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착했다고 해서 그곳에 이른 것은 아니다.
낯선 땅에 도착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어느 나라를 가든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 그 나라에 도착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에티오피아에 도착했을 때 그렇게 생각했다. 발은 분명 그 땅을 딛고 있었고, 우리의 봉사도 준비해 온 일정대로 시작될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그날 내가 도착한 곳은 공항과 숙소, 그리고 몇 개의 낯선 장소였을 뿐이다. 그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간과 마음에 이르기까지는 더 많은 발걸음과 시간이 필요했었다.
1. 낯선 풍경에도 누군가의 하루가 흐르고 있었다.
에티오피아에서 물은 수도꼭지를 돌리면 언제든 흘러나오는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우물을 이용하던가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는 수도를 이용하였다. 공동 수도는 살레시오 수녀회에서 기부금을 모아 마을 사람들을 위해 설치하였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언제든지 물을 담아갈 수 있도록 시간제한이 없었지만 많은 사람들의 너무 많은 사용으로 인해 펌프가 고장 났었다. 에티오피아에서는 펌프를 수리할 수 없어 이탈리아에서 기술자를 불러 고쳐야 하는 현실이라 너무 많은 비용이 발생하였다. 그 이후로 공동 수도에는 사용 시간제한이 생겼다.
지정된 시간에만 물을 받을 수 있으니 사람들은 지정된 시간 전부터 자신들의 물통을 가져다 놓는다. 내가 공동 수도에 갔을 때는 노란 물통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가득 모여 있었다. 크기와 모양은 조금씩 달랐지만 모두 비어 있는 채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통의 수만큼 물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물로 이어 가야 할 가족들의 하루가 있었다. 시간이 되어 가자 사람들은 물을 얻기 위해 공동 수도로 모여들었다. 햇빛을 피하려 우산을 쓴 사람도 있었고, 물통 곁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다.
공동 수도에서 물을 받았다고 해서 일은 끝나지 않았다. 물이 있는 곳과 물을 사용해야 하는 집 사이에는 멀고 먼 길이 놓여 있었다. 채워진 물통은 무거웠고, 누군가는 그 무게를 들어 옮겨야 했다. 한 여성은 노란 물통을 나귀 등에 실었다. 물통 하나도 가볍지 않을 텐데 여러 개를 단단히 묶어야 했다. 사람의 손과 나귀의 걸음이 물을 집까지 운반하는 수도관이었다. 나귀는 천천히 길을 것이고, 여성은 물통이 떨어지지 않도록 살피며 그 곁을 지켰을 것이다. 이 여인은 그나마 다행이다. 나귀가 없는 사람들은 물통을 짊어지고 최소 1~2시간 넘게 걸어서 가야 했다.
나는 한국에서 볼 수 없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고 처음에는 노란 물통의 강렬한 색과 나귀의 모습이 낯설게 다가왔다. 그러나 사진을 오래 바라볼수록 눈에 들어온 것은 이국적인 풍경이 아니라 물 한 통을 얻기 위해 필요한 기다림과 노동이었다. 음식을 만들고 몸을 씻으며 집을 정돈하고 생명을 돌보는 모든 일에 물이 필요하다. 물이 부족하다는 것은 단지 목이 마르다는 뜻이 아니다. 물을 구하는 데 더 많은 시간과 노동을 써야 하고, 그만큼 다른 일을 하고 배우며 쉴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든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가 수도꼭지를 돌리는 몇 초 동안, 에티오피아의 누군가는 빈 물통을 들고 몇 시간의 길을 나서야 했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흘려보낸 물을 위해 에티오피아에서는 너무 많은 사람의 시간과 수고가 담겨 있었다.
에티오피아에서 나는 물에 대한 나의 자세를 새롭게 물어야 했고 고쳐야 했다. 물이 생명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내가 누리는 편리함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며, 깨끗한 물을 얻기 위해 수고하는 사람들의 시간을 존중하는 태도다. 물은 돈을 낼 수 있는 사람만 누리는 상품이기 전에 모든 생명이 함께 누려야 할 공동의 선물이다. 물 앞에서 감사할 줄 알고, 필요한 만큼 사용하며, 다른 이의 갈증을 외면하지 않는 것, 그것이 내가 에티오피아의 우물가에서 배운 물에 대한 새로운 자세였다.
