White Potato, Fingerling, 등등. 늘 보던 감자들이었다. 그저 감자가 참 많구나, 그 정도였다.
그런데 그가 러셋 포테이토를 사 오라고 하니 감자들이 갑자기 다르게 보였다. 이름이 다르고, 생김새도 조금씩 다르고, 잘 어울리는 요리도 따로 있었다.
Russet은 프렌치프라이와 베이크드 포테이토에 잘 맞고, Yukon Gold는 매시드 포테이토나 로스팅에 좋다. Red Potato는 껍질째 구워 먹거나 샐러드에 들어가고, Fingerling은 통째로 구우면 제법 근사하다.
평소에는 그냥 지나치던 감자들이 그날은 갑자기 자기소개를 하는 것 같았다.
"나는 Russet입니다. 프렌치프라이를 잘합니다."
"저는 Yukon Gold입니다. 매시에 자신 있습니다."
감자도 적성이 있는 모양이다. 감자 코너에 서 있으니 괜히 채용 면접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자네는 뭘 잘하지?
미국 감자는 잘하는 일이 꽤 분명하다. 하지만 잘하는 일이 정해져 있다고 해서 꼭 그것만 해야 하는 건 아니다. Russet이 프라이에 잘 맞는다고 해서 프라이만 될 필요는 없고, Yukon Gold가 매시에 좋다고 해서 평생 매시드 포테이토만 할 이유도 없다.
그렇다고 Yukon Gold로 프렌치프라이를 만들었다고 해서 감자가 갑자기 자격을 잃는 것도 아니다. 조금 더 바삭하게 만들고 싶다면 Russet이 더 어울릴 수 있지만, Yukon Gold로 만든 프라이도 결국 감자튀김이다.
잘 맞는 일이 있다는 것과, 다른 일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니까.
한국에서 감자를 살 때는 조금 다르다.
"감자 좀 사 와."
그러면 일단 감자를 사 온다. 집에 와서야 결정한다. 오늘은 볶을까, 조릴까, 전을 부칠까, 국을 끓일까. 감자 입장에서는 꽤 갑작스러운 인사 발령이다.
"너 오늘은 전이야."
감자는 아무 말이 없다. 그냥 감자니까.
꼭 감자만 그런 것도 아니다.
우리 딸은 대학에서 방송을 전공했다. 지금 하는 일은 프로젝트 매니지먼트 쪽이다. 전공과 직업의 이름만 놓고 보면 제법 다른 길처럼 보인다.
하지만 방송을 만드는 과정을 들여다보면 의외로 닮은 일이 많다. 방송도 무작정 카메라부터 켜는 게 아니다. 무엇을 만들지 정하고, 사전 조사를 하고, 필요한 사람과 자료를 섭외하고, 촬영 일정을 맞추고, 각자 맡은 일을 확인한다. 촬영이 끝난 뒤에는 편집과 수정 과정을 거쳐 하나의 결과물을 완성한다.
프로젝트 매니지먼트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나의 프로젝트를 위해 먼저 필요한 일을 파악하고, 여러 사람과 일정을 조율하고, 진행 상황을 확인하면서 마지막 결과물까지 끌고 간다.
이름은 달라졌지만, 그 안에서 하던 일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방송이라는 이름표를 떼고 보니, 그때 익힌 일들이 다른 이름으로 다시 쓰이고 있었다.
나도 그렇다.
처음부터 지금의 내가 될 거라고 계획표를 짜놓고 살아온 것은 아니다. 그때그때 할 수 있는 일을 했고, 하다 보니 다음 일이 생겼다.
돌이켜보면 서로 다른 것 같았던 일들이 이어져 지금의 내가 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나는 이런 사람이 될 거야'라고 정해놓았더라면 오히려 만나지 못했을 일도 있었을 것이다.
사람도 감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에게도 전공이 있고, 적성이 있고, 잘하는 일이 있다. 나에게 잘 맞는 일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뜻은 아니다.
방송을 전공했다고 꼭 방송만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한 가지 일을 잘한다고 해서 그것만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지금까지 잘해온 일을 다른 곳에서 다른 방식으로 써볼 수도 있고,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새로 시작할 수도 있다.
잘하는 일이 있다는 것과, 그것만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니까.
살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메뉴판 앞에 서게 된다. 그때 가서 정하면 된다. 오늘은 감자전이면 되고, 내일은 감자조림이면 된다.
평생 할 일을 지금 다 정할 필요는 없으니까.
일단 감자부터 사놓고, 메뉴는 나중에 정해도 된다.
P.S.
그러고 보니 저도 감자와 비슷하네요. 처음부터 어디까지 갈지 정해놓고 시작한 건 아닌데, 한 편씩 쓰다 보니 구독자가 1,000명을 넘었습니다. 쓰다 보니 여기까지 왔습니다. 저도 조금 놀랐습니다. 읽어주시고 함께해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