빈 물통은 채워졌고, 나귀는 다시 길을 나섰다. 물은 사람과 동물의 수고를 지나 어느 집의 하루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물 한 방울에도 누군가의 기다림과 노동, 그리고 생명이 담겨 있음을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2. 시장은 구경거리가 아니라 삶의 지리였다.
난 외국을 나가면 꼭 큰 시장을 가본다. 시장을 보면 그 나라의 문화와 의식주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티오피아에서도 시간을 내어 시장을 방문하였다. 시장에는 수많은 것이 한꺼번에 눈에 들어왔다. 나무로 엮은 좌판과 알록달록한 천, 물건을 고르는 사람들, 분주하게 오가는 낯설면서도 익숙한 몸짓이 생생했다. 갖가지 식재료와 향신료도 나의 눈길을 끌었다. 처음 보는 다양한 물건들이 있었고, 나는 우리를 돕고 있던 현지 지인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느라 바빴다. 여행자인 나에게 그곳은 카메라를 들게 만드는 특별한 풍경이었다.
그러나 내가 특별하다고 느낀 그 공간에서 한 젊은 남성이 특별해 보였다. 그는 한 팔을 가슴에 얹고 다른 손을 입가에 댄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였다.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듯 보이기도,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보이기도 하였만, 진실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누구를 기다리는지, 무엇을 바라보는지, 그날 그가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었는지도 나는 알지 못했다. 내가 아는 것은 그가 그곳에 서 있었다는 사실뿐이었다. 카메라를 든 나는 시장 전체를 하나의 이국적인 장면으로 담으려 했지만 그 남자를 바라보면서 문득 내가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되묻게 되었다.
나는 사람들의 삶을 만난 것일까? 아니면 낯선 나라의 볼거리를 수집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에게 시장은 여행지가 아니라 사람을 만나고 물건을 사고팔며 하루를 이어 가는 생활의 자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색적 풍경을 남기려는 들뜬 마음이 전부였다. 뒤늦게 반성하며 사람의 모습을 가까이 보려고 노력했지만, 그의 삶을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선명해진 얼굴 앞에서 내가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드러났었다. 내가 구경하던 시장에서 그는 자신의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더 이상 멀리서 풍경만 바라보고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카메라 뒤에서 벗어나 그들이 살아가는 공간 안으로 들어가야 했고, 그러기 위한 결심과 도전이 필요했다.
3. 길을 걷는다는 것
수녀님 한 분이 들판을 가로질러 걸어가고 있었다. 등에 가방을 메고 양손에도 필요한 물건을 들었다. 누가 봐도 편안한 산바카라을 나온 사람의 모습은 아니었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자신의 자리에서 나와 다른 곳으로 향하는 사람의 걸음이었다. 사진 속 수녀님이 어디를 향하는지 보이지 않는다. 사진 밖에 누가 기다리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몸의 방향은 분명하다. 수녀님은 카메라를 향해 멈추어 서지 않고, 누군가를 향해 계속 걸어가고 있을 뿐이다. 그 걸음이 에게 묻는다. 나는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타인의 삶을 바라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우리는 차창 안에서도, 카메라 뒤에서도, 안전한 거리에서도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들의 물통과 시장, 골목과 집을 사진에 담고 그들의 삶에 관해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그들의 삶에 이를 수 없었다. 본다는 것과 만난다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었다. 나는 보기만 하였지만 만나려 하지 않았다. 봉사를 하려면 그들의 삶의 현장에 들어가 만나야 했다.
그들의 삶의 현장에 들어간다는 것은 공간을 이동만을 뜻하지 않는다. 내가 익숙하게 서 있던 자리, 판단하는 자리, 도움을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자리에서 내려오는 일이었다. 그들에게 다가갈수록 내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생각을 내려놓고,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해야 했다. 가까이 간다는 것은 더 많이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오래 듣기 위해서이다.
수녀님의 걸음에는 거창한 영웅의 모습이 없다. 한 걸음씩 땅을 밟으며 누군가에게 다가갈 뿐이다. 그러나 모든 만남은 이 한 걸음에서 시작된다. 사랑은 멀리서 안타까워하는 마음에 머물지 않는다. 사랑은 자신의 몸을 움직여 타인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것이다. 사랑은 마음만이 아니라 방향을 가진다. 내가 편안한 곳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가는 자리로 내가 먼저 향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에게 다가간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삶을 모두 이해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까이 갈수록 내가 모르는 것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삶을 내 생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목소리와 침묵 앞에 머무는 것이다. 내가 정한 답을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질문을 들으러 가는 것이다.
수녀님의 걸음은 이 봉사의 방향을 보여 주었다. 에티오피아를 이해하려면 풍경을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물을 길어 나르는 사람, 시장에서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 골목과 집에서 가족을 돌보는 사람에게로 향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의 곁에 서서 내가 무엇을 줄 수 있는지 묻기 전에, 먼저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바라보고 들어야 했다.
그들에게로 향하는 한 걸음은 타인을 바꾸기 위한 출발이 아니었다. 타인의 삶 앞에서 내가 먼저 변화되기 위한 출발이었다. 그날 수녀님은 들판을 건너고 있었지만, 내가 보기에 수녀님이 건너고 있던 것은 우리와 사람들 사이에 놓여 있던 거리였 것 같다.
4. 연기 너머에도 한 사람의 하루가 있었다.
골목에 들어서자 연기가 먼저 눈앞을 가렸다. 아니, 불 위의 솥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와 섞였는지도 모르겠다. 연기와 수증기는 햇빛을 산란시켜 희뿌연 대기로 변해 골목 전체를 채우고 있었다. 그 사이로 큰 솥과 노란 물통, 작은 의자와 대야들이 보였다. 한 사람은 불 가까이에서 몸을 숙이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각자의 일을 하고 있었다. 아침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처음 보는 외국인인 나를 신경 쓸 틈도 없이 분주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집중력과 달리 나의 시선은 연기와 흙길, 고인 물과 낡은 벽에 먼저 머물렀다.
내가 익숙하게 살아온 도시의 깨끗한 환경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마음속에서는 ‘열악하다’는 생각이 떠올라 떠나가지 않았다. 이 환경에서 식사를 준비하고, 밥을 먹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나의 생각이 청결과 위생이라는 부분에 머물 때, 여전히 그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솥 안에서 무엇을 끓이고 있었는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하였다. 음식을 만들고 있었는지, 물을 데우고 있었는지, 다른 일을 준비하고 있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내가 낯설다고 느낀 이 골목은 그들에게 구경거리가 아니라 매일의 삶이 이어지는 자리였다.
앞서 공동 수도에서 보았던 노란 물통이 여기에도 있었다. 공동 수도에서 시작된 물은 음식을 만들고, 몸을 씻고, 주변을 정돈하는 하루의 힘으로 변해, 사람들의 하루를 열어 주었다. 물통의 흠집과 얼룩은 지금까지 지나온 물의 길과 운반한 사람들의 손길이었다. 불도 마찬가지였다. 도시에 살았던 내게 불은 버튼을 누르면 생기는 힘이었지만, 이곳에서는 장작을 모으고 불씨를 살피며 연기 속에 머물러야 얻을 수 있는 생활의 힘이었다. 물과 불은 어디에서나 인간의 삶의 자리를 지탱하지만, 그것을 얻고 사용하는 데 필요한 수고와 노력은 사람마다 장소마다 너무나 달랐다.
나는 그들의 삶의 자리로 들어가 그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사실 먼저 걷어 내야 할 것은 내 안의 성급한 판단과 선입견이었다. 낯선 환경을 보자마자 가난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도움을 기다리는 존재로만 바라보려 했었다. 그들의 삶을 존중한다는 것은 불편한 현실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일이 아니었다.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되, 한 사람의 삶을 어려움만으로 설명하지 않는 것이었다. 부족해 보이는 조건만을 바라보다가 그 안에서 움직이는 손과 바카라임, 관계와 시간을 놓치지 않는 것이었다.
내가 연기의 매쾌함과 주변의 지저분함을 바라보는 동안, 그들은 멀리서 받아온 물과 주어온 장작으로 만든 불로 자신의 하루를 이어 가고 있었다.
5. 문턱을 넘었다고 그 삶을 아는 것은 아니었다.
시장과 골목길을 지난 우리는 생활공간 가까이까지 들어갔었다. 흙빛 벽과 쇠창살이 놓인 창문, 문 앞의 물통과 신발, 빨랫줄에 걸린 옷가지가 보였다. 방문을 허락한 스마일(가칭)은 집 앞에서 웃고 있었고, 스마일의 친구(처음 방문했을 때는 동생인 줄 알았으나 이후 친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문가에 서 있었다. 스마일의 어머니는 몸을 낮추어 다른 일을 하고 있었으며, 봉사자 한 명은 아이의 손을 잡고 그들 곁을 지나고 있었다. 한 순간이지만 만남과 노동, 돌봄과 일상이 동시에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스마일과 그의 가족들과 인사를 나눈 뒤, 집 안으로 초대를 받아 안쪽의 공간을 보게 되었다. 어두운 방 안에는 잠자리와 돗자리, 바구니와 여러 생활 도구가 놓여 있었다. 한쪽에서는 작은 불이 타오르고 있었고, 그 위의 냄비에서는 누군가의 음식이 준비되고 있었다. 잠을 자는 자리와 음식을 만드는 자리가 한 공간 안에 있어서 놀랬다. 사실 주방 공간이 별도로 있었지만 간편한 식사, 커피를 준비하기 위한 화롯불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았다. 분명한 사실은 이곳도 살아가는 이들의 손길과 시간, 그리고 그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좁고 어두운 방과 단출한 살림이 보는 순간 내가 익숙하게 살아온 공간과 비교하려는 마음이 당연히 생겨났다. 그러나 그 비교가 시작되는 순간, 이 집은 한 가족의 삶이 아니라 내가 평가하는 환경으로 바뀌고 만다. 집 안의 물건들을 결핍의 증거로 만들고, 작은 방을 가난의 상징으로만 부르는 것은 그곳에서 이어지는 삶을 너무 쉽게 설명하는 일이었다. 집 안의 불은 단순히 열악한 환경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음식을 마련하고 가족의 하루를 이어 가기 위해 꺼지지 않는 불이었다. 돗자리와 이불도 부족함을 증명하는 물건이기 전에 누군가 몸을 누이고 쉬는 자리였다. 집 안의 물건 하나하나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사용의 기억과 가족의 시간이 쌓여 있었다.
나는 문턱을 지나 집 안을 볼 수 있었지만, 그들의 삶 전체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가까이 보았다고 더 많이 알게 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안쪽을 보게 될수록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이 많아졌다. 나는 한 가족의 생활공간을 가까이에서 보았지만, 그들이 겪어 온 시간과 서로를 돌보는 방식, 그 집에서 나눈 기쁨과 걱정까지 담아내지는 못했다. 비록 그들의 삶의 자리에 가까이 들어갔다고 해서 한 가족의 삶을 쉽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 없었다. 타인의 문턱을 넘는다는 것은 더 많은 것을 촬영할 권리를 얻는 일이 아니었다. 보여 준 것을 감사히 바라보고, 보여 주지 않은 삶의 영역을 존중하는 바카라임을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7. 결말 — 그 땅에 도착하기까지
낯선 땅에 발을 딛는 일은 내 생각과 달리 아주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데는 몇 분이면 충분할 테지만, 익숙한 판단에서 내려오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하늘과 길, 골목과 들판을 보았다. 그러나 본다는 것이 곧 안다는 뜻은 아니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내가 모르는 것이 많았다. 내가 배워야 할 것은 에티오피아에 관한 배경 지식이 아니었다. 타인의 삶 앞에서 쉽게 아는 척하지 않는 자세였으며, 나의 익숙한 판단에서 빨리 내려오는 방법이었다.